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구원은 셀프'라는 말에 대한 나의 대답 [사람]

나는 그저 네가 너 스스로를 구원하는 행동의 계기가 되고 싶어
글 입력 2020.01.03 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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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정말 '셀프'일까?


 

'구원은 셀프'라는 말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올해 남자친구를 새로 사귄 친구 때문이었다. 친구는 남자친구와 사귀는 초기에는 행복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처받는 일이 많아졌다. 함부로 판단할 순 없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내 친구의 남자친구는 내 친구를 과하게 통제하려 했고 자신의 통제에 벗어나면 헤어지겠다는 식으로 말해 친구를 꼼짝 못 하게 했다.

 

더 큰 문제는 내 친구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하는 그런 나 앞에서 ‘아냐,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해서 화나게 한 거야.’라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너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데 헤어지는 건 어떻겠냐 식으로 말해도 친구는 남자친구를 떠날 수 없었다. 내 친구는 남자친구의 헤어지자는 선언에 울었다가, 매달려서 재결합하는 일을 반복하곤 했다. 내 조언은 그 친구한테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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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은 해결되지 않고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친구가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 연락을 해와도 ‘어차피 내 말은 안 듣고 남자친구한테 갈 텐데’라는 생각에 톡을 잘 안 보게 되었다. 연락이 닿아서 친구의 비슷한 레퍼토리를 또 들으면 속으로 ‘역시 구원은 셀프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에, 그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일이 생겼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니 속상하다던 나의 친구


 

나랑 7살 나이 차이가 나는 동생들은 올해 세무회계 특성화고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모님이 요즘 대학교 나와 봐야 취업이 안 되면 무용지물이라며, 적극적으로 권한 고등학교였다. 나는 동생들이 꿈을 위해서 그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취업이 잘 된다는 이유만으로 입학하는 것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아빠께 동생들이 그저 취업을 위해, 부모님의 권유로 특성화고등학교를 들어가는 게 걱정된다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지금 나는 적성에 맞는 과에 입학해 대학 생활이 행복하다고 덧붙였다. 내 말을 들은 아빠는 반은 장난이었지만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학생 시절 4년까지만 행복하고, 졸업하고 너 취업 안 되면 그땐 네가 네 동생들이 부러워질 수도 있지. 요즘 문송합니다가 유행어인 시대잖아? 어떻게 보면 전략인 거야. 네 동생들까지 4년제 인문계 대학 나와서, 그 뒤로 취업 안 되어서 세 자매가 손만 빨게 되면 어떡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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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하신 말씀을 듣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하긴, 그렇긴 하네요.’라고 수긍했다. 아빠랑 같이 하하,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날 토론은 그렇게 끝났다.

 

그 뒤로 나는 내 친구를 만나서, 동생들에 대한 고민을 다시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이게 되었다.

 


내가 취업에 전전긍긍하니까 동생들이 나를 보고 취업에 대한 불안을 크게 느끼는 것 같아. 그래서 취업이 잘 된다는 말 하나 듣고 고등학교를 쉽게 정한 것 같아서 걱정이야. 우리 아빠조차도 걔들을 세무 고등학교에 보낸 건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씀하시더라고.


 

그리고 웃어 보였는데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나를 따라 웃지 않았다. 친구는 진지한 표정을 하더니 나를 향해 심각하게 말했다.

 


사람마다 잘하는 게 다르고, 속도도 다른 건데 왜 네가 너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말을 들으니 속상하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일단 내가 고학번이 되고 휴학을 하면서, 부모님은 장난스럽게 이런 종류의 말을 나에게 종종 하시곤 했다. ‘졸업하고 네가 취업 못 해서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까 걱정이다.’ ‘지금의 네가 사회 나가서 할 수 있는 게 뭐니.’ 그 말들은 눈곱만큼의 거짓도 없었거니와, 그 말들이 장난식이라는 걸 알아서 난 그런 말들에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의 나는 내가 상처받았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내 친구가 왜 이렇게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다른 지인과도 동생들의 고등학교 진학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내 고민을 끝까지 들은 지인이 가볍게 툭 말 한마디를 던졌다.

