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도형 같은 다채로움, 이머시브 공연 "위대한 개츠비"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우리는 그렇게 나아가겠죠.
글 입력 2020.01.1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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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우리의 두 팔을 더 멀리 뻗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우리는 그렇게 나아가겠죠. 마치 쉼 없이 과거에 떠밀리면서도 물살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닉이 공연의 처음과 끝에 똑같이 말하는 대사다. 이 문장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이상해진다. 뭉클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반대로 격양되기도 한다. 과거에 떠밀려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는 문장이 주는 이미지가 있다. 모든 사람이 가지는 헐떡임과 비슷하다. 과거의 추억, 그리움, 사랑과 행복은 어느새 사라지고 모든 게 예전과 달라진 현재만 남아있다. 현재에 선 사람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미래에서 과거를 찾거나, 과거를 받침판 삼아 발돋움하거나. 개츠비는 과거의 사랑을 못 잊은 전자의 사람이었고, 데이지나 톰은 현재에 집중하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위대한 개츠비의 불행은 그렇게 시작한다.

 

닉은 데이지와 톰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탐욕스러워서 그게 물건이든 사람이든 무조건 가져간 뒤에, 망가지면 뒤처리는 남에게 맡기는 사람들이라고. 미래로 향하려면 어쩔 수 없는지도 모른다. 망가진 무언가는 과거고, 미래에는 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개츠비는 그것이 망가진 것인지도 모르고 끊임없이 사랑하고 아낀다. 닉은 톰과 데이지 같은 사람을 경멸하지만, 실제로 그들과 정반대에 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또, 무슨 이유에서든 개츠비를 완전히 옹호할 수 있을까. 개츠비는 이미 지난 과거를 살아 현실을 보지 못했으며 데이지에게 지나친 강요를 했다. 결국 위대한 개츠비는 선악의 구별이 불분명해지는 채, 지극히 개인적인 호감과 비호감의 감정으로만 남는다.

 

 

[위대한 개츠비] 공연사진_전체(제공.마스트엔터테인먼트).jpg

 

 

모든 캐릭터가 그렇다. 조지에게서 화내기나 할 줄 알지 실제로 벌어둔 돈도 없는 허풍쟁이 이상주의자의 면모를 볼 때면 한없이 나쁜 인간처럼 느껴지다가, 작은 방에서 어떻게 하면 머틀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고 사랑해줄지, 내가 너무 심했던 건 아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면 진심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다정한 면이 보인다. 머틀 역시 톰과 연애하면서 돈과 명예를 원하는 모습을 볼 때면 한없이 속물이라 생각되다가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며 소리치며 내 미래는 내가 이끌어나갈 거라고 할 땐 그저 지극히 현실적인 개척자다. 소소한 대화를 나눌 때면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소위 밈처럼 쓰이는 대한민국 장녀 중에 머틀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조던 베이커는 늘 유쾌하고 당당하며 자신감에 차 있다. 사교성이 좋으며 체력도 뛰어난 베이커를 첫눈에 미워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끝난 후, 이 일은 영원히 비밀이 되어야 한다며, 혹시 누군가 밖에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닐 경우 끝까지 찾아가 고통받게 하겠다는 협박을 들으면 그에게도 다른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들의 이런 다양한 면면은 꼭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 인물을 지켜보는 기분이다. 모든 상황에서 다양한 선택을 하고, 다양한 성격을 보여주는 사람들. 까칠하고 냉정해 보이더라도 알고 보면 공사가 뚜렷할 뿐 정이 많은 주변의 상사나 선생님처럼 말이다. 어제는 짜장면을 좋아했어도 내일은 짬뽕을 사랑할 수 있고, 어제는 차가워도 오늘은 따뜻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결코 한 단면으로는 설명되지 못한다. 극 중 캐릭터에서 이렇듯 실제 인물처럼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는 건 이머시브 공연의 특성을 제대로 활용했기 때문일 테다.

 

 

[위대한 개츠비] 공연사진_머틀 윌슨 역_정해은(제공.마스트엔터테인먼트).jpg

 

 

이머시브 공연이란 관객 참여형 공연이라는 뜻으로, 관객이 직접 무대 위에 올라가거나 반대로 배우가 내려와 관객과 호흡을 하는 모든 공연을 총칭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공연장을 개츠비 멘션으로 꾸며 파티장 내에서 벌어지는 일과 몇 개의 방안에서 캐릭터 각자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동시 진행한다.

