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입시 미술에 대한 회고 [사람]

'입시미술 안 배워 다행이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글 입력 2020.01.2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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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소위 <입시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이다. 등록 계기는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의 권유였다. 선을 긋는 방법을 맨 처음 배운 나는 정육면체나 구를 그리며 형태 잡는 방법을 배웠다. 일주일에 이틀이나 삼일 가는 미술 학원은 즐거웠다. 친구와 함께 오늘은 학원 가기 전에 저녁 뭐 먹지 등을 떠들곤 했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대학생 보조 선생님들이 그림을 봐주시며 티격태격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처음 반년은 ‘내 그림’이라고 할 게 없었다. 모작이 대부분이었다. 예시 작의 구도, 형태를 관찰하며 색을 어떻게 칠해야 하는지 그림자는 어디에 떨어져야 그럴싸해 보이는지 배웠다.

 

입시 미술 학원은 방학마다 특강을 한다. ‘남들도 다 이렇게 한다’ 라든지 ‘특강 안 들으면 내년에 친구들 그림 실력 못 쫓아간다’ 등의 위협으로 수강을 은근히 강요한다. 그런데 막상 개강하고 보면 가장 별게 없는 게 ‘방학 특강’이다. 아이들을 교실에 하루 종일 가둬둔 채 학기 중 기존의 수업과 다를 것 하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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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학년이 고학년에 비해 나은 환경이긴 하다. ‘환경’이라는 것은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을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겨우 씻고 바로 학원에 등원해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점심때까지 그림을 그린다. 짧은 점심시간 동안 쪽잠을 자거나, 급한 대로 편의점이나 분식 같은 것으로 끼니를 때운다. 특강비도 만만치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식대의 부담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점점 편의점 김밥 등으로 식사하는 친구들이 늘어난다. 오후 내내 또 그림을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밤 10시까지 그림을 그리거나, 평가를 받는다.

 

생각해보면 3학년을 제외한 1, 2학년 때의 특강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나는 2학년으로 올라가는 겨울방학 때 특강을 들었다가 그림에 다소 질려버렸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지적을 한 달 동안이나 받은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사과나 종 같은 물체를 묘사하는데 정형화된 방법이 있나? 꼭 A-Z의 방식으로 그려야만 진짜 사과인가? 대학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평가라는 것도, 그래서 주어진 시간 안에 스킬 같은 것들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지만 그때의 나는 고3이 되기까지 시간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었고, 때문에 앞으로도 이렇게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 싫었다. 자연스럽게 매 달, 등원 한 날이 손에 꼽힐 정도로 학원을 안 가는 날이 많아졌다.

 

3학년이 되고, 나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가장 큰 입시 미술 학원으로 옮겼다. 다행히 그림을 안 그리는 동안 공부라도 열심히 했던 나의 성적표를 본 원장 선생님은 미대하면 누구나 아는 대학들을 읊으며 나를 최상위권 대학을 준비하는 반에 배정해 주셨다. 하지만 안 그래도 할게 많은 고3에 오랫동안 등한시했던 붓을 다시 잡은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되고 말았다. 매달 보는 모의고사의 성적표로 소위 다른 반으로 ‘강등’될 지가 결정되었는데, 나는 4월 모의고사 날 학원에서 가채점을 하곤 바로 짐을 싸야만 했다.

 

컨디션을 조절해 준다고 둥기둥기 학생의 비위 맞춰주던 반에서도 몇 가지 지적을 굉장히 빙 둘러 듣곤 했다. 사실 빙 둘러서 들었다는 것도 반을 옮기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옮기고 처음 그린 그림의 평가에서 거의 인격 모독 수준의 평을 들었기 때문이다. 반을 옮긴 직후와 전의 내 그림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림을 완성하는 내 손이 다른 친구들 보다 느렸으며 색을 탁하게 쓰고, 물 조절을 못했을 뿐인데 저런 말을 들어야 하다니 나는 충격이었다. 수시로 대학에 붙는다고 해도 아직 얼마나 남은거지, 나는 코앞으로 느껴졌던 수능 날이 까마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더 이상 가기 싫다고 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그림 그리는게 좋았고 이제와 진로를 틀 용기도, 여태껏 성적에 반영되지 않는다고 일찌감치 놓아버린 수학을 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좀처럼 다른 친구들의 실력과 거리가 좁혀지지 않자, 나는 내가 좋아하던 그림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맞는 그림’, ‘교수 평가에서A 맞을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지금 내가 ‘잘’ 그리고 있는걸까?


