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회의 자화상 - 질문하는 미술관

그림으로 보는 8가지 사회문제
글 입력 2019.12.24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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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

: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한 마음

: 스스러움을 느끼어 수줍어하는 마음


 

미술관 벽에 걸린 작품들을 보면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감추고 싶은, 혹은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자화상이 그 안에 숨어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혹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숨어 있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 <질문하는 미술관>




질문하는 미술관

_이만열(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고산

 

 

질문하는 미술관_표지.jpg

 

 

[PRESS]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회의 자화상



지금은 미술관에 걸린 그림을 작품으로 감상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시각적인 기록 방식이 그림뿐이었을 과거에는 그 이상의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의 그림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자 감춰진 것에 대한 폭로가 되기도 했고,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는 예술가의 사색이 담긴 목소리이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대한 기록으로서 교훈이나 경각심을 주기 위해 그려지기도 했으며 자신의 젊음과 부를 남기기 위한 초상화나 사람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그려지기도 했었다.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화가가 담은 세상 모습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그리고 매 순간 그림에 더해진 목소리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시 한데 모여 사회를 비추는 "거울"을 이뤄 작품만의 중요한 의미로 함께 전해져 오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림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진 "거울"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작품을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그 거울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회와 우리를 비추고 있으며, 서로 마주하고 있는 그 모습이 바로 예술과 공존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림은 사람으로 인해 존재하며, 사람은 과거의 모습을 기록하고 또 현대 사회를 향해 조용히 질문을 건네고 있는 거울과 함께하고 있다.


이 내용은 최근 필자가 자주 생각한 사람과 예술의 관계, 더 넓게는 사회와 예술의 관계였다. 불안한 사회, 그런 사회의 단상을 비추는 작품들과 다시 언급되는 작품들을 보며 이 관계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중에 도서 <질문하는 미술관>을 만난 것이다. 도서가 제시한 8가지 사회 문제와 이를 예술 작품과 함께 통찰한다는 방향성이 눈에 띄었다. 현대 사회를 살며 목격하는 숱한 문제들과 이해할 수 없도록 어긋난 상황들 속에서 예술 작품이 가진 역할이자 힘을 적극적으로 데려오고 있는 책을 찾아낸 것이다.


"왜 우리는 이런 사회에 이르게 된 걸까?"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건 아니란 점이다. 분명 시작이 있었고 그 시작이 있던 과거가 있었기에 지금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그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질문하는 미술관>은 과거를 기록하고 또 지금에 질문하는 예술 작품 앞에 섰다. 불안한 사회를 통찰하고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한 한 권의 길잡이, 그 속에서 예술과 인문, 사회, 그리고 사람이 마주해서 서로 비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또 그 사이에서 우리는 무엇을 질문하고 통찰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를 시작한다.

 

 

사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출발하여 차별과 혐오로 얼룩졌다. 서로 믿지 못하는 불신이 팽배해졌고 진실 없는 사실만이 공허하게 남아 있다. 불안한 사회에서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을 무수하게 많이 던질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 책은 그림을 보면서 사회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차별과 혐오, 거짓과 위선, 탐욕과 불평들과 같은 사회문제를 환기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고, 현실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찾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 책은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 질문하는 힘을 길러줄 것이다.


- 출판사 서평

 

 

 

*

 

"21세기 더 심화된 우리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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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하는 미술관>에서 그림은 단순히 미적으로 감상하는 대상을 넘어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려진 대상에 대한 예술가의 시선이 투영되는 동시에 대상과 예술가를 모두 감싸고 있는 사회의 모습도 함께 투영하게 된 그림이 우리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그림은 시대마다 깊이 뿌리 내리고 있던 사상에 대한 기록이자 사람에게 내재한 왜곡된 마음과 시선에 대한 증거로서 존재하고 있다.

 

캔버스에 드러난 표면을 넘어 그것이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통로의 시작점, <질문하는 미술관>을 펼치는 순간  8가지 사회문제를 향한 시선으로 그 시작에 서서 사회를 통찰하고 다시 자신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시간이 시작되는 것이다.

