[Opinion] ‘유토피아’란 없다, 그 어디에도 [시각예술]

글 입력 2020.03.01 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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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확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2월의 어느 날,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문화생활을 누리기 위해 학동역의 ‘플랫폼엘’을 찾았다. 이 곳에서는 지난 2019년 12월 10일부터, 약 한 달 후인 4월 5일까지 독특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문학과 시각예술을 결합한 새로운 시도인, ‘가능한 최선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듯,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우리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이 전시가 뚜렷하게 낙관적인, 혹은 비관적인 관점으로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관람객들은 본격적인 전시 관람 전, 마치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가 빨간 약과 파란 약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받는 것과 흡사한 경험을 먼저 하게 된다. ‘레드프린트’와 ‘블루프린트’라는 두 가지 미래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데, 선택에 따라 전시의 관람 순서가 달라지는 것이다. 입장 전, 상반된 두 세계에 대한 설명이 적힌 카드를 참고해 선택하면 된다.

 

전자를 선택한 사람은 2층의 레드프린트 세계부터 관람을 시작하고, 후자를 선택한 사람은 3층의 블루프린트 세계부터 관람을 시작하게 되는데, 나는 레드프린트 세계를 선택해 2층부터 관람을 시작했다. 카드 설명에 따르면 블루프린트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에 의해 아직 발생하지 않은 모든 미래의 일들까지 이미 예측 가능한 세계였고, 레드프린트는 아무런 규칙과 질서가 존재하지 않고 심지어는 어제와 오늘이 한 장소에 공존하는 세계였다. 입장 전, 레드프린트의 세계를 고른 만큼 나는 이 세계가 블루프린트보다 더 스펙터클하고 재미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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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입장 직후, 어쩐지 내 결정이 옳은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레드프린트 사회를 보여주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혼란스럽고, 조금은 무섭기도 했다. 모든 사물들의 형체는 불분명했고, 그래서 무엇이라고 일컫기도 힘들었다. 그림 속 사람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일말의 광기가 담겨있는 것 같았고, 행동 하나하나 또한 폭력적인 느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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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레드프린트 세계의 시민사회를 단적으로 그려낸 비디오 아트 작품은 가장 큰 충격을 주었다.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할 만큼, 인과관계나 상관성을 찾아보기가 힘든 서사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아트 속 이야기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평범한 시민들도 요정이 될 수 있는 공원이 존재하는데, 실제 그 곳에선 시민들이 만화 캐릭터 코스프레에 쓰이는 듯한 의상을 입고 장례식을 치루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장례식인지, 가상의 장례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며 죽은 이의 몸 위에 돌을 하나씩 올려놓는다. 아마 앞으로도 내가 이 작품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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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프린트의 공간을 지나, 블루프린트로 향해 가는 중간에 위치한 공간에서는 온통 무채색으로 가득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불에 탄 듯 형체가 녹아 내린 카메라와 절반은 까맣고 절반은 새하얀 열대 과일들, 그리고 양파가 생겨나는 과정을 표현한 듯한 수많은 석고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강렬한 색채가 가득했던 레드프린트 세계의 작품들과 대비되는 이 작품들을 통해, 마치 우주선이나 타임머신을 타고 또 다른 평행 세계로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드프린트에 대한 기대에서 약간의 실망감으로 바뀌었던 마음에, 다시 한 번 기대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설명에 따르면 블루프린트는 레드프린트와 전혀 상반된 사회라고 했으니, 훨씬 더 안정적이고 편안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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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블루프린트 세계에 입장하자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던 것은, 마치 연필화를 연상시키듯 하얀 바탕에 온통 흑백의 선들로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이었다. 멀리서 볼 때 어지러운 낙서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마치 거대한 컴퓨터 회로인 듯, 혹은 미로인 듯한 형체가 보이기도 했다.


한편 그 옆으로는 <숲에서 사라진 남자>라는 제목의 연작 펜화도 전시되어 있는데, 이 또한 멀리서 봤을 때는 전체적인 숲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듯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정교하게 두 세 등분으로 나눠진 숲의 모습과 사라지는 남자의 팔, 다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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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계속되는 블루프린트 공간에서는 레드프린트에서의 사물들과 정반대의 느낌을 가진 사물들이 등장한다. 모두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어 먹지 못할 것만 같은 느낌의 음식 그림이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이다. 이 음식들은 실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한편으로 주기도 한다.


앞선 레드프린트 공간에서 내게 큰 충격을 주었던 비디오 아트 작품과 달리, 이 곳 블루프린트의 비디오 아트 작품들은 매 순간 규칙적으로 화면이 켰다 꺼지길 반복하고, 화면이 몇 가지 색으로 반복적으로 전환되는 것이 다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째깍거리는 기계음만이 블루프린트 세계를 이루는 소리 전부였다.

 

한참동안 꺼졌다 커지길 반복하는 비디오 아트 작품의 화면들을 바라보면서, 결국 블루프린트 세계 또한 유토피아적인 미래는 결코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3층 관람 내내 AI 알고리즘으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예측가능한 블루프린트 세계를 상상했는데,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시작하는 삶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감정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를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도전이나 시도라는 아름다운 가치도 이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었다. ‘역시 뭐든지 적당히’라는 결론을 내리며 전시 감상은 끝이 났다. 결국 우리에게 가능한 최선의 세계, 최선의 미래란 블루프린트와 레드프린트 그 중간 어디의 절충적인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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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전시 자체를 놓고 돌아보자면, ‘가능한 최선의 세계’는 개인적으로 꽤 난해한 전시이기도 했다. 앞서 문학과 시각예술의 결합이라고 언급했듯이 이 전시의 곳곳에는 레드프린트와 블루프린트 세계 각각에서 일어나는 삶의 단면들을 그린 이야기 카드가 있는데, 이것이 전시 이해에 오히려 혼란을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카드 한 장의 텍스트 분량이 너무 길어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동시에 카드를 읽느라 전시 감상 시간이 너무 길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AI와의 공존을 시작한 새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가능한 최선의 세계’가 던진 물음은 한번쯤 꼭 생각해봐야 할, 다분히 ‘상징적’이고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다가올 미래, 과연 그 세계는 우리에게 가능한 ‘최선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이 전시 덕분에, 아마도 당분간은 꽤나 심오한 고민을 거듭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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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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