수시 원서를 쓰고, 실기 전형으로 넣은 대학의 그림을 준비했다. 대학별로 실기 전형의 그림 유형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 7월에는 자존감이 바닥을 친 상황이었다. 나는 기계처럼 학원에서 준비해준 스타일을 외우고 그렸다. 사실 자신이 없었다. 1차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길 바랐는데 붙었다. 10:1의 경쟁률이 어쩌고 하는 학원 선생님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말 붙어버린 것이다. 2차 실기 시험을 보러 가는 날 나는 아침 일찍 화구 박스를 들고 지하철을 탔다. 그리고 숙대입구까지 가는 1시간 동안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실기까지 붙는다면 이건 정말 말이 안된다고. 이런 마음가짐으로 실기를 거하게 망쳤다. 처음 보는 주제와 물체였다. 어떻게든 학원에서 연습한 스타일에 끼워 넣으며 그림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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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결과는 예상한 대로 불합격이었고, 나는 그 해 지원한 6개의 수시에 모두 떨어졌다. 수능을 거하게 망쳐서 정시를 성적 전형으로 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 실기와 성적이 일정 비율로 들어가는 전형으로 대학을 지원해야 하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미대 입시생들에게 지옥이라고 불리는 그 ‘정시 특강’을?

 

나는 수능이 끝나고 며칠 동안 학원도 학교도 가지 않으며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재수를 결심했다. 그림을 다시 그려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재수를 하는 동안 붓을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모든 원서를 성적 전형으로만 지원했고, 나는 햇수로 따지자면 3년을 그림 그리다가 결국 비실기로 미대에 합격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 시간표를 짜다가 드로잉 수업이 전공 필수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순간 가슴이 철렁한 나 자신이 조금 어이없었다. 그림 그리는 걸 무서워하는 미대생이라니. 1학년 학부 생활을 마치고, 학과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드로잉 수업은 수강하지 않았다. 2학년 때 같이 산 룸메이트가 드로잉 수업을 들었는데, 나는 수업이 들을 만 한지 물어봤다. 그때 룸메이트는 ‘응, 과제가 많긴 한데 할만해. 재미있어’라고 나에게 대답했다.


슬쩍 본 친구의 과제는 내가 지난 몇 년간 봐온 그림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여태껏 그려온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상품’으로 느껴졌는데, 친구가 그린 그림은 ‘작품’으로 보였다. 저런 수업이라면 어쩌면 들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림에 대한 공포를 이대로 안고 살아야만 하는 걸까 하는 생각. 하지만 나는 다음 학기에 그 수업을 듣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나는 그 수업을 빼고 수강신청했다. 수강신청 직전까지 내 시간표에 담아져 있던 드로잉 수업 말이다. 나는 아직도 그림에 대한 그런 감정과 함께 살고 있다. 미련이나 공포, 혼란과 같은 감정들로.

 

디자인과 졸업을 앞두고 있는 지금, 입시를 치른 지 너무 오래된 지금, 내가 새삼스레 입시 미술에 대해 다시 떠올려 본 이유는 같은 미술 학원을 다닌 친구에게 얼마 전 받은 한 기사 때문이다.

 


디즈니 입사한 한국인 "입시 미술 안 배워 다행이다" 

 

먼저 졸업한 선배로서 칼아츠 입학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해준다면?

 

"저의 삶에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지점들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국에서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한국의 '입시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 거죠. 한국의 입시 미술은 너무 획일적이에요. 물론 기본기나 테크닉을 배우는 데는 한국만 한곳이 없어요. 그런데 칼아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테크닉이 아니라 자기만의 확실한 색깔, 개성이거든요. 어느 정도 기술은 보지만 창의성이 없으면 칼아츠는 못 가요. 오히려 기술이 좀 부족해도 개성이 있으면 합격할 가능성이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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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어떻게 미대 입시를 치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준비하던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분명히 스스로의 모서리가 깎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동그라미를 보며 왜 본인은 동그랗지 않은지 자책할 것이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차라리 완벽하게 깎인 동그라미가 되어 그들 사이에 들어간다면 차라리 더 좋은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애매하게 모서리만 라운딩 된 나 같은 네모들은 네모도, 동그라미도 아닌 위치에 있다. 더 이상 네모로 돌아갈 순 없지만 동그라미도 될 수 없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할 순 없지만 이와 같은 입시 방법만이 꼭 최선이냐고 묻고 싶다.

 

 

[김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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