 

차별

혐오

불평등

위선

중독

탐욕

반지성

환경오염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 8가지 문제를 가진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 불안함의 연속이지만 이미 살아가는 방법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면,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이 복잡한 충돌과 어지러운 문제들이 놓인 곳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설명하는 저자의 길잡이를 따라 질문을 해야할 것이다. 이는 살기 위한 질문이다. 현명하게 사회에서 다른 이들과 공존하려면, 그 공존을 위해 언제까지나 무거운 짐으로 사회 문제를 함께 끌고 갈 수 없다면 지금부터 생각하고 질문해야 한다.


사회를 투영하는 예술과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 <질문하는 미술관>은 그사이에 서서 지금을 살아가기 위한 모두의 통찰에 함께하고자 한다. 한 사람도 허투루 대해져서는 안 되는 사회지만 그러지 못해 모두가 불안한 사회에서 모두가 건네는 작고 큰 질문들에 힘을 실어주고자 한다.


 

이 책은 차별, 혐오, 불평등, 위선, 중독, 탐욕, 반지성, 환경오염 8가지 사회문제로 나누어 그림을 살펴본다. 메두사의 머리카락이 뱀으로 변한 이유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틴토레토의 그림 <수산나와 원로들>을 통해 한국에서 벌어진 몰래카메라 범죄를 환기하고 비판한다. 노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는 500년 전에도 있었음을 밝히고 눈, 코, 입이 명확하지 않은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을 보며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떠올린다.

 

초상화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유전병으로 주걱턱을 가졌던 합스부르크 가문을 통해 위선과 거짓으로 뭉친 사회를 비판한다. 단식투쟁을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김밥과 피자를 먹는 폭식투쟁을 돌이켜 보면서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자고 말한다.

 

단순히 그 시대를 대표하는 그림이 아니라 21세기에 더 심화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본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여전히 공방하는 사회적 논쟁의 핵심을 꿰뚫는다.

 

- 출판사 서평



 

*

 

가면을 쓰고

그속에서만 보려는 사람들

 

 

한 작품이 그 시대에 인정받음은 사람들이 그려진 대상이나 사건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며, 반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았다는 것은 당대 사람들이 그림 속 내용을 자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당연히 객체인 그림을 바라보는 주체였던 사람이 주체가 아닌 그림에 응시 당하는 객체의 위치에 섰을 때 일어나곤 했다. 응시를 당한다는 것은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날카로운 시선을 선연히 느낀다는 것과 닮아있는데 여기에는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없을 때, 대상을 자신의 사고 범위에 대상을 온전히 들여놓지 못할 때, 옳다고 믿고 지키고 싶던 것들의 숨겨진 진실이 드러날 때 느껴는 불안함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를 잘 드러낸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올랭피아>였다. 오래 전부터 여성 누드 작품을 계속 감상했던 “감상자”들은 <올랭피아>를 자신이 보아오던 시선의 범위로 데려오기를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당시 수면 위로 올라온 사회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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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1856


 

(…) 대다수의 고상함을 전명에 내세운 비평가들은 달랐다. 마네가 그리고자 했던 파리의 어둡고 추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마네)는 그림을 통해 제2 제정의 가치들이 위선적이고, 당시 파리에 거주하는 남성들이 밖에서 고상한 척하며 밤이면 퇴폐적인 향락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당시의 이중적 성性 의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저항했다.

 

하지만 아카데미 파가 주축으로 형성된 미술의 전통을 파괴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 신문들은 그의 그림에 대한 풍자와 비판으로 일관했다. 그의 작품을 두고 “노란 똥배가 나온 오달리스크”라는 신랄한 공격은 연일 이어졌다. 심지어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며 조롱했다.


- “위선 - 지킬의 가면을 쓴 하이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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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의 탄생>, 알렉상드르 카바넬, 1863


 

특히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의 여성도 여신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그의 그림 모델도 마네의 모델처럼 창부였다. 심지어 그녀의 자세는 올랭피아보다도 더 관능적이고 노골적이다.

 

이 작품이 마네의 작품과 달리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누드 위로 아기 천사를 그려 넣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리스 신화의 비너스로 변신한 것이다. (...)

