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이해 없이도 완전히 사랑할 수 있음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글 입력 2020.02.2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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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월요일,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글쓴이 본인을 어릴 때부터 부모님보다도 물심양면으로 키워 주셨던 그런 분이었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누군가를 떠나 보내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상당히 어색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분의 임종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장례를 모두 마칠 때까지 꽤 많은 울음을 흘렸다. 미국에서 오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작은 누나도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반나절 만에 귀국해 가족 곁을 지켰다. 할머니 생전 시절 그 누구보다 그녀를 잘 따랐던 누나였기에, 상실감도 그 누구보다 컸으리라. 울음을 참지 못하던 누나 입에서 “할머니 보고 싶어요. 그리워요”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흐르는 강물처럼.jpg



그 순간 왜 그리도 그 모든 상황이 이질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졌는지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흘리던 눈물은 떠나가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죄책감과 속죄에 대한 갈구의 마음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나는 사실 꽤 오래 전부터 가족이라는 집단에 대한 염세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거창한 명함 아래, 비단 같은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서로를 옥죄이곤 한다. 자식은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 부모에게 귀속되고 부모는 그런 자식을 소유하려 든다. 형제자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상이한 가치관과 행동 가짐을 지니고 있음에도 같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잘 지내길 강요 받는다. 이런 가족에 대한 나의 신념은 아버지로부터 주로 파생 되었으리라.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항상 어려운 사람이었다. 권위적인 그의 모습에 억눌려 어린시절을 보냈고, 십대 시절 사춘기에 접어들어 참아왔던 그에 대한 모든 저항심을 분출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자 관계 역시 서먹해졌다. 그 후로 나는 항상 다른 누군가를 마주할 때 그 사람을 사람 대 사람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타인을 ‘성별’, ‘직업’, ‘가장’ 등 그 사람의 사회적 역할 내지 위치가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가를 우선적으로 보고자 노력했다.


그런 면에서 재작년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가 가지고 있는 주제의식은 나에게 큰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낳으면 다 엄마인가요?” “사랑하면 때리지 않아, 사랑하면 이렇게 꼭 안아주는 거야.” 라고 말하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들으며 내가 이상적으로 꿈꾸고 있는 가족의 초상을 보고 있노라 느꼈다.

 

그런데 그 모든 생각이 어쩌면 틀렸을 수도 있음을 처음으로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느꼈다

 

할머니에게는 본인만의 처절한 사명감이 살아 생전 있었다. 가족을 부양하고 내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그러한 사명 의식. 다른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평생을 자신의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하셨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반대급부로 무엇인가를 보답했냐고 자문해보면, 그러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던 것 같다. 당장 이 글을 쓰고 있는 본인만 해도 그녀를 필요로 했던 유년시절에는 당신을 그리도 애타게 찾았음에도, 정작 성년이 되고 나서는 오히려 그녀를 멀리 하고 꺼려했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내 머릿속에 항상 깊게 박혀있던 건강하고 날렵하던 할머니의 예전 모습과 노년의 할머니의 모습 간에 크나큰 괴리감이 너무도 낯설고 이질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평생을 마치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손자가 정작 성인이 되고 나서는 본인에게 소홀히 하니, 어찌 보면 할머니 입장에서는 너무나 섭섭하고 서러운 감정이 들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사랑은 어떠한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 아니었다. 본인에게 모질게 대하는 손자라도, 같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는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을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문득 떠오른 오래된 영화가 있어 다시 감상을 했다. 1992년 개봉작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는 영화다. 영화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엄격한 아버지의 훈육 아래 각자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가는 형제의 모습이 그려진다. 곧고 바르게 커가는 노먼과 달리 막내 폴은 도박판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폴은 분명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상처로 얼룩진 삶을 살다 갔다. 하지만 그런 그를 가족은 사랑해 마지 않았다. 폴을 기억하면서 노먼은 아버지에게 폴은 살아 생전 훌륭한 낚시꾼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는 아름다웠어”라고 답한다.


“우리는 때로 가장 사랑하는 이를 돕지 못한다. 우리가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모르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가 주려고 해도 거절을 당하기도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다.”


마치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세지를 할머니께서는 살아 생전 몸소 보여주고 가셨다. 어쩌면 나는 너무 계산을 하며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용서가 되고 치유될 수 있는 순간들이 분명 있는데도 나는 그 순간들을 애써 외면한 적이 숱하다.


솔직히 말해서 할머니의 삶을 그대로 답습해서 살 수 있냐고 묻는다면 절대 그러지 못한다고 답할 것이다. 다만 할머니가 평생을 바치면서 전하고자 했던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이나마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완전히 사랑할 수는 있음을.

 


[김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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