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영화]

글 입력 2020.02.14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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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권위자가 일반인으로 떨어지기까지의 과정은 어떨까. 가장 달콤한 것을 맛본 자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은 흥미롭다.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수십 년 동안 감옥에 썩었다가 출소한 도련님과 애초에 거지였던 사람의 결과는 같지만 과정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 황제>는 그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시작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푸이는 다른 전범들과 함께 체포되어 수용소로 간다. 그리고 수용소에서는 몇 사람들이 푸이를 보고 황제폐하라 부르며 절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전범들과 푸이의 표정은 무던하기만 하다. 푸이는 수용소 화장실에 들어가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한다. 그 절망적인 결과를 보면서 우리는 그 과정을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다.

 


 

푸이의 삶


 

1908년, 푸이는 서태후의 지명으로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금성으로 들어간다. 서태후의 명으로 황제가 되면서도 고작 3살이었던 푸이는 자신이 무슨 상황에 있는지 모른다. 그저 “집에 왜 안 가. 아빠?” 라고 묻는다. 작은 손으로 옥새를 누르면서도, 푸이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자각이 없이 뛰어다닌다.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어린 푸이가 걸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절을 한다. 모두가 엄숙한 가운데 천진하게 귀뚜라미를 찾고, 목욕하기를 싫어하는 푸이의 모습은 완벽한 어린아이다. 영화에서는 푸이의 천진함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그 완전한 천진함 때문에 이상함을 느낀다. 다시 “폐하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신하들의 말을 들으며 “난 폐하니까.” 유모에게 집에 가고 싶다고 벌거벗은 그대로 소리치는 푸이와, 고개를 조아리는 신하들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하다. 그 다음으로 바로 나타나는 자살 시도 후 푸이의 외양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통치했던 사람이었음을 전혀 알지 못할 만큼 초라하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푸이는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는다. 영국인 가정교사 존스턴이 자금성으로 들어온다. 여기서, 푸이만큼 주목할 인물이 바로 존스턴이다. 존스턴과 푸이의 대화는 단순한 가정교사와 황제의 관계가 아니라 영화 전반의 푸이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말을 제대로 못하면 제대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죠.”

 

“나는 신사가 아니오.(I'm not a gentle man.)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 내가 할 말을 대신 말해줍니다.”

 

존스턴은 말을 제대로 해야 의사를 전달할 수 있다며, 그것이 젠틀맨의 조건이라 하지만 푸이는 자신이 젠틀맨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황제임에도 푸이는 스스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가 했던 말처럼, 그는 어머니가 죽었음에도 궁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궁궐 문을 열기를 명령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 완벽히 궁궐 안에서만 황제 취급을 받는 허수아비의 역할인 것이다. 모든 권위를 빼앗겼지만 황제의 지위는 여전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발전해나가는 밖과 달리 푸이와 그의 신하들은 그대로이다. 자전거를 회초리질 하는 신하의 모습은 바깥과의 단절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궁 안의 인물들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다. 푸이의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써야한다는 진단을 받지만, 황제에게 안경을 쓰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고작 안경으로 무슨 난리인가 싶지만 그들은 황제의 안경을 무척이나 중대한 사안으로 여겼다. 존스턴은 그것을 보면서 차라리 황제가 장님이 되는 게 낫다고 말한다. 성인이 되었는데도 집 밖을 못나가는 사람은 전 세계 통틀어 푸이 황제뿐이니 말이다.

 

푸이는 베필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건 굴욕이라고 말한다. 그는 오랜 관습에 반발하면서도 푸이는 17세의 완용공주를 황후로, 12세의 문연공주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푸이는 자신의 권위를 빼앗겼음에도 다시 황제가 통치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1924년에 일어난 군사혁명으로 추방과 함께 반역죄로 감시받는 신세가 된다. 푸이는 두 아내와 함께 톈진으로 도피하고 존스턴은 영국으로 돌아간다. 푸이는 마침내 일본군에 넘어가 신생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그러나 그는 만주국에서도 청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허수아비 황제였다. 황후는 아편에 의지하고, 운전수와의 아이를 가진다. 황후가 궁을 떠나고 푸이는 떠나는 차를 붙잡으러 달려가지만 실패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만나기 실패했던 것처럼,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음에도 그는 궁의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1945년 만주국이 멸망하고 푸이는 전범 수용소로 송치되었다가 식물원 정원사가 된다.

