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본질이 주는 비주얼의 힘, "웰컴 투 마이 스튜디오!" [시각예술]

영국의 거장 그래픽 디자이너, 앨런 플레처 회고전
글 입력 2019.12.27 14:3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포스터] 앨런 플레처 기획전_최종.jpg

 
지난 주말, KT 상상마당에서 진행되고 있는 앨런 플레처 회고전 <웰컴 투 마이 스튜디오!> 전에 다녀왔다. 전시의 제목만 보고 그래픽 디자이너 앨런 플레처의 작업 스튜디오에 관한 이야기나, 그의 작업방식과 관련된 내용이 주일 거라고 생각했다. 또, 한 시대를 관통하는 디자이너였지만, 과거의 디자이너이고 회고전이라 따분하지는 않을까 약간은 걱정했다. 그런데 전시를 보면서 잊고 있었던 디자인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고, 간만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alan-fletcher-a-martin-dun.jpg

앨런 제러드 플레처 (1931.9.27~2006.9.21)

 
 
앨런 플레처는 영국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4개의 아트스쿨에서 공부를 하며 디자인의 실력을 키워갔다. 그러다 대학생 신분으로 뉴욕에서 모든 디자이너가 선망하는 직업이었던 Fortune magazine의 커버 디자이너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명의 동료들과 자 회사를 설립해 타임스지와 라이프지, 보그지 등의 클라이언트를 두고 본격적으로 작업을 해 나갔고, 바뀐 몇몇 동업자들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독립적 디자인 자문회사 ‘Pentagram’을 키운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전시를 보며 아마존의 CEO인 제프 베저스가 한 말이 떠올랐다.

 
“다음 10년 동안 무엇이 변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정말 많이 받는다. 그러나 10년 후에도 변하지 않을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거의 받지 않는다. 나는 변하지 않을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가치에 투자하고 전략을 세웠다.”


전시에 나타난 앨런 플레처의 작품들이 가진 정체성을 감히 한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변하지 않는 아이디어의 힘
 
 
상상력이 없는 사람은 뜨거운 물이 없는 티백과 같다.
 
- 앨런 플레처

 
물론, 디자이너로서 개인적인 주관에 따른 해석이지만, 그래픽 디자인의 본질은 아이디어와 아이디어를 보는 이로 하여 명확하고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미디어 아트(generative art)나 기술 발전으로 표현력이 확장되면서, 꼭 어떤 의미가 없이도 이해되는 시각언어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으므로, 모든 그래픽 디자인은 본질, 즉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제작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의미없는 비주얼의 나열은 가뜩이나 넘쳐나는 시각적 공해를 심화시킨다고 생각하며, 공해들이 넘쳐날수록 작업물이 본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또, 언제 어디서든 그래픽을 포함한 비주얼을 발견할 수 있는 세상에 ‘예뻐 보이기만 하는’ 작품들은 그 존재 의미를 따지게 된다. 단순히 사용자, 소비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으면 그만인 그들의 존재 목적은 시선을 사로잡는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하기 때문에, 막상 시선이 꽂혔을 땐, 그 어떤 울림도 줄 수 없다.

문제는 그런 비주얼 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사고하게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각’의 본능만을 자극할 뿐. 그렇다 보니 이러한 시도를 복제하고 이용하는 제작자의 도덕성 결여는 보는 이들 또한 그들의 본래 목적을 잊게 하고, 보는 이들을 생각하는 인간이 아닌, 본능적인 인간에 가깝게 만든다고 본다.
 
 

CLAM 재떨이.jpg

CLAM 재떨이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앨런 플레처의 작품은 명확하면서도 본질에 닿아있다. 그래서 보는 이들이 단순히 시각적으로 비주얼 자체의 재미를 느끼는 것을 넘어,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각언어의 존재 이유가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재미를 줄 때, 그의 아이디어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그의 작품은 위트 있으면서도, 명확히 전달되고, 시각적으로 완성도도 높다. 아이디어와 그 아이디어를 비주얼로 표현하는 방식이 명확하므로, 그의 그래픽 작업물 속엔 불필요한 요소들이 없다.

그래서인지, 앨런 플레처의 작품이 여전히 젊은 세대들에게도 인기를 얻고, 회자하는 이유는 세대를 아우르는 아이디어에서 오는 재미에 있지 않나 싶다. 다홍색 삼각형과 분홍색 원, 흰색 사각형에 반원의 곡선을 그린다. 곡선 한 개 만으로 산타 할아버지의 표정을 유추하게 한다. 감성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는 디자인이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앨런 플레처를 두고 아이의 순수함과 호기심을 간직한 아티스트 마인드의 그래픽 디자이너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앨런 플레처 5.jpg



그의 작업을 보면서, 젊은 세대들이 과거로 회귀하는 레트로 문화를 좋아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떠올리게 된다. 현재의 것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전적 새로움과 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가치를 위트있는 아이디어로 풀어낸 방식 등이 그의 작품과 맞닿아있지 않을까.
 

0823_뉴트로_04.jpg

레트로

 
 
문득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같은 디자이너로서 부럽기도 하고 궁금했다. 그리고 이는, 조심스럽게 유추해보건대, 평소 수집광이었던 그의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여행도 자주 다녔던 그는 세계 곳곳을 다니며 새롭거나 흥미롭다고 느껴진 물건이나 장난감, 전시회 콘서트 티켓, 수화물 스티커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수집했다. 그리고 단순 수집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수집된 오브제를 그의 일상 속으로 가져와 디자인으로 재조합했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콜라주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일관된 컨셉으로 진행된 갖가지 콜라주 작품들은 역시나 앨런 플레처 만의 순순한 감성을 엿볼 수 있었다.
 
 

콜라주.jpg

콜라주 작업들

 

전시를 보다가 그의 작품 중에 인물을 그린 작품을 보며 또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근 그래픽 씬에서 한참 인기를 끌었던 인물 양식의 원형을 봤기 때문이다. 그래픽에서 인물을 그리는 새로운 양식, 몸이 크고 비율을 무시한 큰 팔다리 등의 스타일을 오래전에 미리 구상하고 시도한 그를 보며, 천재 아티스트인가 싶다가도 이내 그런 생각을 접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디자인 작업을 맡았던 유능한 디자이너이면서도, 개인 작업을 위해 은퇴를 할 정도로, 실무만큼이나 창작 자체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그렇기에 여러 시도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고, 여전히 살아있는 감성의 작업을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앨런 플레처 6.jpg

  
 
디자이너는 두 종류가 있다. 헬리콥터형과 자동판매기형이다.

전자는 직접 조사하고 관찰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기 중을 순회한다. 그러나 후자는 누군가 돈을 집어넣기 전까지 가만히 있을 뿐이다. 이때 나오는 제품의 종류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으며 오래된 것들이다.
 
- 앨런 플레처
 
 

작업실.jpg

 

작품의 수에 비하면 공간이 협소해서 아쉽기는 했지만, 화려하거나 압도적인 규모가 아니더라도, 작품 속에 숨겨 놓은 아이디어들과 그의 철학이 충분했기에 전체적으로 꽉 찬 느낌을 받았고,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를 집중해서 볼 수 있었던 전시였다. 엘런 플레처의 생(生)과 동일시 되며 살아있는 상상력 자체였던 그의 작품들처럼, 현시대 디자이너들의 작품들도 더욱 본질에 가까워지길 기대해본다.

 
[고유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