 

그림 속 누드모델은 카바넬에게서 현실이 아닌 신화 속 이야기로 해석되었다. 이런 이유로 작품을 보고 성적인 상상을 하더라도 도덕적으로 손가락질받을 일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 고전적인 회화의 모티브인 비너스를 암시하면서 모든 선정성 시비를 없애버린 것이다.


- “위선 - 지킬의 가면을 쓴 하이드” 중

 

 

실제 인물인 고급 창부가 나체의 모습으로 남성을 부끄럼 없이 응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반대의 시선을 받았던 마네의 <올랭피아>, 그리고 그 반대의 특징과 이유로(나체의 모습으로 부끄러운 듯이 자신의 신체를 가리고 시선을 피하고 있는, 무엇보다 신화의 내용이라는 핑계) 허락하고 즐겨 보인 여성 누드 작품 중 하나다. 마네는 권력자들의 “고상함” 뒤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그림 한 점으로 폭로한다. 둘 모두 여성 누드 작품이지만 마네와 “다른 감상자”들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한다. 같은 것이지만 같은 것이 될 수 없다며 비난한다. 그림 앞에서 서로 다른 시선이 비로소 직접 마주하여 필요했던 대화,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무엇보다 이는 감춰졌던 사회의 틈이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봐도 마네의 주장은 틀린 것이 없다. 파리의 숨겨진 그들의 추한 모습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었고, 조금 투박하게 그려졌지만 창부와 함께 그려진 화면은 다른 그림들보다도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비평가들과 사회 지도자층 그리고 감상자들은 “그들만의 규칙” 속에 있던 “그들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마네의 작품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해야 했다. 당시 아카데미 파 화가들이나 사회 지도층들은 그 뒷모습의 현장을 고스란히 그대로 그렸다는 이유, 여성을 아름답지 않게 투박하고 거칠게 그렸다는 이유처럼 여러 이유를 대며 비판했다. 사실도 비판보다는 비난과 조롱에 가까운 언어를 내뱉었다.


필자는 선정적으로 그려진 여성 누드 작품을 신화라는 핑계로 아무렇지 않게 감상해온 비평가들과 사회 권력자인 “감상자”들이 <올랭피아>가 폭로한 자신의 모습 앞에서 위기감을 느낀 것으로 보았다. 자신의 모습 앞에서 스스로 불안함을, 부끄러움을 느낀 것이다. 만약 이런 불안이나 위기감이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하에 비판해야 하는 작품이었다면 그 “고상한” 비평가들이 <올랭피아>와 마네를 그렇게 거친 언어로 표현했을까. 그들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인정하지 않고 포장하기 바빴다. 무엇보다 마네의 그림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들도 불안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그들의 거침없는 비난과 조롱은 결국 자신의 뒷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폭로하는 그림 앞에서 대화가 일어날수록 틈은 더 진실을 향해 벌어진다. 어쩌면 그것이 마네가 <올랭피아>를 그린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림은 사회의 모습을 비추고, 비춰진 모든 것은 그 앞에서 쌓이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난 지금의 우리는 그 틈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어느 방향에서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선정적인 그림을 위해 신화라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허락해왔던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는 것. 고상한 그들은 그런 자신들만의 틀이 무너지고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 부끄러움을 부끄러움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 그때에도 사회의 한 부분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올랭피아>를 두고 일어났던 사건을 보면 결코 먼 이야기 같지 않다. 잔상은 여전히, 더 심화된 모습으로 남아있다. 여전히 어디서 많이 본 “척”뿐인 위선이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핑계들이다. 과거와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는 지금의 뒷모습, 불안함을 일으키는 균열이 보인다.


 

오늘날 숨겨진 이들의 어두운 욕망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피해자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이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전 세계적인 바람은 한국에서도 거세게 일었다. 미투 운동은 그동안 음침한 남성 사회에서 은폐되어온 성폭력 구조를 깨뜨리는 변혁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운동은 사람들이 가해자의 가면 속 모습을 볼 수 있게 했다.