 


 

<마지막 황제>의 역사적 배경


 

①신해혁명

 

청나라 말기 유럽 강국의 압박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지배체제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서양식 무기의 도입과 근대산업과 신식교육을 추진하였다. 아편전쟁, 애로호 사건 등 외세의 침입에 무기력한 청나라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양무운동을 전개하여 신식무기의 도입을 추진했다. 이후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나 봉건적 제도를 개혁하는 정책이 추진되었지만 위안스카이의 배신과 서태후 등 수구파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후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조의 무기력함이 더욱 심화되자 청나라의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주장에 더욱 힘을 실었다. 광서제와 서태후가 사망하고 3살의 푸이가 황제로 등극하자 정치는 더욱 혼란을 거듭했고 국민의 생활은 고통이 가중되어 중국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국적인 봉기가 일어나자 사회적 모순은 격화되고, 신정반대·세금거부 등의 대중투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 움직임에 따라서 지방의 유력자, 즉 향신과 상공업계를 기반으로 입헌파가 형성되어 입헌군주제를 지향하여 국회 속개 운동을 일으켰다. 청나라의 타도와 입헌군주제를 추진하려는 개혁세력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서 여러 정치단체와 비밀결사대가 조직되었다. 1900년 의화단사건 이후 청나라의 무능함과 유럽 열강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혁명을 위한 양상은 가속화되었다. 1905년 국내외 정치조직을 통합하는 중국 최초 정당인 중국 혁명동맹회를 결성되어 쑨원이 지도적인 인물로 추대되었다. 쑨원은 해외 혁명파를 중국으로 입국시켜 반청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911년 5월 청나라는 민영으로 운영되었던 철도의 국유령을 발표하여, 그것을 담보로 거액의 자금을 빌려 재정난을 타개하려 했다. 이에 대하여 광범위한 반대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중 쓰촨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1911년 10월 쓰촨폭동을 토벌하기 위하여 후베이신군을 동원하자, 우한 지구에서 문학사와 공진회 등을 조직하여 신군 공작을 전개해온 혁명파는, 10월 10일 우창에서 봉기하여 중화민국 군정부를 설립함으로써 신해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창에서 일어난 혁명은 순식간에 전국에 파급되어 1개월 이내에 거의 모든 성에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1912년 1월 1일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고 난징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의 삼민주의를 그 지도이념으로 한 중화민국이 시작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양 군벌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위안스카이를 다시 기용하여 혁명군의 토벌을 명령하였다. 위안스카이는 혁명군을 진압하였으나 이들과 전투를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않고 영국의 중재로 화평을 추진하였다. 위안스카이는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쑨원으로부터 대총통의 지위를 받았고, 3월에 정식으로 대총통에 취임하여 베이징정부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혁명은 급속하게 반혁명으로 전화되었다. 정당이 난립하는 중에 혁명파는 혁명동맹회를 개조하고 소당파를 합쳐서 국민당을 창립, 의회정치의 실현을 희구하였으나, 열강과 입헌파의 지지를 받은 위안스카이는 혁명파에게 무력탄압을 가하여 제2혁명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혁명파는 위안스카이 정권과 대결하였으나, 반봉건의 과제는 해결되지 않고 5·4운동 이후의 혁명으로 미루어졌다.

