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서로를 향한 외침 그리고 침묵 -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 [공연]

글 입력 2020.02.2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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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페이지에 달하는 글로만 존재했던 그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펼쳐진다. 아버지와 아들들 그 서로를 향한 외침, 비난과 침묵이 숨 막히도록 관객을 향해 조여온다. 피아노 한 대와 5명의 배우로 그 시간, 그 공간, 그 날, 그 공기는 완벽하게 채워졌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내 눈앞에서 그들의 목소리로 책 속 대사들을 이어가니 그것만으로도 이 공연을 만나는데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느낀 강렬했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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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라마조프가는 호색한, 강탈자, 방탕, 욕정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알려진 러시아의 한 가문이다.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 까라마조프는 가장 ‘까라마조프’적인 면이 두드러지는데 자신의 아들들을 버리고 평생 방탕하게 살고 있으며 계속해서 욕정만을 쫓으며 살아간다. 그를 제일 많이 닮은 첫째 아들 드미트리는 장교로, 방탕을 일삼고 약혼녀 카체리나가 있지만 아버지가 점찍어둔 여인 그루셴카를 좋아한다.


이 사랑과 욕정 때문에 까라마조프가는 큰 사건을 맞는다. 둘째 아들은 이반으로 어릴 때부터 침울하고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인간임을 오래전 깨달아 더 세상의 아픔을 일찍 맛보았다. 무신론자로 교회 재판에 대해 사설도 쓰고 ‘대심문관’이라는 논문을 쓰는 등 자신의 사고와 논리를 알리는데 이 또한 그들의 가문에서 논란거리가 된다. 셋째 아들 알료샤는 여색과 남자들의 욕구에 대해 굉장히 싫어하고 광적인 수치심과 결벽증을 안고 살아간다. 수도원에서 지내며 신께 자신의 삶을 바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아들로 추정되는 사생아 스메르쟈코프는 아버지의 집에서 요리를 하며 그의 충실한 하인으로 지낸다. 어딘가 영리하면서도 기이하고 알 수 없는 그는 까라마조프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공연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장편을 극에 한꺼번에 쏟다 보니 버릴 부분은 과감히 버리고 꼭 넣어야 할 부분은 넣고자 했던 고민스러운 마음이 보였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한 사람이 이러한 글을 써 내려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스러운 감탄과 경외심을 가장 많이 느꼈다. 그의 언어와 논리, 사상, 글의 형식, 그리고 이야기 전개까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에 도전하는, 신 앞에 서는 이야기들, 그리고 신의 세계에 한발 다가서는 그들의 말 하나하나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계속 반복해서 읽다 보니 예상보다 책 읽는 게 훨씬 오래 걸리기도 했다. 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이 책 속 담긴 이반의 이야기, 알료샤의 이야기, 로시마 장로님의 이야기, 그루셴카의 이야기, 스메르쟈코프의 이야기 등 각자의 인물이 말하는 썰과 같은 이야기가 어떻게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했는지 놀랍고 무서울 정도였다.


종교적인 숙고와 철학적인 성찰이 가득 차 있는 주옥같은 ‘헛소리’들을 무대에서 다 만날 순 없어 아쉬웠지만 강렬한 멜로디로 이어지는 노래들과 실제 까라마조프 형제 같았던 배우들의 연기로 공연을 보는 내내 그들에게 빠져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다. 보는 내내 강강최강중강최강 흐름의 넘버들이 내 귀에 꽂힌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들도 좋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물고 할퀼 것 같은 넘버들 속에서 그들의 합창과 화음은 관객 모두를 숨죽이게 만들고 소름 끼치게 한다. 사실 등장인물 5명 모두가 엄청난 기운과 위압감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그들이 서로를 맞닥뜨릴 때 터지는 스파크와 폭발이 너무나 강렬하다.

 

 

누가 행동을 했을까 그건 중요한 게 아냐
누가 더 원했을까 그게 가장 중요해
형제들 중 죽음을 원하는 사람 누굴까
아버지를 죽이고 싶은 사람 누굴까


- 헛소리

 

 


 


모두가 자신에게 까라마조프 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사는 동안 처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에 대응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 모두가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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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는 표도르의 아들 중에서는 가장 표면적으로 까라마조프인 것이 드러난다. 그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끼면서 자신이 저지른 짓들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자신이 악당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감옥에서도 여자를 그리워하는 까라마조프적인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책을 보면 그 자신도 자신이 까라마조프적임에 대해 받아들이고 끝까지 그런 모습으로 살다가 언젠가는 벌을 받을 것을 알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이었다. 자신이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누구보다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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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은 이반의 <대심문관>이라는 논문, 대서사시의 이야기에서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신을 부정하고 신이 인간에게 왜 자유를 주었는가 질문한다. 공연 내내 그는 그 안에 존재하는 악마와 항상 싸운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악마에게 놀림당하고 그에게 동요되고 있는 자유를 가진 한 나약한 인간을 볼 수 있다.


