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가씨 [영화]

글 입력 2020.01.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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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의 엄격한 보호 아래 살아가는 귀족 아가씨. 그녀에게 백작이 추천한 새로운 하녀가 찾아온다. 매일 이모부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외로운 아가씨는 순박해 보이는 하녀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하녀의 정체는 유명한 여도둑의 딸로, 장물아비 손에서 자란 소매치기 고아 소녀 숙희.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될 아가씨를 유혹하여 돈을 가로채겠다는 사기꾼 백작의 제안을 받고 아가씨가 백작을 사랑하게 만들기 위해 하녀가 된 것. 드디어 백작이 등장하고, 백작과 숙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가씨의 마음을 흔들기 시작하는데...



어떠한 영화가 보고 싶어지게 되는 계기에는 참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포스터를 보고 마음을 먹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가씨는 영화를 먼저 본 후에 포스터를 보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약간의 거부감이 들 정도로, 남성의 억압을 크게 보여주고 있었다.

 

숙희의 고개를 돌리며 히데코의 어깨를 붙잡은 백작, 히데코의 머리에 손을 얹은 코우즈키 그리고 손을 맞잡은 숙희와 히데코. 영화를 본 후에는 이 포스터가 영화의 그 자체였다고 생각할 만큼 직사각형 안에 인물들의 상반신과 손만으로 이들의 관계를 잘 표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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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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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는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일제 강점기 시대로 각색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배경은 일본과 한국인데, 이처럼 일본과 한국을 배경으로 한 또 다른 퀴어 영화인 '윤희에게'와는 사뭇 다른, 완전한 시대극은 아니지만, 시대극의 '무드'를 보여준다. 이러한 무드 안에서도 영화 곳곳에 의외로 유머러스한 부분이 많다.

 

지금까지 본 여성 퀴어 영화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수위를 보여주는, 아주 적나라한 관계 장면을 담은 영화이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상반된 반응을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영화를 보기 전 스스로 이러한 장면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어떤 마음이 들까 한편으로 겁이 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을 표현한 방식 중 하나였을 뿐, 이들의 초야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총 3부로 나누어진 영화는 각 파트가 이질감 없이 유연히 연결되면서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마치 책 한 권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원작 소설을 읽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기도 했고, 이 덕에 영화의 미장센이 미니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전반적인 색감은 차분하게 톤다운 되어 있으며 그 잔잔한 색감과 분위기, 인테리어, 복식 등에 눈을 뗄 수 없다. 또 감각적인 교차편집과 효과음, ost로 영화는 2시간 24분이라는 꽤 긴 러닝 타임 내내 지루할 틈이 없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영화 '아가씨'는 한 번만 볼 수 없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볼 때보다 보고 난 후 더 많은 것들이 떠오르고 이는 궁금증을 유발하며 아주 길고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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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한 번만 볼 수 없다. 감독의 의도이던 아니던 영화 '아가씨'는 메타포의 범람이었다. 눈에 띄는 미장센들을 하나씩 찾고 이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이 영화는 감독의 손을 떠나 많은 리뷰어들로 하여금 더욱 더 풍성해졌다. 그리고 수많은 메타포 중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

 

만월

영화를 보며, 또 본 후에 자연스럽게 영화 '윤희에게'를 떠올렸던 또 다른 이유는 '만월'이었다. 시기는 다르지만 국가적 배경뿐 아니라 이들의 마음을 달로 표현한 것도 닮았다. 어떤 영화가 먼저 나왔는가를 떠나서 마음을 달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 자체가 참 예뻤다.

 

낭독회

히데코는 코우즈키의 인형에 불과했다. 코우즈키의 권위를 위해, 혹은 만족되지 않은 성적 욕구를 위함일지도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외설적인 그림을 보며 음란 서적을 많은 남성들 앞에서 완벽하게 낭독해야 했던 히데코의 낭독회는 남성 지배적인 모습과 동시에 억압을 보여준다. 후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어 분노한 숙희가 코우즈키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망가뜨리고, 히데코도 이에 가담하며 비로소 길고 긴 시간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히데코는 많은 이들의 말을 인용한다

이는 박찬욱 감독이 직접 언급하기도 한 부분인데, 히데코는 어릴 때부터 책을 낭독해왔기 때문에 인용하는 버릇이 있으며 자신이 한 말이 아닌 다른 이의 말을 옮겨 쓴다는 것은 아기처럼 의존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보여준다고 한다. 또 숙희가 사용한 표현을 숙희에게 사용하며 일종의 밀당을 했다고 한다.

 

사실 영화를 보며 왜 자꾸 히데코는 다른 이들의 말을 따라 사용할까?라는 의문만 들었을 뿐 이유는 쉬이 추측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영화 '아가씨'는 막을 내린 후 더욱 흥미로워졌다. 오히려 스포일러를 먼저 본 후에 영화를 봐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로 영화가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는 모든 것을 놓치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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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에서의 그려낸 남성들은 쉽게 말해 모두 문제가 있다. 본인을 백작이라며 속이고 다니는 이는 돈에 미친 사기꾼에 불과하며, 일본인이 되고 싶어 말의 떨림까지 연습하는 코우즈키는 영화에서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성적으로 하자가 있어 성도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음란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두 인물은 다르면서도 유사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 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또한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인데, 길고 긴 영화에서 남성 인물 둘이 조우하는 장면은 거의 유일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참으로 가관이다. 애지중지하던 책들을 잃고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은 코우즈키가 백작의 손가락을 자르며 묻는 것은 히데코와의 초야이다. 외설적인 단어를 끝없이 뱉어내며 코우즈키, 그 바닥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재촉하는 모습. 또 성기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말하는 백작의 모습은 우습기도 하고 역겹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 설정도 설정이지만 동시에 배우들의 연기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작 역의 하정우와 코우즈키 역의 조진웅 그리고 사사키 부인 역의 김해숙 배우까지. 세 명의 배우가 전혀 다른 이미지로 등장하는 다른 작품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이들은 완벽하게 다른 인물을 소화해냈고 이는 경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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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을 다룬 스토리뿐만 아니라 시각적, 청각적인 요소들까지 붙들고 하나하나 의미를 찾고 곱씹고 싶으니 이 영화에 대해 A부터 Z까지 이야기 하려면 밤을 새도 부족할 것 같다.

 

이는 박찬욱 감독이 직접 언급한 부분인데, 여성 스탭과의 협업으로 남성인 박찬욱 감독의 부족한 면을 메울 수 있었으며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아가씨는 영화 자체로도 완성도 높은 영화이지만 이러한 젠더 문제에 있어서, 즉 영화 외부적인 것들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의미하기 때문에 더욱 가치 높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에 다른 여성 퀴어 영화나 원작 소설인 핑거스미스를 읽고 비교 분석을 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뜻밖에 오래된 서재 구석에서 존재를 알지 못했던 비밀스럽고 흥미로운 책을 꺼내 읽은 기분. 가장 좋아하는 영화 '윤희에게'에 버금가는, 또 다른 무드로 마음을 이끄는 영화를 하나 더 발견했다.

 


[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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