 

신해혁명을 평가하는 데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로는 신해혁명은 청나라 말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단순한 정권 교체적 정변으로 규정한 견해이다. 신해혁명은 반식민, 반봉건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세력들이 사회의 기본 틀을 변경함이 없이 부르주아적 요소를 위로부터 포섭함으로써 봉건적 지배의 재편을 꾀하는 단순한 정치적 변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신해혁명을 강하게 긍정하는 주장에 의하면 신해혁명 운동은 우선 농민을 주력군으로 한 인민과 반동집단(제국주의, 봉건주의)과의 투쟁이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수립이란 의미를 강조하는 학자들도 구질서가 그대로 존속하고 또 봉건체제는 군벌의 영수인 위안스카이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최초의 공화국정권은 청나라보다 더 심한 봉건세력이었다. 따라서 신해혁명은 그 자체보다는 이후의 역사적 지향성을 중시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봐야한다.


 

② 5·4운동

 

신해혁명은 기본적으로 안팎의 패망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광범위한 국민적 각성 위에서 성취된 까닭에 이후에 전개된 모든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신해혁명은 당시의 변혁보다 이후의 역사 전개에 주목해 평가할 필요가 있다. 1919년의 5.4 운동은 신해혁명의 후속 혁명 성격을 띠고 있다.


중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이자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지만,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 ·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사건으로 평가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전승국인 일본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격분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천안문 광장으로 모여들어 반대집회를 벌였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반대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혁명 이후의 신문화운동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이 5 ·4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 지식인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조선의 3 ·1운동에 고무되었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보았다.


 

③ 만주사변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장악하려는 관동 주둔 일본군의 음모는 아주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일본군은 만주지역을 '만주친일괴뢰정권 수립→만주국 독립→일본의 영구 소유화' 과정을 거쳐 일본영토로 편입하려고 계획했다. 친일 괴뢰정부의 황제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삼았다. 그는 만주족이었고, 한족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만주족의 독립에는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고 판단되었다. 만주와 몽골을 일본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지만 국제사회의 이목을 고려하여 차선책으로 만주와 몽골을 중국의 영토로부터 분리하여 독립국을 세운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독립국은 명목상일 뿐이고 일본의 조종과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 정부가 될 것이었다.


괴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일본의 계획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우선 만주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공격해 들어갔으며, 톈진에 있던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탈출시켜 만주로 데리고 갔다. 푸이는 1912년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면서 황제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푸이는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일정한 생활비를 받고 자금성에서 생활하고 있던 중 1924년 군사정변에 의해 쫓겨나 톈진에 머물고 있었다. 만주의 괴뢰정부 수립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다. 만주지역의 옛 군벌과 지방의 유력자들을 모아 1932년 2월 18일 만주의 독립을 선언하게 했다. 신국가의 이름은 만주국으로 정하고 3월 1일 건국하기로 했으며 국가의 형태는 공화국으로 결정했다. 그러자 황제의 지위를 바라고 있던 푸이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관동군에서는 공화국 원수의 직을 주겠다고 하여 반발을 무마하여 1932년 3월 1일 괴뢰 국가 만주국을 성립시켰다.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중국정부는 일본에 대한 대항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고 푸이를 천황으로 하는 만주제국으로 바꿨다. 만주는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정부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태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푸이의 캐릭터성


 

