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벨문학상 작품 읽기, '거지소녀' [도서]

글 입력 2020.02.19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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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단편 소설의 거장'으로 알려진 앨리스 먼로의 연작 소설집이다. 열 편의 단편을 통해 로즈라는 주인공의 인생을 보여준다. 로즈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운 좋게 부유한 집안 자제와 결혼한다. 얼핏 신데렐라 스토리처럼 보이는 이야기는 불륜과 이혼, 다시 가난한 예술 노동자의 생활로 이어진다. 열 편의 단편은 각각 인생의 한 시점을 그린다. 첫 번째 단편에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건방지다고 얻어맞는다. 로즈는 학교에 가고, 기차를 타고, 사랑을 하고, 무대에 섰다가, 느지막히 술집에 간다. 마지막 단편에서 그녀는 술집에서 만난 동창과 오래된 추억을 나눈다. 이 단편들은 로즈 인생에 있던 굵직한 사건을 위주로 나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인생의 슬쩍 흐름을 바꾸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 앞날에 무지한 상태에서 저지르는 선택에 대해 서술한다. 어떤 선택은 사소하지만 흔적을 남기고, 어떤 선택은 인생을 뒤바꾸어 놓는다.

 

회한에 찬 주인공의 냉정한 묘사가 가슴에 콕콕 박혀 중간중간 책을 덮고 싶었다. 먼로의 글은 ㅈ 종종 가혹하다. 제임스 미치너는 소설이 추구해야 할 건 '우리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이라고 했는데, 먼로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그녀는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타고 남은 잿더미를 관찰하는 중이다. 왜 그랬을까.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내가 무슨 일을 한 걸까?

 

선택은 결과를 불러온다. 새엄마 플로의 앞에서 건방지기로 한 선택은 매질을 불러오고, 결혼은 이혼을, 반복되는 불륜은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만을 남겼다. 이미 모든 일이 다 지나고 난 뒤 하는 회상에서 꿈과 환상은 빛을 잃는다.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건 철없음이고 꿈은 허영심의 발로다.

 

시점을 조금 달리 해보면 로즈는 용감한 여성이다. 시대의 강요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이 삶을 자기힘으로 이뤄냈다. 그녀는 부유층의 화려한 생활도 해보았고, 예술가라는 명예로운 일에 종사한다. 실패만큼 성공도 적지 않은 인생 내력이지만 로즈의 시선은 용서가 없다. 그녀는 자기 삶이 자랑할 만한 게 못 된다는 걸 안다.

 


"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은그녀가 수치스럽게 여길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것은 덜렁거리는 맨가슴이 아니라, 자신이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실패였다." p364.


 

자유를 택할 때,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일까? 여성이 잃는 건 화목한 가정과 고정적인 수입, 안락함같은 것만이 아니다. 그녀는 어떤 떳떳함, 자부심을 잃어버린다. 대신 '의무'를지키지 않았다는 수치심을 얻는다.

 

로즈처럼 누구의 지지도 없이 원하는 걸 추구하며 살기로 결정할 경우, 가난한 마을에서 자란 여자아이는 고향과, 그 곳에 배운 걸 잊어야 한다. 고향에 애정을 느낄수록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곳이 로즈에게 가르친 건 겸손하게 자기 주제를 잊지 말라는 교훈이다.

 


"네가 시를 잘 외울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해선 안 돼.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 p352.


 

로즈 가슴에 박힌 옹이같은 이 말은 그녀가 계속 자기 자신을 되묻게 만든다. 고향 사람들의 눈에 자신은 얼마나 분수를 모르는, 한심스러운 여자인가. 하지만 로즈는 이 질문에 뭐라 답할 지 모르면서도, 꿋꿋하게 환상을 좇는 일을 반복한다. 물론 가진 것 없는 여자에게 세상은 차갑고 야비하다.


내 인생을 살겠다고 문을 나서는 순간에는 눈부신 빛, 굳은 결의가 있을 지 몰라도, 빛은 언젠가 꺼지기 마련이다. 밤이 되면 어리석음과 나약함이 찾아오지만 불평할 자격이 없단 생각이 든다. 자기가 선택했으면 그 대가도 혼자 치르는 게 당연하지 않나.

