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혐오의 일상적인 극화 - 연극 '마터(MARTYR)'

표면적 비혐오를 논하기 위해
글 입력 2020.01.20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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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

 

혐오라는 단어를 듣고 가장 떠오르는 상념은 생각보다 우리의 가까이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혐오는 타인을 향한, 어떤 현상을 향한, 대상을 향한 증오감과 기피감이 샘솟는 감정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이라고 치부한다. 살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지만, 많은 경우에 아직까지 저런 말을 일상적으로 내뱉을 정도로 세상이 피폐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말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혐오의 감정은 지양해야할 것으로 규정된다. 비슷한 공익광고도 있지 않나. 악플과 혐오표현을 중단하자는 선플운동본부의 공익성 광고나,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 및 차별 금지 관련 공익 광고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주로 TV나 지하철역에서 저런 광고들을 봤다. 심리검사를 온전히 신뢰하지는 않지만, 전 세계에서 사회성 없고 본인의 자아에만 관심이 많기로 악명이 굉장히 높은 INTP형 인간인 나조차도 저런 광고를 포함해 혐오를 중단해야 한다는 도덕적인 주장을 마주칠 때면 별 다른 생각 없이 딱히 틀리진 않았다고, 도의적인 차원에서 개연적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지 않은 한 내가 타인에게서 나에 대한 혐오 표현을 들으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고 심할 경우 인격적인 손상까지 입을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그런 행위를 바라지 않는 것이고 나 역시도 타인에게 그런 발언을 내뱉지 않고자 노력하는 거다.

 

사람을 인격적으로 비하하지 말아야 한다는 격언은 아직 기원전일 시기부터 우리들 사이에 지켜야 마땅할 것으로 인식되어 왔고, 우리는 여전히 통념상으로나 성문법상으로나 그것을 일상 곳곳에서 실천하고 있다. 정확히는 표면적으로 실천해오고 있다. 당연히 내가 말을 건네고 있는 상대방이나 나와 가까운 사람을 향한 혐오 발언은 공개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함부로 내뱉지 않는다. 예의에 어긋난다는 말이 존재하는 것을 증거로 들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교육을 받아서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가끔씩 혐오에 가까운 말들을 무심코 내뱉을 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화들짝 놀라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아차’라는 감정이 드는 것도 예의를 저버렸구나. 도의적으로 옳지 않은 행동을 했구나와 같은 생각이 자동 반사적으로 마음속에 떠오르니 말이다. 이런 면에서 교육은 무섭다. 사람을 사회 구성원에 부합하도록 착실하게 제조해내는 한편, 그 과정이 전범위로 이루어지는 나머지 제조 도중에 포착되는 단편성에는 눈길을 돌리지 못하기에 그렇다.

 

혐오는 비단 타인, 현상, 대상을 향한 직접적인 인격적 모독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말을 들은 상대방이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냐”라든지, “그런 말은 조심해야 하지 않겠냐”라든지, “그러지 말라”고 대답할 때. 이것도 상대방의 입장에선 충분히 혐오, 혹은 그에 준하는 발언으로 들렸기에 이렇게 반응한 것이다. 암암리에 증오감이나 경멸, 기피감 등이 섞여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말들은 굉장히 많다. 문제는 낱말을 분출한 당사자는 그게 무슨 혐오 발언이냐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요즘은 예전보다 희석된 것 같긴 하나,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을 예시로 들어 보자. 저 말은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시절 우리들 사이에 만연한 이야기 중 하나였다. 어떤 선생님들은 직접 아이들의 면전에 대고 비슷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곤 하셨다. 교과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친구를 보며 그렇게 대책 없이 살면 큰일이 난다고, 걱정하는 투로 말씀하시곤 했다. 저 말을 들은 친구들 중 일부는 대놓고 분노하거나, 화난 기색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았던 대다수는 선생님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저런 발언을 했으리라고 짐작하는 와중에,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불쾌한 발언이었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했고 많은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흘려보내듯 이런 생각을 내비추었던 적이 있다. 선생님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상냥했지만 잔인했다.