<마지막 황제>에서는 푸이의 일대기에 대해 나타내다보니, 푸이의 천진난만함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그가 청나라의 황제였을 때는 어렸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이지만, 푸이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보이는 행위는 여전히 어리숙하다. 일본군이 자신을 만주국의 황제로 두는 것을 자신을 이용하는 거라 생각하기보다 다시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집중한다. 꼭두각시 황제임을 ‘주제파악’하지 못한 채 일본에게 만주국과 일본을 동등한 관계라고 주장하며 그에 맞는 대접을 받기를 바랐다. 전범 수용소에 송치되었어도 푸이는 혼자 신발 끈을 묶을 줄 모르고, 칫솔에 치약을 짜는 것까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자신의 주변 환경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황제는 무능하기만 하다. 이상을 추구하지만 그 이상에 다다르기 위한 능력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마지막 황제>는 푸이의 ‘온실 속 화초’적인 모습을 계속 비춰 보는 이에게 동정심까지 들게 한다. 푸이는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자금성에 입장권을 구매해서 봐야하는 신세가 된다. 푸이는 자신이 앉았던 왕좌에 올라가니, 경비원의 아들이 올라갈 수 없다며 막는다. 그를 보며 푸이는 “나는 이 나라의 황제였단다.”고 말하고는, 그가 숨겨두었던 귀뚜라미를 아이에게 준다. 푸이의 유년 시절 신하에게 받은 귀뚜라미로 추정된다. 귀뚜라미를 보고 웃던 어린 시절의 표정과, 정원사가 된 푸이의 웃는 표정은 동일하다. 그의 웃음은 여전히 아이 같은 면모가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이 살았던 자금성을 돈을 내고 보러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은 분명 비참하다. 물론 외부의 변화에 차단되었고 마음대로 바깥을 나갈 수 없었던 황제의 삶은 불우하다. 그러나 푸이는 만주국 괴뢰 정부 수립에 일조한 전범이기도 하다. 전범 수용소로 송치될 만큼의 죄인이라는 뜻인데, <마지막 황제>의 푸이는 유아적인 면모를 지닌 것을 필요 이상으로 비춰 푸이를 실제 인물보다 과하게 동정심을 들게 연출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그의 허수아비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황후의 만주로 가면 일본에 이용된다는 식의 발화를 통해서 우리는 추측할 뿐이다. 만주는 귀중한 땅이라고 했던 푸이의 말과는 달리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의자 하나만 놓고 즉위식을 이어가는 장면을 통해 푸이가 허수아비임을 안다. 수용소에서의 푸이의 자백은, 그가 계속해서 일본에게 납치당했다는 주장을 하면서 푸이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황제로 즉위했다고 착각할 수 있다. 만주사변에서 일본을 만주국 국가의 형태를 공화국으로 결정했다. 그러자 황제의 지위를 바라고 있던 푸이는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푸이의 무능하면서도 무늬만 황제인 삶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탓에 우리는 푸이가 전범이며, 그가 일본과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만주국의 황제가 된 사실을 잊게 된다.

 


 

논란거리


 

<마지막 황제>는 이탈리아 감독이 중국을 배경으로 영어로 만든 영화이다. 가정교사 존스턴과 푸이의 대화, 푸이가 계속해서 서양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에서 <마지막 황제>는 ‘오리엔탈리즘’ 적인 시각에서 만든 영화가 아니냐는 논란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과할 정도로 오리엔탈리즘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스턴이 황제가 있음으로 예산에 필요 이상의 과할 정도로 낭비되고 있다고 하는 말, 자유롭지 못한 군주, 서양의 문물이 활발하게 들어오는 시점에서 푸이가 ‘서양’으로 가겠다고 꿈꾸는 것은 개인의 희망이다. 푸이가 서양으로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진정 서양에 가면 선진 문물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생각한 것도 있겠지만 푸이가 꼭 ‘서양’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만이 아닌 성 밖을 나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마지막 황제>는 다른 영화에 비해 오리엔탈리즘 적인 요소가 적은 영화로 봐야 한다. 그 예로 <라스트 사무라이>를 들 수 있겠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의 이 영화는 놀랍게도 일본을 배경으로 했지만 실제 영화 촬영지는 뉴질랜드였다. 사무라이가 텐노(天皇) 에게 충성하고 메이지 정부가 텐노를 가지고 논다는 식의 설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란을 느끼게 했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에 주로 나오는 동양인의 설정 -검은 머리에 보라색 브릿지 머리, 쌍꺼풀이 없는 얼굴, 동안 설정-정도가 되어야 서양의 시각에서 동양을 정형화하고, 뒤떨어진 문명으로만 비춘다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 <마지막 황제>는 푸이의 자서전을 토대로 만든, 꽤 고증을 잘한 영화로 보아야 한다. 영화 OST만 해도 동양 영화라는 이유로 시끄럽거나 기괴하기까지 한 전통의 탈을 쓴 음악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중국 전통 음악, 클래식, 현악 연주(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 등 다양하게 쓰였기도 하다. 우리는 작품을 감상할 때 무조건적으로 어떤 요소가 보이면 그것을 무조건 비판하기 보다는 다른 영화와 비교하여 상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필요하다.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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