 

<거지소녀>가 이 씁쓸함에 주목해서 다행이다. 로즈는 자신이 꿈꾼 것들이 허영, 거짓, 기만이었다고 고백한다. 부끄럽지만 미안해하지 않는 그녀의 고백에는, 겨울밤 유리창에 뺨을 갖다대는 것 같은 위로가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오백 년은 살아버린 사람처럼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여기엔 품위와 우아함이 있다.

 


"로즈의 이야기를 실패와 실망으로 점철된 우울한 넋두리로 읽는 독자들도 많은 듯하지만, 표면적으로 어떻게 보이든 아픈 경험을 통해 주류에서 벗어날 용기를 낸 로즈는 궁극적으로는 만족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탈출의 꿈만 꾸지 않고 직접 가봤으므로, 부딪치고 살아봤으므로, 궁금한 것은 끝까지 들여다봤으므로, 그 모든 수치와 비아냥을 견뎌냈으므로, 외롭고 보잘 것 없더라도 자기가 선택한 삶이므로." p382.


 

옮긴이의 말은 로즈의 우울을 그래도 좋은 의도로 포장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접속사로 그녀가 겪어야 했던 절망을 문지르는 게 옳은 일일까? 로즈의 이야기가 실패와 실망으로 점철된 건, 권력 구조와 사회 규범 속에서 로즈는 절대 권력을 가질 수 없는 약자였기 때문이다. 사회는 절대 그녀가 떳떳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놔두지 않는다. 학위가 없기 때문에 보수는 적고, 중산층 예술가들은 플로의 편지를 조롱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행동은 대가 없이 끝난다.


로즈가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이 된 데에는 계급과 성차별, 엘리트주의 등 그녀에게 가해졌던 폭력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로즈가 자신의 인생을 '직접 선택'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만족'할 것이라는 해석은 사실 그녀에겐 선택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무마한다. 작중에도 나오듯 "선택권을 가진 이들은 중산층 사람들뿐"이다. 내게 로즈의 이야기는 빈곤한 계층의 여자아이가 예술가로 성장하는 자아 성장의 스토리라기보다, 자신을 끊임없이 적대하는 환경 속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 승낙과 거절(탈출)을 반복하는 서사로 읽혔다. 인생을 자신이 누굴 만나고, 무얼 이뤘는지로 구성하는 성별과, 인생을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지고 무엇으로부터 탈출했는지로 설명하는 성별이 따로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후자가 손에 쥔 건 '자신의 삶'이다. 누군가에게 내 존재/삶은 당연히 주어진 것인데 누군가는 경계와 주의를 통해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이 부당성. 로즈의 패배감을 이해한다.

 

나는 이 이야기가 실패와 우울로 점철된 넋두리라 좋다. 애초에 넋두리는 이 정도의 품위를 갖추지 않는다. 인생은 본래 (소설이 좋아하는) 사랑과 광기와 모험이 아니라, 실수와 실망과 후회의 연속체다. 소설의 낭만에 빠져 있다보면 이 매정한 현실을 잊기 쉬운데, 먼로의 <거지소녀>가 우아하게 그 진실을 꼬집어주니 나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겸허해진다. 삶이란 얼마나 실망스러운가. 애인을 기다리며 터미널에 앉아 있어도 그는 오지 않는 것처럼, 감히 기대해서는 안 되는 법.

 

하지만 덕분에 나는 전혀 다른 환상이 생겼다. 한 이십 년쯤 뒤 풍파에 지쳐 들어선 술집에서 생각지도 못한 동창을 만나는 것. 내게도 학창시절 랠프 길레스피같은 녀석이 있었다. 세상의 법칙이 내게 호의를 베푼다면, 우리는 우연히 만나 술을 마시며 시시콜콜한 추억을 주고 받을 것이다. 술 한 잔으로 나누는 위안! 이런 몽상에 빠져, 갑자기 로즈가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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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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