 

언니가 동생들 앞길 막았네.

 

표정이나 목소리 톤으로 그 말이 장난이라는 걸 알 수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난 웃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목이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 급격하게 어두워진 내 얼굴을 보고 지인이 수습에 나서기 시작했다. 지인은 나에게 ‘장난이다’, ‘이렇게 마음이 여려서 사회를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냐’ 식으로 말했다. ‘사회 나가면 더 심한 말도 많이 듣는다’까지 말이 나왔을 때,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지인이 계속 쩔쩔매는 걸 보고 있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내가 자연스럽게 다음 화제로 대화를 돌렸고 그제서야 지인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조차도 내 마음을 속일 때가 있었다.


 

그날 밤 무거운 마음에 잠이 안 와서 뒤척이던 중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친구가 전에 해줬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왜 네가 너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어. 그런 말을 들으니 속상하다.


 

내 머릿속에서 친구의 그 목소리가 들리자, 곧바로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들었던 ‘너 어떻게 취업할 거냐’, ‘네가 사회에 나갔을 때 밥벌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동생이 네 길 걷지 않게 하려고 그런다’ 이런 말들은 나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주는 말이라는걸, 진심이 아니라 장난으로 한 말이라는 것도, 그 말을 한 사람들이 사실 그 누구보다 내가 잘되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저 말들을 들을 때마다 사실 마음이 조금씩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구나, 그걸 그제야 깨달았다.

 

친구가 나에게 해준 그 말 한마디를 통해 나는 내 마음을 선명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저런 말들을 들으면서 나는 ‘사실인데 뭐…’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다. 그런데 사실 대수롭게 잘 넘겼다고 착각해온 것이었다. 나는 그런 ‘내 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내 감정을 직시하게 해준 건 '타인'인 친구가 나에게 해준 그 한 마디였다. 그러자 저절로 앞에서 말한 남자친구로 힘들어하는 내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친구가 나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자기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 건 날 맥 빠지게 하려는 말이 아니었구나.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그랬던 것이구나.

 

구원은 셀프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당연히 나를 구원하고자 하는 ‘행동’은 나 스스로밖에 할 수 없다. 그 누구도 나를 위해 행동까지 해줄 순 없다. 그런데 나를 내가 구하는 행동을 하게 하는 계기는 타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혼자서는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불합리한 상황에서 고립된 개인은 상황을 객관화해서 보기 어렵다. 그럴 때 네 잘못이 아니라고 알려줄 수 있는 건, 그 상황 밖에 있는 타인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네가 너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행동의 계기가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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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 건 그때를 버텨내고, 지금은 잘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때 당시에 내 주변에 좋은 사람이 많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힘든 상황이 닥쳤을 때 가족들이 관심을 두고 조언을 해주었고, 괴로워하는 내 목소리를 새벽 동안 들어준 친구가 있었다. 집에 초대해줘서 오랜 시간 동안 같이 그 고민을 나눠준 친구도 있었다. 내가 노력했기에 그 상황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맞지만, 그 노력을 하게 해준 원동력은 날 도와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나는 노력할 힘도 없어서, 할 수 있는 건 절망뿐이었을 것이다.

 

구원은 정말 셀프인가? 이제 개인적으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행동은 스스로가 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 행동의 원동력은 타인이 되어줄 수 있다. 내 감정을 직면한 그날 밤 혼자서 시원하게 울고 나서 잠들기 전에 스스로 다짐했다. 내 친구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저 계속 말해줘야겠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네가 너 자신을 그렇게 여겨서 나는 속상하다고.


 

친구가 스스로 깨닫기 전에, 내가 먼저 무턱대고 친구를 구원하려고 하면 나도 친구도 상처만 받을 뿐이다. 나도 내 친구가 너희 가족은 너를 후려치고 있다, 식으로 말했다면 기분이 상해서 그 친구를 안 만났을 것이다. 나는 이제 그저 그 친구를 떠나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해줄 것이다. 그래야만 스스로가 세운 벽에 고립되어 있던 친구가, 벽 너머에 들리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고 이 벽을 넘어봐야겠다 생각이 들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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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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