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성별을 벗어난 개인으로 살아가길, 후회하는 자들 [연극]

글 입력 2019.12.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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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는 자들] 포스터.jpg

 


당신의 선택에 확신할 수 있어요?

 

Prologue.


사람을 살아가는 동안 해야 하는 선택은 무수하게 많다. 매번 만나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조금 더 나은 길을 찾아 걸어간다고 생각하지만, 가지 않은 길이 더 좋을지 어떨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가지 않은 길은 미지의 상태로 영원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확신을 갖고 할 수 있는 선택은 생각보다 많지 않기에 후회라는 감정도,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기획 의도

 

<후회하는 자들>은 트랜스젠더라는 특정 인물들을 통해 정체성에 대한 담론을 본격적으로 무대 위에 올린다. 극 중 주인공들은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났다. 미카엘은 1994년 50살의 늦은 나이에 성전환 수술을 거쳤고, 올란도는 1967년에 스웨덴 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한 후 여성의 삶을 살다가 다시 재수술해 현재 남성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08년, 이제 60대가 된 이들은 서로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후회’, ‘성 정체성’, ‘성적 재규정’과 관련된 주제를 마주하며 느낀 생각들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을 동시에 경험한 이들은 성전환 수술 후의 삶이 자신이 이전에 꿈꿔왔던 삶과 거리가 멀었다고 회상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상이하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 고군분투한 주인공들이 각자의 시간을 돌아볼 때 ‘무엇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삶 그 자체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 노동의 문제, 가족의 붕괴 등 성소수자를 대하는 사회의 면면과 그 속에 놓인 개인의 치열한 고민에 맞닿아 있다. 남성과 여성의 경계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소외된 올란도와 미카엘의 시간은 2019년 우리의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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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_이은경)

 
 

선택의 이유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개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의 범주에 ‘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성을 선택한 이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훨씬 많았다. 이 작품이 실제 두 트랜스젠더이자 트랜스젠더였던 사람들의 인터뷰를 다룬 것이기에 이야기는 너무나 생생했다.
 
사람은 부모와 자신의 성을 선택해 태어날 수 없다. 여성이 되길 원해서 여성으로, 남성이 되길 원해서 남성으로, 또 다른 성이 되길 원해서 제 3의 성을 갖고 태어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성에 따라 개인의 자아와 역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으며, 성과 자아가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는 잘 모르겠으나-자신이 갖고 태어난 성별과 자아의 정체성이 ‘일치’하지 않아 혼란을 느낀 두 인물의 아픔과 고통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사회가 정한 성 정체성과 성 역할 규제의 가장 큰 피해자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회하는 자들] 올란도(김용준 분) 과거 사진.jpg

 
 
극의 초반에서 올란도는 가난했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여성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 성 전환을 했다고 고백한다. 물론 그는 화려하게 화장하고 꾸미는 것을 좋아했고, 남성을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도 성 전환의 또 다른 이유라 말한다.

미카엘은 어린 시절 소극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이 싫었고 여장을 하는 것이 좋았으며, 예쁘게 치장한 모습에서 해방과 자유를 느껴 여성이 되었다고 말했다. 무엇 때문에 성을 바꾸길 원했으며 다시 남성으로 돌아가길 원하는가-에 대한 두 인물의 답이 가장 궁금했고 극의 중심이라 여겼음에도 나는 그 이유가 아이러니 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생계를 위해,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 선택한 수술이었지만 당시의 여권은 (스웨덴의 당시 상황은 잘 알지 못하지만) 지금보다 현저히 낮았을 것이며 여성으로서 해야 했던 말과 행동, 사회 생활에는 더한 사회적 규제가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이길 원했던 것은 남성으로서 느낀 사회적 억압과 성 역할 규제가 자신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데서 큰 고통을 느낀 까닭이라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두 인물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후회하는 자들] 미카엘(지춘성 분) 과거사진.jpg

 
 
 
'여성'스러운, '남성'스러운 사람들

 

또 하나 극을 보며 어려웠던 점은 ‘여성’스러운, ‘남성’스러운 이라는 표현이 대사에 계속 등장했다는 것이다.

성을 바꿔가면서 여성이 되고 싶었던 남성이기에 전통적인 여성스러움에 더욱 집착하고,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관습적인 남성스러움에 동경과 매력을 느끼는 것이었을 테지만-성별을 행동이나 말 앞에 붙여 ‘무엇’스럽다-라고 말하는 것이 개인을 얼마나 규제해왔는가를 생각하니 그 표현이 얼마나 이질적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이제는 다시 남성이 되길 원하는 인물이, 그 스스로 두 성의 경계에 서 있겠다고 말하는 올란도와 경계를 부정하는 미카엘이 하는 대사라고 보니 그렇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둘 또한 그 규제와 억압의 대상이자 피해자였으니 말이다.
 
 
 
성별을 벗어나 개인으로

 

결국 극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성별을 벗어나 개인이 자유롭게 사랑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스스로의 가치관을 영유하며 살아갈 권리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성을 가지고 있든 올란도와 미카엘은 남성이나 여성이기 전에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간의 교양 수업이나 어떤 책에서보다도 ‘모든 사람은 한 명의 인간이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가장 잘 와닿았던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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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의 존재가 미미해지고, 더 이상 성 관계를 맺거나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슬픈 미카엘과 그런 건 아무데도 필요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올란도의 입장은 조금 다르지만-그 둘이 누구보다도 아프게 겪었던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역할의 간극과 억압, 강요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결국, 성기가 없어도 자신이 원하는 성별일 수 있으며, 특정한 성별을 갖고 어떤 부류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도 당신은 괜찮다는 걸 두 인물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당신이 미카엘이고 올란도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마음껏 자신과 타인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건네고픈 마음이 꽤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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