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유로운 사유, 사유하는 여유 [사람]

얼마만의 오피니언인가
글 입력 2020.01.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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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해야 하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1년 전 이맘때, 12월 마지막 주였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루가 있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를 관람하러 일찌감치 대학로에 갔던 날이었다. 공연 시작까지는 한 시간 반 넘게 남아있었고, 신년 다이어리를 구경하러 문구 전문점에 들렀다. 한창 6공 다이어리가 유행하던 시기라 오랜만에 다이어리나 사볼까, 하고 가게에 들렀는데 생각보다 예쁜 문구류가 넘쳐나서 조금 당황했다. 뭘 사야할지 몰라 한참 고민하다가 다이어리 커버와 속지, 스티커 몇 장과 키링을 샀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초코 케이크가 먹고 싶어져서 공연장으로 가던 길에 카페에 들러 초코 케이크 한 조각을 사 먹었다. 나는 초콜릿 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단 음식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 그날따라 초코 케이크가 너무 먹고 싶었다. 은은한 케이크가 아닌 진한 무스 케이크가 당겼다. 다행히도 내 상상 속 초코 케이크와 내가 산 초코 케이크의 맛이 동일해서 한 조각을 남김없이 먹고 잔뜩 행복해진 채 공연장으로 향했다.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총 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중 나는 ‘맥베스’ 에피소드를 가장 좋아했다. 그날 내가 관람한 에피소드도 ‘맥베스’였고, 캐스팅도 내가 참 좋아하는 배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연 역시 두말할 필요 없을 만큼 완벽했다. 가격도 비싸고 공연장까지 가는 길도 멀지만 그럼에도 내가 공연을 사랑하는 이유는 완벽한 공연을 보고 나왔을 때만이 느낄 수 있는 벅찬 감동 때문이다. 연출, 대본, 배우의 연기, 조명과 관객들의 숨소리 하나까지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순간은 공연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고, 이런 희귀한 기억들 때문에 아직까지도 공연을 사랑한다.

 

관극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조금 추웠다. 칼바람 틈을 헤치며 걸어야했지만 그날 느꼈던 행복은 글로 적을 수 없을 만큼 커서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별 것 아닌 하루였지만 행복을 확장시킨 이유는 단 하나였다. 하루를 구성하는 사건들을 모두 ‘혼자’ 했다는 것. 그래서 쉴 수 있었다는 것,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

 

 

 

마법의 문장 - "뭐라도 하자."



오늘 길을 걷다가 문득 작년 그 하루가 생각났다. 오늘 나는 도서관에 가서 할 일을 하고, 근처 책방에 가서 책을 구경하다가 지인의 생일선물을 골랐다. 그 후 일정이 있어 조금 바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연어덮밥으로 늦은 저녁을 챙겼다. 그리고는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좋아하는 책을 읽다가 집에 왔다. 굉장히 평범한 일정이지만 일상 틈새에 ‘혼자’라는 여유가 꽂혀 있어서 그런지, 작년 이맘때의 그날처럼 오늘도 1년 뒤에 생각날 하루가 되었다.



요새 빠져있는 노래, 스텔라장의 'it's raining'

 


2019년을 회고해봤다. 살아온 해가 길지는 않지만 이십 몇 년의 해 중에서 으뜸으로 바빴던 1년이었다. 남들 다 있다는 토익 점수가 없어서 부리나케 공부했던 1월과 2월, 이렇게 살 수는 없겠다 싶어 시작한 복수전공 때문에 머리가 터질 듯 정신이 없었던 3월에서 6월, 계절학기와 공모전, 대외활동, 프로젝트 등으로 사라져버린 여름, 그리고 1학기보다 더욱 바빴던 2학기가 지나자 1년이 끝났다. 나뭇잎이 불타 사라진 것만 같이 1년이 증발했다. 사실 아직도 신년이 시작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나는 아직 12월 28일쯤을 살고 있는 것만 같다. 한 해가 지났다는 것이 여전히 낯설 만큼 2019년은 금세 스쳐지나갔다.