 


“그러니까 다들 너처럼 독하게 공부하면 선생님이 걱정이 없지. 애들이 걱정되니까 그래. 조금만 참고 노력하면 졸업하고 나서 훨씬 수월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그걸 모르니까 저렇게 황금 같은 시기를 헛되이 보내고... 안타깝잖니.”


 

그때 혐오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굉장히 일상적인 형태로 내재함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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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를 위한 것이다”: 일상적인 극화로서의 혐오


 

극화(하다), 영어로 dramatize라 부르는 이 행위는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사건이나 소설 따위를 극의 형식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과 혐오를 연결 지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통상적으로는 일상에서 쉽게 일어나지 않는 비인격적인 수준의 혐오 발언을 극 형식을 통해 비일상적으로 보여주는 연극이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연극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작품의 메시지가 직관적이다. 이해하기 쉽고, 수긍하기도 쉬워서 “혐오적인 발언을 우리는 지양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문구가 주제의식으로 던져지더라도 싫은 기색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뻔한 이야기구나, 전형적인 교훈성 작품이구나, 내가 평소에 동의하고 있던 것들을 연극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기회구나. 라는 마음가짐으로 연극을 편하게 관람한다.

 

그러나 이렇게 평온한 상황을 무너뜨리는 연극이 등장했다. 연극 ‘마터(MARTYR)'가 그것이다. 수영수업에 참여하지 않고자 저항하는 벤야민은 자신의 독실한 신념을 이유로 들며 어른들의 훈계와 조언을 뿌리치려고 한다. 옷을 발가벗고 물에 들어가는 것은 성경이 자신에게 권하는 신성함에 반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당연히 부모님과 선생님은 그런 벤야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벤야민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반항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긴다. 벤야민의 과학 선생님인 로트는 성경을 벤야민을 굴복시키기 위해 성경을 집어 든다. 저번 공연을 토대로 공연 내용을 조금 살펴보자면, 벤야민과 로트는 성경의 내용을 필두로 설전을 벌이는 것 같다. 신념이 먼저이냐 혹은 신념을 내세우기에 앞서 이성이 전제된 개연적인 규범을 따르는 것이 먼저이냐를 두고.

 

벤야민의 대범함은 선생과 이런 설전을 벌일 수준의 깡(?)을 보유한 데에 그치지 않는다. 당근과 콘돔을 통해 간접적인 차원에서 성교육을 하려고 하는 로트 선생을 향해 교육을 할 거면 전라의 상태에서 제대로 하라며 모든 옷을 벗어버리기도 한다.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또한 실제로 이런 장면이 이번 재공연에서 나올지는 연극을 직접 보아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이것도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기 위한 행위이지 않을지 추측해본다. 예컨대 피임법을 교육하는 것은 성관계를 종족 보존이라는 신성성을 수호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단지 쾌락의 행위로 전락시키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 아닐런지.

 

시놉시스와 전반적인 줄거리만 한 번 읽어보아도 벤야민의 신념이 얼마나 범상치 않은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는 벤야민에게 냉혹하다. 타인의 눈에 그는 사춘기 시절을 맞이한 말썽쟁이에 불과하다. 잠시 비정상의 영역으로 건너 간 존재인 것이다. 등장인물의 대다수가 그를 향해 이런 시선을 던진다는 점에서 벤야민은 무심한 혐오를 일상적으로 당하고 있다. “이게 무슨 혐오 발언이니, 다 너를 위한 거지.” 라는 포장된 말을 통해 무분별한 혐오에 노출되어 있다. 벤야민은 자신을 세상 물정 제대로 모르는 사춘기 소년이라 규정하는 표면적 비혐오에 저항할 것이다.

 

그의 투쟁은 일상의 굴레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상성 안에서 그를 향하는 타인의 표면적 비혐오가 극심하게 발휘되었으면 한다. 그럼으로써 비간접적인 혐오의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면 한다. 연초의 말미를 장식하기 위한 연극으로는 조금 우울할 수도 있겠으나 부푼 마음을 안고 한없이 절망적인 연극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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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
- MARTYR -


일자 : 2020.01.29 ~ 2020.02.16

시간
평일 8시
주말 4시
월 쉼

장소 : 대학로 선돌극장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기획
극단 백수광부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100분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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