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안개 같은 소설이 말하는 경계 [도서]

한강의 <흰>
글 입력 2020.02.12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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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도시는 새벽안개에 잠겨 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졌다. 내가 바라보는 창으로부터 사오 미터 거리에 서 있는 높다란 미루나무 두 그루가 먹색 윤곽을 어렴풋이 드러내고 있을 뿐, 그 밖의 모든 것이 희다. 아니, 저것을 희다고 할 수 있을까? 검게 젖은 어둠을 차가운 입자마다 머금고, 이승과 저승 사이를 소리 없이 일렁이는 저 거대한 물의 움직임을?


- <흰>, p.27


 

안개는 하늘과 땅, 이분법적인 두 개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평소에는 매우 뚜렷하게 나누어져 있던 것들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 안개이다. 한강의 <흰>은 마치 이런 안개 같은 작품이다. 손가락 하나 정도 되는 굉장히 얇은 두께의 책이지만 이 안에 아슬아슬한 경계, 그 경계의 사이 또는 틈을 다루고 있다. 바로, 삶과 죽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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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


 

‘흰색’ 하면 떠오르는 단어에는 쌀, 수의, 눈송이들, 각설탕, 구름, 백발, 백야 등이 있다. 흰색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가진 것들이다. 그러나 한강의 <흰>에는 문, 주먹, 작별, 넋, 경계 등 왜 흰 것의 목록에 들어갔는지 이해가 즉각 되지 않는 단어들도 있다. 그러나 ‘나’와 ‘그녀’, ‘모든 흰’까지 세 장으로 나눠진 이 책을 읽다 보면 이것들이 꼭 필요한 소재들이란 것을 알게 된다.

 

이런 흰 소재들을 등장인물 ‘나’는 자신의 눈과 어머니가 스물세 살에 낳았다 태어난 지 두 시간 만에 죽었다는 언니, ‘그녀’의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지구의 반대편, 오래된 도시로 옮겨온 뒤에도 언니의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녀가 자신 대신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통해 흰 것들을 다시 바라본다.

 

‘나’와 그녀의 관계는 굉장히 미묘하다. 둘은 공존할 수 없는 관계이며 여기엔 그들의 의사가 들어가지 않는다. 운명이 결정할 뿐이다. 만약 달떡 같은 그 아이(언니)가 호흡을 계속 이어나갔더라면, 양수가 터진 어머니 옆에 한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나’는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상상할 수조차 없는, 얇은 종이 뒷면의 세계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그리고 그 세계에 떨어져 버린 그녀 대신 자리를 차지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안함 또는 부채감.

 

이런 감정들로 ‘나’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인 언니에게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것은 ‘나’가 그녀를 애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보지 못하는 검은 눈으로 잠깐 머물다간 이를 위해 자신의 일부를 빌려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애도를 보며 두껍다고 생각한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느낀다. 더불어 ‘나’와 같은 이유 혹은 유사한 이유로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 <흰>, p.98


 

죽음이 우리들 바로 뒤에 어른거리고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독자의 깨달음을 등장인물의 구체성이 다른 소설에 비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더 깊게 해준다.

 

<흰>에서는 ‘나’와 ‘그녀’의 이름, 생김새, 성격 등 개인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러한 빈 부분은 독자들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는데, 여기서 ‘나’라는 일인칭 시점까지 더해져 자신을 ‘나’에 대입하고 몰입을 하기 쉬워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나’와 독자들은 모두 살아남은 자, 죽음과 삶의 얇은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나’와 함께 또는 ‘나’가 되어 어둠과 빛 사이, 파르스름한 틈 사이로 너머의 세계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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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경계


 

<흰>은 굉장히 시각적인 책이면서도 삶, 죽음, 경계, 추모 등 비가시적인 것들을 다루고 있다. 이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 ‘경계의 무너짐’이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소설과 시의 경계가 무력화되는 것을 보며 독자는 혼란을 느낌과 동시에 그 틈에서 새로움을 느낀다. 이러한 경계의 무너짐은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어져,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실 그 둘은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떼어놓을 수 없는 것, 하나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작가가 경계를 흐리게 하면서 독자들에게 던지고자 한 일종의 경고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 얼굴 뒤에는 항상 죽음이 어른거린다는 이 경고는 “환부에 바를 흰 연고, 거기 덮을 흰 거즈”가 되어 독자에게 말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생명을 이어받았으며, 살아있기에 죽음이 어른거리는 것이라고. 그 생명으로 하얀 입김을 내뱉으며 살아있음을 증명한다고.

 

그렇게 <흰>은 우리에게 죽지 말고 살아가라 한다. 23살의 어머니가 달떡 같은 아기를 하얀 강보 사이에 두고 했던 말처럼.

 

 

[안루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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