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태어나줘서 고마워

글 입력 2020.02.2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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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 구부러진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얹는다. 새하얀 백지 위에 깜빡이는 작대기 하나만 눈에 들어온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나는 아직도 얼룩 하나 없이 무수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그 하얀 화면을 바라본다.

 

시작은 두렵고 어려우며 때로는 기대와 두근거림을 느끼게 만든다. 처음 글을 쓸 때도 그랬다. 아니 사실은 매번 글을 쓸 때마다 그렇다. 우리는 첫인상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입을 열기 전, 혹은 이후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에도 처음 마주한 겉모습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판단하기도 하니까. 그러니 첫 줄은 첫인상이다.

 

첫 만남의 정적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이내 누군가 먼저 입을 열고 이야기가 하나둘 모여 대화가 되는 것처럼, 글의 첫 줄을 적고 나면 자연스레 다음 문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적어 놓는 것을 제외하면, 면밀히 정리 후 글을 쓰기보다 오히려 글을 쓰며 생각이 정리되는 경우가 많다.) 글감과 대화를 나누듯 텅 빈 화면이 검은 선들의 조합으로 채워지고, 수많은 질문 아래 답을 적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마지막 온점을 찍고 나면 미동도 없이 이 글은 그저 완성되었을 뿐이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 기록이 남는 것이 싫었다. 지난 일기장을 들춰 보면 온통 슬픈 기억들 뿐이었으니까. 나의 그런 작고 약한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일기장을 모두 버렸고 여기저기 적어둔 무거운 메모들을 지웠다. 그렇게 남는 것은 다시 흔적없는 슬픈 기억들과 답 없는 질문들 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휴대 전화의 메모장을 켰다. 어두운 밤 그 작은 사각형의 불빛과 나의 진심이 써 내려간 이야기는 그 작은 화면을 꽉 채우고 넘칠 정도였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글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그렇게 그 새벽 깨어있던 친구에게 메모를 보냈다. 위로를 바란 것도 공감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친구는 내 마음을 읽어주었고 우리가 밤새 나눈 이야기는 다리가 되어 우리를 더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글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그 후로 블로그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못했던 깊은 내면의 외침부터 내가 경험한 것들에 대한 나의 시각을 담은 잔잔한 이야기들까지. 조금씩 나의 글을 읽는 이들이 생겼고 운 좋게도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 또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루하루 사는 이유를 물으며, 말 그대로 태어났기 때문에 살고 있던 내가 드디어 그 답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던 중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다. 이렇게 부족한 내가 많은 이들에게 보여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마음에 한참을 망설였다. 그렇게 내가 처음 메모장을 켰을 때처럼 지원서를 열어 하나둘 칸을 채웠고, 감사히도 에디터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더 많은 이들이 나의 글과 마주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에 걱정 반 뿌듯함 반으로 처음 발행된 글을 수십 번 읽었고, 그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도 막 발행된 또는 이미 발행된 수많은 글을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는다.

 

누군가 첫 줄을 읽는다. 그리고 비로소 글은 태어난다. 그것이, 글의 탄생이 나를 가장 설레게 만든다. 글은 글쓴이 혼자 탄생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나의 모든 글은 살아 숨 쉬게 되었고 지금까지 써온 글들에는 여전히 온기가 가득하다. 어쩌면 이 작은 글들은 매일 태어나는 많은 생명처럼 범람하는 창작물 뒤로 밀려나 때로는 잊힐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득 보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레 연락을 건네보는 친구처럼, 꼭 다시 읽으리라 다짐하며 책장 구석 즈음 꽂아둔 책처럼 언젠가 누군가는 기억하고 찾아주리라 믿는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을 쓰고 수많은 날을 읽으면 된다.

 

그렇게 나와 당신에게, 우리를 통해 태어난 수많은 글에 말하고 싶다.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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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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