- “위선 - 지킬의 가면을 쓴 하이드” 중

 

 

위장된 “고상함” 뒤에 감춰진 권력자들의 성폭력과 위계질서를 두고 내뱉는 핑계, 위선에 대한 폭로와 폭력성과 권위주의에 대한 질타가 아닌 그들 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주목하는 언론의 잘못된 초점, 성과 관련된 사건이면 가해자를 손가락질하다가도 피해자부터 검색하는 사람들, 시민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닌 위선에 휘둘리는 사회 제도. 저자가 하나씩 짚어가는 위선과 이중성들은 온전하지 못한 채 쪼개져 어그러져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1800년대 <올랭피아> 앞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사회의 모습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나와 다른 그대, 고로 혐오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늙음을 향해 한발한발 나아간다. 그냥 가는 게 아니다. 늙는다는 건 상실을 의미한다. 육체적으로 상실하는 것 외에도 사회적으로도 모든 것을 빼앗기며 나아간다. 직장을 잃고 권위를 잃고, 자식은 품에서 떠나보내고, 배우자는 하늘로 떠나보낸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상실의 벌을 받는다.

 

- "혐오 -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중

 

 

“나와 다른 그대, 고로 혐오한다.” 필자가 <질문하는 미술관>에서 읽은 문장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단번에 드러내는 문장 같았다. “나와 다른”은 너무 단순화된 표현 같지만, 이는 사실 정말 자명한 부분이다. 모든 혐오는 나와 다르다는 이유에서 시작된다. 사실 사회의 많은 문제가 여기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다름”이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것으로서가 아닌 그저 “나와 다름 그러므로 상관없음”으로 변질되는 순간 남겨지는 건 이해의 차단과 배려의 단절 그리고 서로의 외면이다. 다른 이의 다름을 "나와 다름"으로만 보고 ‘나’를 지나치게 중심에 세우는 순간 모두가 서 있는 운동장은 기괴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웅덩이에 쓸려 들어가고 누군가는 지나치게 위로 올라서고 누군가는 경사면에 겨우 버티고 서있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으며 마주 앉아 대화하는 것은 더욱이나 어려운 슬픈 사회가 돼버린다.


나이와 세대, 경제, 환경, 사랑, 성별 어느 하나 모두가 같을 수 없는데 이것을 두고 서로에게 따지기 시작한다. 그래놓고 혐오가 아니라고 한다. 대화해야 하는데 무작정 나는 그렇지 않으니 너는 틀렸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공존하려는 방식이 혐오로서 움직이면 정말 거북한 것이 된다.


그것이 “나이”에 대한 것일 때는 더 이상한 모습이 된다. 한 사람은 분명 어릴 때가 있었고, 젊음을 누릴 때가 있으며 어느 사람 피할 수 없이 언젠가는 늙음을 안고 살아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늙지 않았다고, 내가 어리지 않다고, 나는 젊을 때 저러지 않았다면서 선을 긋기 시작한다. 저 때가 내 과거였음을, 그리고 곧 다가올 나의 미래라는 것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중 저자는 혐오 문제를 다루면서 늙음에 대한 혐오를 이야기하기 위해 그림과 함께 영화, 소설, 드라마에서 말하는 늙음을 소개했다. 필자는 그중 연달아 소개된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의 대사, 그리고 에라스무스가 쓴 《우신예찬》 속 내용과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린 퀸텐 매시스의 그림이 인상 깊었다. 세 작품이 말하는 “늙음”을 보고 있노라면 늙음을 맞이한 사람이 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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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한 공작부인>, 퀸텐 매시스, 1513


 

(...) 시대를 넘어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에르스무스가 쓴 《우신예찬》에도 조롱과 혐오가 등장한다.

 

정말 재미있는 것은, 마치 저승에서 막 올라온 듯한 송장 같은 할머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를 끊임없이 연발하고 다니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런 할머니들은 암캐처럼 뜨끈뜨끈하고, 그리스인들이 흔히 하는 말로 염소 냄새가 난다. (중략) 또 처녀들 틈에 끼어 술을 마시며 춤을 추려하고 연애편지를 쓰기도 한다. 모두가 비웃으며 그런 할머니들을 두고 다시 없는 미친년들이라고 말한다.