책 2부 제 5편 VI. 반역 에서의 한 일화가 공연에서도 언급된다. 한 장군의 가장 아끼는 사냥개의 다리에 한 소년이 돌을 실수로 던져 상처를 입힌다. 그 장군은 소년을 잡아 옷을 벗기고 사냥개들에게 그 소년을 향해 달리라고 명령한다.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소년을 쫓게 했고 개들이 아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 놈을 어떻게 해야 해야 하냐는 질문을 알료샤에게 던진다. 그는 만약 악마가 존재하지 않아서 인간이 악마를 만들어냈다면, 그는 그것을 자신의 모습과 형상대로 만들어냈을 것이고 우리는 역사적으로 본능적으로 더없이 친숙한 모진 매질의 쾌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고문당하는 희생자를 보며 정욕이 끓어오르는 야수의 모습이 누구한테나 존재한다고 말이다. 사람들은 인간에게 이런 모습이 없다면 선과 악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반은 어린아이들의 많은 희생의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선악을 구분할 가치는 없다고 반박한다. 주님이 원하는 이상적인 조화(악인과 피해자와 얼싸안고 그분의 자비를 외치는 모습)는 아이 단 한 명의 눈물만 한 가치도 없다. 그의 길고 긴 주장을 읽고서 충격을 받았다. 공연에서는 짧게 소년의 일화만 소개되고 그에게 맞는 합당한 벌은 무엇일까 알료샤에게 물으며 계속 그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미 고통받은 희생자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계속해서 태어나고 끊임없이 재생산되는데 반인륜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바라며 그에게 회개하고 죽는 순간에도 주님 곁으로 간다며 구원의 행복을 느끼는 모습을 그려낸 작가는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악마의 모습을 극적으로, 어쩌면 더 사실적으로 신, 종교라는 사회의 모순, 부조리를 표현했다. 알료샤가 ‘그는 사형이야’라고 답할 정도로 말이다.


 

이 지상엔 헛소리가 너무나도 필요해. 세상은 헛소리들을 발판 삼아 서 있고 그것들이 없다면 아마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 이반

 


이 지상에는 헛소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반을 보며 그가 한 이야기, 서사시, 논문들이 다 헛소리라고 했어도 세상은 그런 헛소리로 존재하는 것이고 나 또한 그의 ‘헛소리’에 너무나 큰 영향을 받았다. 처음에는 고통, 정욕, 방탕을 일삼으며 인생 끝까지 이러한 우중충한 분위기를 풍기다 죽는 까라마조프적인 모습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일반적인 사람들, 자신의 그러한 본능을 충족시켰지만 신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그 위선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더욱 무섭다. 신을 믿고 그를 위해 살다 보면 자신의 죄도 잊혀지고 회개 받고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 역겨워지기도 했다. 공연을 보면서 내가 가진 생각들에 반문을 하게 되고 내 안에 숨어있던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을 꺼내 보게 되었다. 이반의 저 문장이 처음으로 이해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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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샤는 수도원에서 지냈지만 아버지가 죽기 전 근래, 드미트리와 아버지의 갈등을 조정하고 아들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운데서 지켜보며 그들에겐 없는 ‘천사’의 역할을 한다. 표도르, 드미트리, 이반도 그의 정신만큼은 악마한테 잡아먹히지 않았다고 말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살인 사건 이후로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모든 면에서 흔들린다. 진실을 파헤치기까지의 결심과 배다른 형제들과의 심리 싸움과 무엇을 믿어야 할지 혼란과, 진실로 다가가면 갈수록 느껴지는 공포와 내 안의 까라마조프의 피까지. 무서움으로 터질 듯한 그의 모습이 겉으로 굉장히 잘 드러난다. 등장인물 중 가장 나약해 보이고 힘들고 많이 울지만, 결국엔 제일 강한 인물이 된다.