 

소설이 다각형이라면 이런 기분일지도. 본래의 공연은 하나의 공연 내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이야기가 진행될 수 없다. 대화가 겹치기 때문에 보고 있는 관객이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극 “헬멧”에서 큰 방과 작은 방으로 나누어 관객을 각자 받은 뒤 두 방에서 벌어지는 다른 이야기를 동시 진행하면서 서로의 사건에 영향을 받도록 꾸민 적이 있긴 하다. 굉장히 독창적이었고 매력적이었으나, 앞선 찬사가 설명하는 만큼 흔한 방식이라 말하긴 어렵다.

 

보통의 연극에선 하나의 사건을 두고 두 가지 시각을 보여주려면 하나의 시각을 먼저 보여준 뒤에, 다시 과거로 돌아갔다 가정하고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방법밖에 없다. 관객은 모두 동일한 정보를 받는다. 캐릭터에 대해 주어지는 정보도 똑같으니 해석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여지는 면면도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존의 공연이 면이라면 이머시브 공연, 특히 <위대한 개츠비>는 도형에 가깝다. 관객이 한 번에 하나의 이야기를 보는 것은 똑같지만, 같은 시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다양하기 때문에, 관객이 어디서 무엇을 보았느냐에 따라 공연 내용의 이해도, 캐릭터의 성격에 대한 평가도 갈라진다.

 

정육면체의 주사위와 비슷하다. 주사위처럼 하나의 공연이지만 면면에 따라 접한 사건은 다르다. 주사위를 굴려 1을 본 관객은 1에 대해 말하지만, 6을 본 관객은 6에 대해 생각한다. 1부터 6까지 모든 면을 본 관객은 캐릭터나 사건에 대한 수많은 시각을 가지고, 그만큼 공연에 대한 감상평도 풍부해진다.

 

 

[위대한 개츠비] 공연사진_이기현, 이종석, 홍륜희(제공.마스트엔터테인먼트).jpg

 

 

<위대한 개츠비>는 실상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고전으로써의 명성도 있고, 영화도 대흥행해 모르는 사람이 적은 편이다. 그러나 내용을 다 안다고 해서 이머시브 공연 <위대한 개츠비>가 지루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용을 모르고 가는 것보다 상황을 쉽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다.

 

사실, <위대한 개츠비>는 이번이 두 번째 관람이었다. 첫 관람에서 제법 다양한 방에 들어갔던 것과 달리, 두 번째 관람에서는 메인 스테이지에 있었다. 분명 내용은 똑같고, 공연을 보러 가기 전부터 알고 있던 이야기임에도 감상이 매우 달라졌다. 앞서 말한 것처럼 캐릭터의 다른 면모를 보게 되고, 작은 방에 있을 때 들렸던 온갖 환호와 박수 소리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같은 공연을 두 번 보았으나 사실상 두 편을 본 기분이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과거 보았던 것과 다른 상황을 구경하는 것처럼 이질적이었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바에서 쉬고 있으면 조던과 머틀, 조지, 루실이 다가와 말을 건다. 자신의 이름과 직업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이름을 묻거나 옷차림을 칭찬하기도 한다. 개츠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면서 아직은 어색하고 불편한 관객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속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렇게 대화를 하거나 대화하는 사람을 지켜보고 있으면 로즈가 나와 개츠비 멘션으로 데려간다. 공연장 내외부의 혼란을 막기 위한 출입인 듯한데, 어두운 계단으로 들어가는 입장 방식이 어쩐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괜히 더 두근거린다.

 

공연이 진행되는 개츠비 멘션에 들어가고 나서도 캐릭터와의 대화는 이어진다. 공연 중간에도 틈만 나면 이런저런 말을 붙이고, 때론 작은 방에 데려간다. 인터미션이 끝나갈 즈음에도 나와선 질문을 하고 어울린다. 이러니 정말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다소 과격하게 들린다면 조금 더 풀어보자. 다른 극의 캐릭터보다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캐릭터 한 명 한 명이 이제 막 인사한 지인으로 둔갑하면서 공연 내용에 현실감이 부여되고 때로는 객관성을 잃는다. 남의 일에는 태연하다가도 내 일에는 전전긍긍하는 것처럼, 머틀이 안타깝고 데이지를 이해하며 개츠비의 선택이 불안해진다.

 

 

[위대한 개츠비] 공연사진_제이 개츠비 역_강상준(제공.마스트엔터테인먼트).jpg

 

 

작은 방에서는 밖에서 중심이 되지 못한 여러 인물의 자잘한 사건을 보여준다. 고민이나 많은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는 비밀 등. 또, 여러 미니 게임도 진행된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것처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즐겁다. 간간이 미션을 받기도 한다. 작은 방에 들어가 캐릭터 각각의 사소한 이야기를 즐길 생각이 없거나, 많은 인파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메인 스테이지에서 벌어지는 공연 역시 무척 재미있다.