(...) 심지어 이 글을 토대로 화가 ‘퀸텐 매시스’는 그림 하나를 내놓았다.


병으로 얼굴이 기형이 된 노인, 그녀는 애써 아름답게 꾸미거나 젊어지려 애쓰지 않는다. 심지어는 가슴골이 깊게 파인 옷을 입고 캔버스 앞에 섰다. 옷으로 인해 쭈글쭈글한 피부가 더 드러나는 상황에서도 약혼을 의미하는 빨간색의 꽃을 들고 있다. 그녀는 지금 누군가를 유혹하고 있다.


매시스의 <추한 공작부인>이란 이 그림은 《우신예찬》을 참고해 나이에 맞지 않게 젊은이 흉내를 내는 상황을 풍자한 그림이다. 화가가 이렇게 노골적이면서도 조롱하듯이 나이 든 여인을 그린 것은 당시 분위기가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 “혐오 -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중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성형외과에 나타난 나이 든 주인공에게 낯선 시선을 보내는 젊은이를 향해 외친다.

 

누구 보라고 하는 거 아니야, 나 보려고 하는 거야. 우리도 아침에 세수하고 이 닦을 때 거울 보잖아. 그때마다 내가 흡족했으면 해서 하는 거야. 예뻐지고 싶은 맘 그대로 몸만 늙는 거야 이것들아

- “혐오 -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중

 

 

사회에서 “늙음”이 이렇게 비치고 있는데 이곳에서 계속 살아갈 나는 늙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시에 지금의 어르신들은 이곳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늙어서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지금 어르신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곧 다가올 나의 모습이고, 사회가 늙음을 대하는 태도는 곧 나를 향해 쏟아질 태도였다.


사람이 불가피한 시간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정말 상실뿐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상실을 일으키는 건 “늙음” 자체만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상실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정착하려는 사회 앞에서 소외되고 있다. 직접 입력해서 계산해야 하는 키오스크, 젊은 세대에 맞춰진 용어의 사용이나 서비스, 온라인으로 예약이나 예매를 받는 것에 편향된 시스템은 모두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겐 어려움이 되고 있다.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새로움에는 분명 모든 사람이 탑승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한쪽은 너무나 앞으로 나아가고 다른 한쪽은 그를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두 얼굴이 너무도 선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런 뒤처짐과 어쩔 수 없는 상실은 순식간에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필자는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노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접했는데, 분명 눈살을 찌푸리게 행동하는 어르신들도 있지만 일부의 잘못을 그와 같은 모든 사람에게 너무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틀니를 딱딱거린다는 의미의 “틀딱충"이라는 말이나 시끄럽게 떠드는 할머니들을 비하하는 “할매미”라는 표현들 모두 불가피한 늙음으로 인해 일어난 신체에 대한 상실로(이를 잃고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인한 모습인데 너무 아무렇지 않게 비하하기 위해 언급하는 것이 아닌지 질문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의미라고 상실을 언급하는 맥락에서 쓰이는 단어가 아니란 걸 알지만 그것을 데려와 단어화한 것은 또 사실이지 않은가.


우리는 서로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공존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었나 회의적인 시선과 함께 한숨 쉬게 된다. 정말 부끄럽기도 하다. 분명 나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이런 비난과 조롱을 받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마 모두가 그럴 것이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세상을 만들고 있다. 지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만, 나만 아니면 돼”라는 사실 대책도 배려도 없는 논리로 이루어진 태도가 지금의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 같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순식간에 모든 사람에게 일반화하고 그것을 순식간에 받아들이고 동시에 내가 아니니까 괜찮다는 합리화를 진행한다. 혹시 나도 그러고 있지 않았는가, 더 늦기 전에 모두가 질문해야 할 것이다.


어떤 계기나 방향으로든 하나의 사회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것은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 찬성 혹은 반대할 것인가, 비판의 목소리를 낼 것인가 혹은 묵인할 것인가는 사회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가 정해야 할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선택한 나의 태도는 내가 타인에게 향하는 시선일 뿐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언젠가는 내가 받을 시선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부끄러움”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한 마음’

‘스스러움을 느끼어 수줍어하는 마음'

 

<질문하는 미술관> 처음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실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쪽팔리다”라는 말로 부끄러움을 가볍게 언급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진 것 같다. 사실 부끄러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면 “쪽팔리다”와 “부끄러움”은 같은 단어의 맥락으로 볼 수도 없는 것 같다. 과연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을까.


