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무신론자의 순교 - 연극 "마터"

글 입력 2020.02.07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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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14:12

 

 


'더 큰 우리'가 만드는 혐오


 

나는 예수의 존재를 믿는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인격신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가진 본태적인 이기심을 극복하고 타인의 죄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껴안을 수 있는 존재를 믿는다. 존재의 실존과 존엄을 깨달은 존재에게 '나'와 '너'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의 십자가가 종교를 가지지 않은 내게도 감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영웅을 찾게 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서사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서사는 본질적으로 인간 안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모든 악당과 영웅이 우리 안에 존재하듯, 예수도 우리 안에 존재한다. 내가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인용한 요한복음의 메시지는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가능성이며, 그 가능성을 믿는다면 우리는 능히 그보다 더 큰 것도 할 수 있게 한다.

 

예수가 인간으로 죽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긴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기독교 교리는 현대사상의 기반을 만들었다. 신약에서 이방인들을 끌어안으려 했던 예수가 인간이 되어 다시 부활한다면, 그는 기꺼이 새로운 사회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삶을 사랑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에게 모든 존재의 고통과 기쁨은 공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예수가 바랬던 사랑의 이상이 지금까지 잘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탄압하고, 종교계 일부에서는 신의 이름을 빌려 사람의 실존과 존엄성을 훼손한다. 신의 얼굴은 관용과 사랑이 아닌 보복과 선별로 일그러졌다. 독재자가 된 신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부숴야 하는 존재다.

 

큰 존재에 기대에 폭력을 재생산하는 것은 종교뿐만은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뻔뻔한 얼굴로 사랑을 변태 성욕으로, 염색체의 특성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미래, 소망까지 점지한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의 뜻"이거나, "정상적이고 평균적이며",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겁 없이 휘두르는 주장의 근거는 그 전제가 가치지향적이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차별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일그러진 선구자


 

연극 <마터>에는 영웅이 등장한다. 벤야민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그가 믿고 있는 것을 한치의 의심 없이 수행한다. 그 안에 정념이 휘몰아쳐도 그는 끝내 자신의 신념을 관철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극 중 내내 모습은 현대사회가 꿈꾸는 이상에 가깝다. 그의 모습은 성경에 나오는 선구자의 모습을 닮았다.

 

그는 그 스스로를 하나님의 순결한 종으로 칭하며 성경의 말씀에 반하는 현대사회의 교육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비판한다. 그는 수영 수업을 듣는 여학생들의 수영복이 외설적이라 비판하며 밤중의 수영장으로 뛰어들고, 진화론을 가르치는 교육에 원숭이 가면을 쓰고 조롱한다. 벤야민은 신의 이름을 빌려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 주장하지만, 그가 신념이라는 이름 아래에 벌이는 일은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파쇼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공포와 보복의 얼굴을 한 아버지'인 신은 독재자 일 뿐이기에, 그의 추종자인 벤야민이 파쇼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의 기상천외한 행동에도 벤야민을 대하는 주변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주저 없는 그의 말과 열정은 단순한 광기로 치부되지 않고 이상한 힘을 갖는다. 그는 고독한 순례자를 표방하지만 결코 소수의 편에 서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신으로 표상되는 폭력적인 강자의 위치에 서서 폭력을 권력처럼 휘두를 뿐이다. 벤야민의 모순은 당장 그가 근거로 하고 있는 성경에서부터 드러난다. 예수는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을 약속했으나, 벤야민은 유대인을 혐오하고 이혼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어머니에게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는다.

 

하지만 선생 로트만은 여전히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교육자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벤야민의 세계로 표상되는 성경을 읽어 그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열정적인 모습을 주변 사람은 그것을 광기로 여긴다. 로트는 점점 더 소외되는 자신의 처지에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지만, 역시 교육자라는 사명감으로 벤야민을 설득하려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못 박기


 

로트는 작중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사실 그녀도 벤야민을 한 개인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하나의 경계해야 하는 신념의 괴물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한 선생으로서 벤야민을 한 학생이 아닌 왜곡된 신념의 괴물로 생각하고 대립하는 것은 다소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로트의 행동을 강렬한 방식으로 로트를 예수의 위치에 놓는다.

 

본 연극의 이름인 <순교자>에 가까운 인물이 둘 등장한다. 순교자를 표방하지만 모순을 지닌 벤야민, 순교자를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교육자로서 예수처럼 발에 못을 박은 로트가 이에 해당된다. 연극은 로트가 학교에서 쫓겨나라는 강요를 받은 후, 벤야민이 들고 온 못과 망치를 이용해 책상에 자신의 발을 못 박으면서 끝난다.

 

실로 아이러니하고 강렬한 결말이다. 로트는 못을 박기 전, 앞으로 모든 학생이 왜곡된 신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크는 상상을 한다. 그녀는 자신이 아닌 미래의 학생들을 위해 학교에 남을 것임을 선언한다. 마치 예수가 수많은 모욕과 고통 속에서도 인간을 위해 대신 죽기를 결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가 죽음으로써 신과 인간에게 새로운 약속이 맺어졌던 것처럼, 누군가의 희망과 희생을 통해 세상은 크게 변화한다. 타인을 위한 희생, 로트는 순교자라고 할 수 있다.

 

로트가 순교자를 선택한 행동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나는 그래도 이 엔딩을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 역시 신념의 굴레에 빠졌을진 몰라도, 그녀와 같은 순교자가 있기에 세상이 좀 더 복잡해지고 아름다워 지지 않는가. 그것이 인간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는 신념이나 행동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자였던 로트의 희생은 가장 종교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연극에서 독일 작가의 향취를 많이 느낄 수 있었다. 로트가 그토록 괴로워하고, 스스로 발등에 못을 박을 수 있었던 것은 독일에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예상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지만, 불에 타는듯한 로트의 선언이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연극이었다. 다른 내용은 잊어도, 로트가 자신의 발등에 못을 박는 소리만큼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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