 

넘버 <장롱 안에서>에서는 이반이 어릴 때 알료샤와 함께 겪었던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아픈 기억이 나온다. 그 때 느꼈던 두려움과 슬픔에 대한 태도가 달랐고 이에 따라 지금의 이반과 알료샤가 되었다. 동생의 눈을 가려주었던 형은 악마와 싸우는 우리 마음속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지만 결국 사실 이미 악마에게 잠식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형의 손으로 현실에 눈감고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가렸던 알료샤는 계속해서 가린 채 저 멀리 우리를 구원해주실 거라 믿는 그 믿음에 의존해 종교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지만 결국 그도 아버지의 사건으로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맞닥뜨려야 하는 순간에 접어들어 또 다시 두려움에 떤다. 이반은 인간의 성질 중 가장 강렬한 감정이 이율배반이라고 말했다고 스메르쟈코프가 말한다. 즉, 보려 하지 않으면서도 보고싶어 하는 알료샤를 꼬집기도 한다. 그런 혼란 속에 빠지며 힘들어 하다가 결국 알료샤는 깨닫는다. 악마는 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싸우고 있었음을.


 

내가 나서 모두를 사랑할게요

눈 감으면 사랑이 보여 내 맘은

아직은 악마들이 보지 못할 테니까

 

- 아직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그리고 자신이 모두를 사랑하고 악마들이 내게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그의 대사로 극은 마무리가 된다. 실제 책에서는 굉장히 알료샤의 분량이 많다. 작가는 알료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이 책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집필한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혔다. 공연을 볼 때나, 책을 읽을 때나 작가가 알료샤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고 죽은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고 이 이후의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한 마음이 내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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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문의 이상하게 스며든 수증기, 스메르쟈코프는 아버지를 죽였다. 형제들도 그가 이 가문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간질을 일으키는 하인 새끼라고 말하며 하찮다는 듯 그를 무시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그가 조정하고 형제들을 유인하고 조롱한다. 겉으로는 가장 보잘것없고 흐리멍텅해 보이지만, 가장 흔들리지 않는다. 이 사건의 전말을 다 꿰차고, 형제들을 보며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도 동시에 들었다. 아버지가 죽기 전날 밤, 내일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찾아올 것을 알고 있지만 이반과 알료샤는 집을 떠났다며 왜 알면서도 이를 무시했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아버지를 가장 죽이고 싶어 했던 건 누구였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며 그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그들을 교묘하게 괴롭힌다. 이 극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그가 가지고 있는 속내가 점점 드러나면서 관객들은 그에게 집중하게 된다. <발작>, <헛소리> 넘버 등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하는, 조용하게 기괴하고 무서운 그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


서로를 향해 퍼붓는 비난과 혼돈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가 파고드는 외침과 침묵으로 그들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그 결과가 파열이었어도 무대 위 마지막까지 무릎을 꿇지 않았던 알료샤는 부디 우리 안에 숨 쉬는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살지 않았을까?


이 작품을 만나기 전, “까라마조프쉬나” 즉 까라마조프적인 특성을 일컫는 이 단어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람이 살면서 죄를 짓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누구나 방탕하게, 욕정을 쫓으며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까라마조프 가의 본능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이상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는 그 집안만의 특성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모두 까라마조프쉬나를 가지고 있다.

 

책에서 등장하는 라키친 같은 다른 인물들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그들 자신이 까라마조프쉬나임을 모른다. 선과 악을 복합적으로 지닌 인간이 마음속에 존재하는 아름다움과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지켜낼 수만 있다면, 모두가 조화롭게 살아가는, 알료샤가 이야기하는 그런 삶이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세상이기 때문에 이 책과 이 공연이 더 씁쓸하고도 무섭게 다가왔다.

 

무대 위 천장에 설치된 거울로 이반은 자신 속에 존재하는 악마와 마주한다. 우리는 까라마조프 가의 이야기를 보며 그 거울로 별반 다르지 않은 우리의 세상을 마주한다. 그래서 마지막 알료샤의 독백이, 그 진심 어린 눈빛이 잊히지 않고 더 오래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좀 더 책을 자세히 읽고 다시 보고 싶은, 또 보고 싶은 가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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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더스 까라마조프
- The Brothers Karamazov -

 


일자 : 2020.02.07 ~ 2020.05.03


시간
평일 오후 8시

토 오후 3시, 7시

일 2시, 6시

월 쉼


장소 : 대학로 자유극장


티켓가격
전석 60,000원

 
주최/기획
과수원뮤지컬컴퍼니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


공연시간
100분

 


[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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