자신의 양심과 마음을 향한 부끄러움은 자신의 부끄러움이 되지 못하고 남의 탓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언제부턴가 부끄러움을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고, “한 개인의 불편함과 편견, 조롱, 소외가 누구의 탓이 아닌 자신이 탓이 되어 부끄러워해야만 했다”고 말한다. 사람 마음에 당연히 있어야 할 부끄러움이 제 자리를 잃은 것이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이는 그러지 못하고, 여성, 가난, 나이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를 이루는 것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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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책을 읽으며 자주 반성하고 질문했다. 지금까지 사회 문제들 앞에서 할 수 없다며 체념하기만 했는지, 혹시 그 태도가 누군가의 소외와 차별을 일으키지는 않았는지 아무렇지 않게 두었던 나의 태도를 다시 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이고 아직 사회에서의 힘이 없다는 이유로 또 다른 혐오와 차별을 받는 나로서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통찰을 했던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진실과 사실을 다시 구분하게 되었다. 사실은 진실이 아니고 진실은 사실이 될 수 없는 사회의 모순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회는 분명 잘못되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기만 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는 한마디에 그 뒤에 정말로 찾아야 할 진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을 놓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사회의 모습은 결국 사람, 우리들의 모습이다. 부끄럽지만 그것이 진실과 사실이 어긋나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저속한 물질주의는 이미 계급을 결정지었고, 편견은 인간에 대한 불신을 퍼뜨렸다. 부도덕한 권위는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았다. 이들은 모두 우리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파괴한다.

 

그러면서 저항은 없다. 우리는 이런 부조리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아왔기 때문이다. 진실이 소리치고 손짓해도 우리는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우리를 부르는 그 진실조차 참 거짓을 알 수 없다. 사실 엄밀히 말해 진실은 우리에게 닫혀 있는지도 모른다.

 

- 책 속 “나오며” 내용 일부

 

 

<질문하는 미술관>은 사회문제를 말하지만, 이는 결국 사람이 가진 문제다. 허투루 다뤄지는 것 없이 인문학과 실제 사건들을 통해 사회의 민낯을 낱낱이 파헤치는 과정은 정리되어 다시 우리에게 앞으로 어떤 사회를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물어본다. 나는 어떻게 이 사회를 살아갈 것인가, 또 나는 어떤 사회를 살아갈 것인가, 결국 모든 시작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불안하다는 사람, 무엇이 불안하냐는 사람을 막론하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모든 분께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그림 앞에서 나와 사회를 위한 통찰을 시작하기를 권하고 싶다. 그리고 <질문하는 미술관>은 그 시작에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책을 마무리하고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한 리뷰의 끝머리에서 필자는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하고 싶었다. 시간이 흐른 후에도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것인가. 몇백 년 전에 일어난 이야기를 지금도 반복하고 또 시간이 지난 후에도 반복할 것인가. 이제는 조금 더 다른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은 이들이 바라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사회는 불안하고 눈앞은 불투명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 없다면 우리는 사회와 나를 향해 질문하고 통찰하며 일어나야 할 것이다. 결국 '나'에게 달려있다.

 

아직 너무 먼 길이 남아 있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필자는 사회가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회가 버려두었던 부끄러움을 계속해서 원래 있던 자리로 데려와 진실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질문하는 미술관> 속 사회 문제들이 익숙한 것이 아닌 전혀 먼 이야기가 되기를, 다시 그림 앞에 섰을 때 찾고자 했던 것을 찾고 버리고자 했던 것을 버린 모습의 거울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도서 정보]

 

나와 사회를 통찰하는

인문예술 수업

 

"불안한 사회를

현명하게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

 

 

『질문하는 미술관』

-그림으로 보는 8가지 사회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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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만열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고산


출판사

앤길


쪽수

252쪽


정가

13,300원


발행일

2019년 11월 15일


도서분류

사회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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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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