2018년 하반기와 2019년을 버티게 했던 문장은 “뭐라도 해야 한다”였다. 토익 점수도, 공모전도, 대외활동도 모두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 같아서 시작했다. 작은 대외활동 지원서에도 빈칸이 넘쳐나는데 ‘해당 없음’에 체크해야 하는 순간을 극도로 싫어했다. 결국 ‘뭐라도 하자’, 이 무서운 문장 하나가 나를 이리 이끌고 저리 이끌었다.

 

 

 

여유



이 글은 바빴던 1년을 후회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다. 작년 덕분에 나는 서류 빈칸을 채울 항목들이 꽤 늘어났고, 글자 몇 개로 단정할 수 없는 귀한 경험들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작년 11월 말쯤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내가 2020년도 이렇게 보낼 수 있을 것인가. 2021년도 이렇게 보낼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돈을 벌 준비를 할 즈음에는 기력이 다 빠져 아무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회의감, 내가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는 자각.


빼곡하게 들어찬 스케줄과 할 일을 끝내버리기에도 바빴고 하루를 소모하다시피 했기에 생각할 여유는 전혀 가지지 못했다. 여유가 사라지자 생각도 사라졌고, 생각이 사라지니 글을 쓰기도 힘들어졌다. 힘들다기보다는 부담스러워졌다는 게 맞는 말 같다. 빈창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공백에 눌리는 기분이 들어 몇 번이고 창을 닫기를 반복했다. (사실 변명이다. 몇 달 째 밀리고 있는 칼럼에 대한 변명.)



[크기변환]빈창.JPG

참 무서운 '빈 문서1'

 

 

공연을 보고 느낀 점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좋아하던 나였는데 어느 순간 나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대신 사회적 이슈나 짤막한 뉴스 토막을 읽는 것조차 피곤해지고, 책을 읽기는 더더욱 버거워진 나를 발견했다. ‘뭐라도 해야지’라는 문장에 눌린 채 아무 것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유



사유는 여유에서 나온다. 나에 대해, 세상에 대해 생각하려면 머리를 굴릴 최소한의 체력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 내가 앞으로 할 것들이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건지, ‘하고 싶어서’ 하는 건지, ‘해야 해서’ 하는 건지 구분할 수 있어야 여유도 가질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를 위해서는 나를 알아야 하고, 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결국 사유로 되돌아간다. 사유할 체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이라 단정했던 빼곡한 스케줄을 나름대로 분류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크기변환]david-travis-5bYxXawHOQg-unsplash.jpg

 

 

물론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무조건 쓸모없는 일은 없고, 무조건 좋은 일도 없다. 무슨 일이든 한 꼬집 정도의 미련과 그럼에도 잘했다는 만족감은 기본으로 남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짧고 체력도 한정적이니 모든 일을 다 경험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유로운 사유를 위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 모든 것들도 나를 기준으로 한 생각이었으니 행여 이 글을 보고 자신을 성찰하거나 반성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기우겠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이런 글 한 토막에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 즉 나와 비슷한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니.


이번 겨울은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여유를 억지로라도 가져보고자 한다. 음악도 좀 듣고, 책도 좀 읽고, 글도 좀 쓰면서 내가 좋아하는 나를 찾아보고 싶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대신 “뭘 해야 좋을까”를 고민하는 한 해를 보내기 위해서, 그리고 사유하는 여유, 여유로운 사유를 위하여.

 

 

문득 생각난 노래.

 


기를 쓰고 사랑해야 하는 건 아냐

하루 정도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


여전히 무수한 빈칸들이 있지

끝없이 헤맬 듯해

풀리지 않는 얄미운 숙제들 사이로

마치 하루하루가 잘 짜여진 장난 같아

 

- 아이유, unlucky

 

 

 

전문필진.jpg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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