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이브

K-pop 콘텐츠 속 이브의 부활과 재탄생
글 입력 2020.02.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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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K-pop은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거대한 팬덤을 형성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 K-pop 콘텐츠는 매력적인 이미지를 단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토리텔링 전략을 통해 하나의 종합 문화 콘텐츠로 발전했다. 이러한 K-pop 콘텐츠의 스토리텔링에는 기존의 익숙한 모티브에 대한 재해석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익숙함과 신선함의 적절한 결합으로 대중의 흥미와 관심을 끄는 데 더욱 효과적이다. 그중에서도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문화의 근간이 되어 온 성경, 그중에서도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 아담과 이브의 낙원 상실에 관한 이야기는 k-pop 제작자들에게 특히 사랑받아 온 모티브이다. 여기 기독교 세계관 속 최초의 여성인 이브를 콘셉트로 한 K-pop 콘텐츠의 두 사례를 소개한다.


 
뱀이 된 하와, 금기를 깨다

 

 

가인의 네 번째 솔로 미니앨범 [Hawwah]는 하와(이브와 동일인으로, '하와'가 본래의 어원에는 더 가까우나 번역 과정에서 '이브'라는 영어식 이름이 탄생했다고 전해진다)라는 성서 속 인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앨범이다. 앨범의 ‘리릭 프로듀서’를 맡았던 김이나 작사가는 앨범의 콘셉트에 대해 ‘뱀이 곧 하와이며 하와 안에 뱀이 있다는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다’라고 밝혔다. 앨범의 타이틀곡 'Paradise Lost'의 가사에서 화자는 유혹의 주체와 대상, 뱀과 하와의 경계를 넘나든다. 앨범의 제목 'Hawwah'가 거울에 비춘 듯한 대칭 구조를 이루듯이, 뮤직비디오는 거울을 주요 소품으로 활용하여 순수함과 신성성을 연상시키는 흰 옷을 입은 모습과 유혹적인 뱀을 연상시키는 검은 옷을 입은 모습을 교차하여 빛과 어둠의 이미지를 대비시키며 하와 내면의 양면성과 갈등을 표현하고 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는 흰 옷을 입은 가인이 나무가 그려진 문 앞에서 고민하다 파이프로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을 받아 마시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따라서 이 뮤직비디오는 하와의 행동을 갈증의 해소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바라보고 있으며, 이 갈증은 뱀으로 형상화되는 하와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와 안에 꿈틀거리는 이 욕망은 뱀의 움직임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안무를 통해 마침내 폭발하듯 분출되며 곡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른다.

사실 뱀과 하와의 경계를 모호하게 설정하거나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은 가인의 'Paradise Lost'에서 새로이 등장한 개념은 아니다. 이는 오랫동안 다양한 작품과 서술에서 등장해 왔으며, 뱀=하와라는 인식은 곧 사탄=여성, 즉 여성을 악마화하고 악의 근원으로 여기는 성차별적 인식으로 이어져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여성혐오와 가부장제를 강화하는 토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인의 [Hawwah]는 하와를 남성을 파멸로 몰고 가는 여성, 이른바 ‘팜 파탈’의 원형이 되는 부정적인 인물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의 가사는 하와라는 테마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Apple’, ‘Free Will’, ‘Paradise Lost’, ‘The First Temptation’, ‘두 여자’, ‘Guilty’의 총 6곡은 ‘신성성과 악마성을 동시에 가진 양면의 여인’, ‘신의 말씀을 깨는 저항적이고 능동적인 여인’,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유 의지의 여인’ 등 하와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

가인은 그동안 곡을 발표할 때마다 파격적이고 새로운 콘셉트를 선보이며 화제와 논란의 중심에 섰다. 행복한 첫 성관계에 대해 말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여성의 성적 욕망과 판타지를 표현한 가인의 ‘피어나’는 남성 소비자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기 위한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생산하면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 말하기는 터부시하는 모순이 존재하는 기존 가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진실 혹은 대담(Truth or dare)’은 온갖 루머와 소문에 둘러싸인 삶을 살면서도 정작 본인이 그 소문을 만들고 퍼트리는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맞서는 것은 쉽지 않은 여성 연예인의 현실을 전면돌파하며 통쾌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Hawwah] 앨범의 콘셉트인 태초의 금기를 깬 여인, 하와는 가수와는 동떨어져 단순히 파격을 위한 파격, 콘셉트를 위한 콘셉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요계의 금기를 깨는 가인이라는 아티스트가 보인 그동안의 행보의 연장선상에 있는 콘셉트였다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이브, 에덴을 거부하다

 

가인이 성경에 등장하는 하와라는 인물을 콘셉트로 하여 하나의 앨범 내에서의 스토리텔링을 이루었다면, 이달의 소녀(Loona)는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그룹의 자체적인 세계관과 서사를 가지고 있다. 루나버스(Loonaverse)라고 불리는 뫼비우스 띠 구조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이들은 우리가 사는 지구에 해당하는 지상계의 이달의 소녀 1/3, 뫼비우스 띠의 꼬인 부분에 위치하며 서로 다른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는 중간계의 이달의 소녀 오드아이써클, 그리고 에덴(천상계)에서 떨어진 소녀들로 이루어진 이달의 소녀 yyxy의 세 유닛으로 나누어진다.