 

큰 사건 대부분이 개츠비 멘션의 중앙에서 벌어진다. 작은 방에서 상황이 야기되는 동안은 찰스턴 댄스를 가르쳐주거나 다 같이 노래를 하거나 원을 그리며 빙빙 돌며 파티 분위기를 돋운다. 그 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 잘은 모르지만, 파티하면 막연하게 떠오르던 몇 상황을 충실히 맛볼 수 있다. 어찌 보면 수련회 소 활동 같기도 하다.

 

그렇게 춤과 노래에 집중하면 어색한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새 공연 관람보다 지금 이 상황에 더 집중하는 나를 발견한다. 앞에서 조던과 데이지가 무슨 말을 하건 내가 춤춘 스텝이 맞는지 확인하고, 조지와 머틀이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건 친구와 귓속말을 나눈다. 물론 공연이라는 예술 특성상 다른 관객과 열연하는 배우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또한 <위대한 개츠비>라는 공연 특성상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구석이라면 조금 더 자유롭게 대화하고 즐길 수 있다. 이렇게 말하니 본래 그러면 안 되는데 예의 없이 굴었던 건 아닐지 다소 걱정이 된다. 그러나 적어도 자유로운 분위기가 거짓은 아니었을 테다. 모두가 마음껏 환호하고 손뼉 치며 반응한다. 공연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테이블이나 계단에 앉아 쉬던 사람들, 정해진 공연 내용보다 술 마시는 게 더 중요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른 무대에서 볼 수 있을까.

 

 

[위대한 개츠비] 공연사진_강상준, 김사라(제공.마스트엔터테인먼트).jpg

 

 

관객의 드레스코드를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1920년대에서 2020년으로 온 것처럼 깔끔하게 맞춰 입은 사람부터 정장, 개량 한복, 서양풍 드레스, 하객 룩 등 다양하다. 모피를 걸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숄을 두른 사람도 있다. 반면 후드와 청바지를 입고 편하게 온 사람도 있으니 혹 입을 옷이 없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든 파티가 그렇듯 즐기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반대로 입고 싶은 옷이 너무 화려하다고 걱정할 필요도 없다. 당신보다 화려한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눈치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자유로워진 기분이 들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 놓고 평상시에 입기 어려웠던 화려한 옷을 마음껏 입고 가보자.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우리의 두 팔을 더 멀리 뻗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 아침, 우리는 그렇게 나아가겠죠. 마치 쉼 없이 과거에 떠밀리면서도 물살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는 배처럼.

 

 

다시 닉의 대사로 돌아가 보자. 더 빨리, 더 멀리. 그렇게 모든 사람은 과거를 뒤로하고 나아간다. 시간이라는 게 미래로는 갈 수 있지만 과거로는 갈 수 없게 설정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거를 그리워해도 미래에서 찾는 과거는 더는 과거가 아니라, 새로운 무엇이다.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 공연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부터 고전 경극과 탈춤, 서사극과 부조리극까지 다양하게도 바뀌어왔다. 끊임없이 과거에 떠밀리면서 더 새로운 것, 더 다양한 것을 찾아 나아간다. 이머시브 공연은 어떻게 보면 가장 현대적인 극의 일종일 것이다. 이런 가장 새로운 것은 기존에 당연시하던 체계를 망가뜨리곤 한다. 이머시브 공연도 그렇다. 무대 위에는 배우가 있고 제4의 벽이 존재해야 한다는 당연한 조건을 모두 무너뜨린다.

 

빠르게 나아가는 물살에 뒤집히지 않고 항해하는 배에 올라타 보자. 그곳에서 과거를 사랑한 개츠비와 현재에 충실한 톰, 데이지, 조던, 조지와 미래를 추구하는 머틀과 모든 것을 지켜보는 닉을 만나자. 분명 이전에 개츠비를 보았을 때와 또 다른 기분을 만끽할 수 있을지 모른다.

 

 

[위대한 개츠비] 포스터 (제공.마스트엔터테인먼트).jpg

 

 

이머시브 공연
위대한 개츠비

공연장
개츠비맨션(그레뱅뮤지엄 2층)
 
공연기간
2019년 12월 21일(토) ~ 2020년 2월 28일(금)
 
공연시간
화, 목 20:00
수, 금, 토 15:00, 20:00
 일 16:00 (월 공연없음)
 
관람 금액
전석 77,000원
(프리 드링크 포함)
 
러닝타임
140분 (인터미션 20분 포함)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전문 김혜원.jpg

 


[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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