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커(Joker). 나는 답을 모른다. [영화]

글 입력 2020.02.2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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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가 개봉하고 세간의 이목을 상당히 주목시켰다. 이전부터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던 모든 조커를 좋아했고 조커라는 고유 명사에서 풍기는 모든 향에 취해있던 사람인지라 이번 영화 또한 꽤나 강렬했다. 한동안 그 향기가 코끝을 맴돌아 지워내고 일상의 향기를 맡는 것에 애를 먹었다. 그토록 강렬했고 그토록 짜릿했던지라 이 에디터 활동의 막바지에서야 다시 꺼냈다. 나는 딸기 케이크의 딸기를 가장 마지막에 먹는 그런 부류의 사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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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은 무엇인가? 선과 악은 존재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



착하게 살아라. 착한 사람이 돼라 따위의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사람들은 성선설이 어쩌고 성악설이 어쩌고 악인과 선인 어떻다 토론하기 바쁘다. 나에게는 모두 무의미한 일들이다. 본래 선과 악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또는 어떤 행위를 착하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을 내리려면 일정한 기준이 필요하다. 이 기준이는 게 문제다. 절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인류가 사회를 형성한 이래 겪어온 일들과 저지른 실수를 근거로 하여 사회가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을 선이라 규정하고 사회의 안녕에 위험이 될 요소들을 모아 악이라 정의 내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저 합리적이고 보다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한 것에 지나지 않으면서 선이니 악이니 싸우기 바쁘니 웃음만 나온다. 이 사회에 온전히 존재하는 것은 합법과 불법, 달리 말해 죄를 지었는가 아닌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내가 보기에는 그저 하나의 희극이다.


아서도 사회의 규칙에 반하는 죄를 지었을 뿐 나쁜 짓을 했다거나 악역이라는 소리를 들을 이유는 없다. 어머니를 모시며 자식의 효를 다하고, 자신이 바라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그런 아서의 간판을 훔쳐 달아나고 직장까지 잃게 만들었다. 이 장면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시대의 미디어가 보여주는 그저 장난을 치고 힘 없이 나약하고 순수하다고 묘사되는 아이들은 과연 정말로 그저 선한가. 이처럼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던 아이들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보이지 않고 아서에게만 몰아치던 그 질타가 선과 악이 무어냐고 물었다.


내가 내린 답은 선도 악도 없다는 거다. 아서는 조커가 됐고 함께 일 하던 동료와 금융인을 죽였다. 하나 그들은 아서를 속이고 가만히 있던 아서에게 위협을 가했다. 아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을 내렸고 받은 만큼 돌려줬을 뿐이다. 살인, 강도, 폭행 등을 비롯한 행위가 범죄이자 위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가 ‘악’이라는 범주로 묶인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규칙을 어겼기에 그에 따른 처벌을 받아야 함은 분명 하나 그 행위가 악한 행동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받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서는 그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했을 뿐이고 그들이 먼저 피해를 주었기에 그 피해를 돌려줬을 뿐이다. 이런 이성적이고 어찌 보면 냉담하다고도 할 수 있을 소리를 대중 앞에서 늘어놓는다면 아마 나는 정신 나간 놈이라며 질타를 받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질타를 던지는 이를 본다면 나는 감성에 물들어 이성을 놓친 이라고 질타를 날려 줄 것이다. 보편성은 절대성이 아님을 모르고 날뛰고 있는 사람에 지나지 않기에 내가 참아 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와 허상은 무엇으로 구분하는가?”



아서는 망상에서 망상으로 살아가고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망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 하는 이었고 그로 인해 아서는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도 모른 채 평생을 진짜 아들이라 믿고 살았으며 선천적으로 뇌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으나 아버지의 학대에 의해 생긴 장애였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일방적인 사랑을 느끼며 데이트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망상에 절여진 삶을 살던 아서는 자신의 손으로 어머니를 죽이고 그 괴로움 이는 칼로 망상이라는 커튼을 찢어내고 현실로 돌아오지만 되려 그 현실이 더 고독하고 괴롭게 만들었다.


이성적으로 풀어보자면 우리가 물리적인 감각으로 인지하는 이곳이 현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얘기일 뿐이다. 개인의 삶은 과학만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특히 자신만의 세계에서는 이성적인 것보다 감성적인 것이 보다 크게 작용한다. 아무개가 보고, 듣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그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가 곧 현실이라는 뜻이다. 실존하는 현실이 괴로워 더 이상 힘들지 않아도 되는 자신만의 현실을 살아갈 수도 있고 되려 자신만의 현실이 더 괴롭지만 그 괴로움을 잊지 못해 그곳에 얽매여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도 있다. 그럼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허상의 커튼을 찢을 칼을 쥐어 줄 수 있을까? 만일 그곳에서 사는 것이 더 행복할지도 모를 이에게 다수가 올바르다 믿는 기준에 맞춰 굳이 그 칼을 쥐어줘야만 하는 걸까? 정답이 무엇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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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라는 캐릭터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도, 다크 나이트에서도, 그리고 이번 조커에서도 이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 나는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세상 사람들의 질타를 받고 악인으로 몰리며 배척당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어째서인가 조커가 세상을 질타하며 배척하는 것만 같았다. 우스꽝스럽게 가려진 얼굴로 언제 웃는 표정으로 세상을 비웃는 것만 같았다. 그가 던지는 수도 없이 많은 질문들에 정신을 못 차렸다. 선과 악은 무엇인가. 허상과 실제는 무엇인가. 미치광이라 불리는 이들은 그렇게 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도저히 답을 내리지 못할 것만 같은 이런 질문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 속에 잠기니 되려 고요했다. 거센 물살이 몰아치는 수면을 뚫고서 깊고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되려 편히 떠다니는 그런 상황이 떠오르고는 했다. 조커를 악인이라 부르며 매도하는 대중과 미디어가 나에게는 그런 파도였다. 그 속에 치이다 보니 되려 고요해졌고 조커라는 인물은 그저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달고서 그 고요한 매력에 온전히 젖어들었다. 어쩌면 나의 해방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새로움과 자극을 찾느라 바빠 갈증이 심하던 나의 그 갈증을 해소해줄 유일한 한 모금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악인이라 몰아치는 이들이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욕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남이 반드시 좋아할 필요는 없다. 하나 내가 먹는 음식을 삿대질하며 그따위 것을 왜 먹느냐 한다면 음식을 접시 채로 집어던질지도 모르겠다.

 


[김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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