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가족은 가족일 뿐 - 연극 '듀랑고'

글 입력 2020.01.19 19:3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듀랑고 티저 2.jpg

 

 

 

가족여행에 담긴 의미


 

한 가족이 여행을 떠난다. 가족여행은 어엿한 가족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하는 행사의 성격을 띤다. 하지만 현실에서건 이야기 속에서건, 가족여행이 행복하고 순조롭게만 진행되는 건 좀처럼 보지 못했다. 여행을 떠나면 직장이나 학교처럼 각자의 생활반경에서 개인으로 존재하던 이들이 하루종일 가족구성원 중 하나로서 반 강제로 붙어 있어야 한다는 소리기 때문이다. 어느덧 자식들은 머리가 커 버렸고 부모는 생각이 굳어 고집이 세졌다. 집에서 지켜지던 경계는 여행지까지의 이동 수단과 숙소 안에서 쉽게 허물어진다. 그 속에서 서로의 차이는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웬만큼 화목한 가족이 아니고서야 가족여행은 늘 위태위태하다.


연극 <듀랑고>에서 부승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떠나게 된 가족여행 역시 처음부터 삐걱거린다. 가족 관계 내에서 오랫동안 도사리던 묵은 감정은 시시각각 이들을 덮친다. 타고나기를 사교성이 좋고 성실해 아버지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지미에게 형인 아이삭은 묘한 열등감을 느낀다. 지미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마지막 말 때문에 아버지와 형을 사이를 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부승은 1세대 이민자라서 영어가 서툰 자신과 달리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아들들 앞에서 움츠러들곤 한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계 가족, 형보다 잘난 동생,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등 이 가족의 몇몇 특수한 상황들은 세 사람 사이를 계속 삐그덕거리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족은 모두 비밀을 가지고 있다. 부승은 정년을 앞두고 실직했고 아이삭은 아버지가 어렵사리 마련해 준 의대 입학 면접 자리에 출석하지 않았다. 각광 받는 수영선수인 지미는 사실 자신의 성지향성을 선배에게 들킨 이후로 수영을 그만두고 싶어한다.


 

 

그들은 왜 듀랑고로 가는가


 

1575719500568-4.jpg

 


가족여행은 순조롭지 않지만,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다시 말해 크게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사실 부승네 가족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비밀은 예상 가능하다. 아버지의 실직은 처음부터 관객에게 알려지는 사실이다. 아이삭이 면접이 어땠냐고 묻는 지미에게 대답을 얼버무리며 하와이의 풍경 얘기를 할 때부터 그가 의대 진학과 관련하여 아버지 말을 따르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겉으로는 그가 만든 창조물 '레드엔젤'처럼 완벽해 보이는 지미가 무언가를 숨길 때, 그게 남들과는 다른 성지향성이라는 건 이미 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던 레퍼토리이기에 놀랄 일이 아니다. 이런 점들이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 극의 창작년도가 2006년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그 모든 비밀 중에서도 가장 큰 비밀은 이들이 왜 하필 듀랑고로 향하는가와 연관되어 있다. 극의 제목이면서 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게끔 한 장소, 듀랑고는 가장 큰 비밀을 간직하고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듀랑고 여행을 제안한 부승의 태도는 단순히 실직 때문이라고만 보기에는 지나치게 어둡고 절망적이다. 듀랑고에 얽힌 부승의 비밀은 막바지에 가서야 드러난다. 사실 그는 남자를 사랑했고, 지난 날 듀랑고에서 만나려 했던 연인이 있었다는, 아들들의 입장에서는 엄창난 비밀이다. 어쩌면 부승이 실직 후 갑자기 듀랑고로 가족여행을 제안했던 이유는 아들들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자 했던 건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 충성을 다한 공동체로부터 버림 받는 경험을 하고, 더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모든 것은 그들이 듀랑고에 갈 수가 없어졌기 때문에 무산된다. 결국 세 사람은 밝혀지지 않은 비밀을 안은 채 집으로 돌아온다.

 

그가 아들들에게 자신의 비밀을 끝내 말하지 못했던 이유가 듀랑고로 가는 기차표가 매진되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아이삭이 면접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아들의 의대 입학이 좌절될까봐 걱정하고, 지미의 수영 문제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곧바로 아이삭의 다음 면접을 준비하는 부승은 필사적이다. 그에게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이 우선시된다. 그의 개인적인 욕망과 그 욕망에 얽힌 비밀은 또다시 가족 앞에서 좌절된다. 하지만, 그가 가족을 우선시하는 이유가 정말 순수하게 그들의 안녕을 바라서인지, 우리는 질문해 볼 수 있다.


 

 

'가족신화' 너머를 상상하기



1575719500568-0.jpg

 


이민 1세대인 부승에게 가족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을 것이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언어로 생활하는 그에게 가족공동체는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이자 불안정한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고히 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그가 부정을 저지르면서까지 큰아들 아이삭이 의대에 진학하길 바라고, '열혈 학부모' 노릇을 하며 작은아들 지미가 수영선수가 되어 명문대에 진학하길 바랐던 데는 물론 아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일군 이 작은 공동체가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낯선 공동체 속에서 당당한 주류로 자리잡길 바라는 마음도 컸을 거라고 짐작해 본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만큼 그 가족이 자신의 든든한 무기가 되어 주길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랫동안 즐겁지 않은 직장 생활을 한 끝에 돌아온 건 실직이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기대와 투자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와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기보다는 아이작의 일을 수습하기에 여념이 없는 그는 여전히 깨진 지 오래인 '가족신화'를 홀로 믿고 있다.

 

<듀랑고>는 그렇다고 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무의미하니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다만 부모와 자식 간의 서로 다른 가족에 대한 가치관과, 그에 따라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오늘날 가족은 더 이상 개인의 정체성을 상징하지 않는다. 자식은 부모의 트로피가 될 수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개인의 주체성을 통제하는 것은 더이상 보편적이지 않다. 동시에 가족이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수용하는 존재가 되기도 어렵다.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가족의 환상과 신화를 걷어내고 나면 그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뿐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남는다.


 

허진 부분 포스터1.jpg

 


가족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엄청나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이름이 붙은개인과 개인의 또다른 관계일 뿐이라면, 우리는 가족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이에 대해 아이삭이 탄생시킨 인물 '레드엔젤'은 새로운 길을 보여준다.

 

레드엔젤은 이삭이 혼자 있을 때마다 나타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극의 마지막에 이르러, 불타는 집으로 날아가 부모님을 구했지만 그 때문에 마을 공동체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날개가 찣긴 레드엔젤은 그 마을을 떠난다. 굳이 그들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고, 그걸로 고뇌하지도 않는다. 자신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알 수 없는 어둠으로 한 발 내딛을 뿐이다.


지미는 부승과는 다른 세대고,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같은 고민을 안고 있지만 지미는 부승의 뒤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가족신화' 속에서 헤매는 부승과 달리 지미는 레드엔젤을 통해 다른 꿈을 꾼다. 그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비밀을 끝내 털어놓지 못하더라도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가족 안에서 살아갈 수는 있겠지만 가족에게 인정받기 위해, 가족만을 위한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가족은 가족일 뿐이므로.

 

 

 

김소원.jpg

 




[김소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50143
 
 
 
 

등록번호 : 경기, 아52475   |   E-Mail : artinsight@naver.com
발행인/기사배열책임자 : 박형주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형주
Copyright ⓒ 2013-2020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