이달의 소녀 yyxy의 네 멤버들 중 가장 먼저 공개된 멤버이자 가장 먼저 에덴을 거부하고 다른 멤버들을 이끈 인물로 설정된 이브의 ’new' 뮤직비디오에는 추락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브는 높은 곳에 올라 사과를 던지거나, 자신의 이름이 적힌 택들을 잘라 땅에 떨어지게 하거나, 자신이 직접 아래로 뛰어내리는 등 스스로 추락을 선택하고 행하는 주체가 된다.

 


점점 더 태양에 다가서려 / 타버린 날개짓 속에
초라한 내 모습 그때 겨우 / 알게 된 내 new days
(중략)
달콤한 유혹처럼 피어난 / 내 안에 또 다른 내 모습
거울 안에 비춰진 내 얼굴이 / 누구인지 나에게 묻게 돼
차가운 새벽녘 공기 속에 / 비로소야 뛰는 심장
당당히 날 바라보던 순간 / 알게 된 내 new face

- 이브 new 中 -
 
‘new’의 가사는 이브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이카루스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이카루스는 더 높이 날고 싶다는 욕망으로 태양에 가까이 날다가 그 열기로 인해 날개가 녹아내려 결국 추락하여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다. 태양은 여러 문명에서 신적인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카루스와 이브에게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절대적이고 강력한 (신적인) 존재의 금기에 도전한 대가로 추락과 고통을 겪는 신화적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기존의 오래된 해석은 이들의 선택이 어리석었으며 우리는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주어진 원칙과 금기에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new’에서 이브는 누군가에 의해 정해진 운명과 자신을 가로막는 벽에 순응하기보다는 이에 맞서 돌진해보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비록 그에 따른 결과로 낯설고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더라도, 시련 속에 새롭게 태어난 자신을 당당히 바라보겠다고 말하며 자신이 직접 만들어 갈 새로운 삶, 새로운 날들에 대한 기대와 예찬을 노래한다.

 
 
 
이상한 세계에 떨어져 / 살고 있다 말해도 난 괜찮아 / 주인공이 된 거니까
에덴 같은 건 필요 없어 / 손에 쥐어진 이 시간이 / 천국이란 뜻이니까

- 고원 One&Only 中 -
 
yyxy 유닛 세 번째 멤버인 고원의 ‘One&Only’ 뮤직비디오는 가인의 ‘Paradise Lost' 뮤직비디오와 유사하게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내면의 갈등을 표현한다. 뮤직비디오에서 고원은 갈등과 방황 끝에 마침내 빛으로 나와 또 다른 자신인 이브가 씌워주는 왕관을 받아들이고 주인공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렇게 이달의 소녀 yyxy는 신이 만든 낙원은 잃었지만 이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낙원을 만들어 가겠다고 선언한다. 이는 새로운 이브의 탄생, 그리고 신인류의 기원이 된다. 팬들에게 ‘에덴즈’, ‘에덴 유닛’이라고 불리던 이들에게 굳이 ‘yyxy‘라는 생소한 이름을 새롭게 붙인 까닭도 여기 있을 것이다. 이달의 소녀 yyxy의 네 멤버인 이브, 츄, 고원, 올리비아 혜는 에덴에 사는 네 명의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자아를 구성하는 존재들이며, 이 네 명이 모여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신인류 유전자 염기서열인 ’yyxy‘가 발현된다.

이달의 소녀 yyxy의 데뷔 앨범 타이틀곡의 제목인 ‘love4eva’는 ‘love forever’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love for eva’라는 해석 또한 가능하다. 우리는 유닛 데뷔에 앞서 공개된 네 멤버들의 솔로곡은 모두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 다시 말해 ‘이브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love4eva’ 뮤직비디오에서 에덴동산은 숲속에 고립된 고성으로 된 학교로 표현되고 있는데, 성서 속 에덴에 금기가 존재하듯이 이곳에도 신적인 존재를 상징하는 교사에 의한 엄격한 통제와 억압이 존재한다. 멤버들과 콘텐츠 주 소비층의 연령대를 고려할 때 학교는 가깝고 친숙한 장소이기에, 학교라는 장소적 배경은 다소 추상적이고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신화적 장소인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장치가 된다.

이뿐만 아니라, 에덴동산을 학교라는 공간에 빗대어 표현한 것은 청소년이 통제와 억압을 깨고 나와 자아 정체성을 자각하며 성년으로 성장하는 청소년 성장 서사의 구조와 이달의 소녀 yyxy의 서사에 유사한 지점들이 존재함을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장 서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달의 소녀 yyxy에게 에덴에서의 추락은 원죄의 근원이 되는 타락과 몰락을 의미하기보다는 일종의 통과의례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인류학자 아놀드 반 겐넵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처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혹은 어떤 사회적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통과하거나 전이하는 고비에서 행해지는 의례 체계를 ‘통과의례’로 정의하고, 대체로 이 의례들에는 세 가지 단계이자 요소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시간의 경과와 장소의 이동을 동반한 의례는 거의 모두, 지금까지의 위치에서 벗어나는 ‘분리’, 낡은 자아를 소멸시키는 투쟁의 시간이자 과도기적 단계인 ‘전이’, 그리고 새로운 위치로 나아가는 ‘통합’의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적용하면, 이달의 소녀 yyxy는 에덴을 스스로 거부하고 통제 아래의 안정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분리',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깨닫는 과정에서 고통과 혼란을 겪는 전이',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자아로 완성된 이들이 비로소 새로운 하나가 되는 '통합'의 통과의례 도식에 따라 나아간다.

따라서 이달의 소녀 yyxy의 서사는 자아 정체성을 찾으며 이를 확립해 가는 과정을 고유의 내적 형식을 통해 구현하는 성장 서사의 틀이 성경에 등장하는 종교적 모티브에 합쳐진 형태를 띄고 있다. 기존의 레퍼런스를 단순히 차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이런 융합적인 형태는 최근의 여러 k-pop 콘텐츠에서 두드러지는 점이다. 또한, 이달의 소녀는 ‘자아’를 yyxy 유닛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주제로 설정함으로써 에덴을 배경으로 한 기존의 많은 문화 콘텐츠나 예술 작품들 유혹과 타락, 원죄와 죄의식을 주된 주제로 삼아 강조한 것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40억 명 이상의 신도를 가진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에서 공유하는 텍스트인 창세기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성서가 강조하는 기존의 종교적인 가치보다는 개인의 종교나 신념에 구애받지 않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 화두인 ‘자아’를 주제로 내세워 많은 이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 세계의 많은 팬들이 이달의 소녀의 콘텐츠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해석을 글이나 영상 등에 담아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참여하는 모습은 오늘날 대중문화 소비자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달의 소녀는 2018 MTV 유럽 뮤직 어워드에서 베스트 코리아 액트 부문을 수상하는 등 현재 국내보다도 유럽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리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세계관과 스토리텔링 전략이 여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

이브라는 동일한 종교적 모티브에서 출발한 위 두 사례에서 우리는 여러 유사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금기를 깨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 이들은 고민과 갈등 끝에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락한 후 괴로워하고 두려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낙원을 꿈꾸며 미소짓는다. 여기서 ‘새로운 낙원’이라는 말은 가인의 'Paradise Lost'에서는 자신의 욕망에 눈뜬 후 새롭게 맛보는 쾌락과 행복을 의미한다면, 이달의 소녀 yyxy의 경우에는 통과의례의 세 단계를 거쳐 마침내 통합을 이룬 새로운 세계,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아 정체성의 확립과 내면의 성장을 이룬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만들어 갈 자유롭고 새로운 삶을 의미한다. 이렇게 가인과 이달의소녀의 콘텐츠는 비슷한 듯 다른 양상으로 이브라는 인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각각의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는 방대한 양의 성경 텍스트에서 창세기의 단 몇 쪽만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분야와 영역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에게 강렬하고 다양한 인상을 남겼다. 아담과 이브가 문명사에 남긴 흔적은 예술, 문학, 철학, 과학 등 전 분야를 망라하며, 이들을 빼고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의 영향력은 우리가 사는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와라는 이름의 어원은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 하임(hayim)에서 왔다고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로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경전에 등장하는 인류의 기원인 이브는 결코 우리와 동떨어진 신화적, 종교적 차원의 세계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며, 시공간과 세계의 경계를 초월하여 이브의 먼 후손들인 우리가 즐기는 여러 K-pop 콘텐츠 속에서 새롭게 부활하고 재탄생하며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오혜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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