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에게 맥주는 어른의 술이다 [사람]

글 입력 2019.12.1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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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스타그램 계정 프로필에는 딱 한 줄이 적혀 있다. ‘인생은 3B1C’.


책(Book), 맥주(Beer), 밴드음악(Band), 그리고 커피(Coffee)를 뜻하는 말로써 나의 뼈와 살과 피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와서 보니 더 깔끔하게 밴드를 콘서트(Concert)로 바꾸고 ‘2B2C’로 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한다. 무조건 밴드 공연만 보러 다니는 건 아니니까. 밴드든 콘서트든 간에 내가 질리지 않고 꾸준히 빠져 있으며 매일도 즐길 수 있을 법한 것들이 네 개나 있다니 이정도면 풍요로운 삶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네 가지 중에 내가 유일하게 글로써 다루지 않은 요소가 ‘맥주’라는 걸 최근 깨달았다. 더불어 겨울이면 절대 비워지지 않는 내 방의 테라스(냉동고가 따로 없다) 장롱에서 선택받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맥주 캔들을 떠올리니 이건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느꼈고 자연히 이번 글의 주제는 맥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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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좀 더 폭넓게 주(酒)류로 잡아도 되지 않았을까 싶지만 여기에는 나의 맥주에 대한 조금 더 유별난 사랑이 변수로 작용했다. 어릴 때부터 소주는 왠지 싫었고(풍미라곤 없는 취할 목적의 술이라고 느꼈다. 물론 지금의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와인이나 막걸리는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 되어 처음으로 맛보고 싶은 술은 오로지 맥주였다.

 

맥주에 대한 어린 나의 기억은 단편적이다. ‘먼나라 이웃나라’에 스테레오타입으로 등장했던 배 나온 독일 아저씨 손에 들린 커다란 500cc짜리 맥주잔, ‘걸어서 세계속으로’에서 비춰준 옥토버페스트의 풍경이나 기네스 양조장 등이 나에게 맥주의 이미지를 형성했던 것 같다. 다리를 꼬고 앉아 찔끔찔끔 홀짝이는 게 아니라 호쾌하게 때려붓는 술이라는 점, 그래도 거나하게 취하지는 않는 가벼운 술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랬던 나의 기대와 달리 수능이 끝나고 가족들과 함께 처음 맛봤던 맥주는 몹시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건 아사히 캔이었는데, 그 때의 좋지 못한 기억으로 인해 아사히에는 한동안 다시 도전하지 못했다. 아마 맥주 자체보다도 알루미늄 캔의 질감이 맥주를 더욱 쓰게 느끼도록 만들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 이후로도 몇 차례 더 도전한 맥주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미지의 힘은 얼마나 강력한가. 나는 꼭 ‘맥주를 들이켜는 호쾌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쓴맛을 보고도 맥주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던 나는 호가든을 맛보았을 때 드디어 맥주의 참맛을 느꼈다. 쓰지 않고 부드러운 뒷맛과 가득한 풍미! 그래, 이게 바로 내가 꿈꿨던 맥주의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호가든에 필적하는 맥주를 찾겠다는 핑계로 여러 종류의 수입 맥주를 번갈아 맛보아 왔고, 인생의 구성 요소로 맥주를 꼽는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은 그때처럼 호가든에 열광하지는 않지만 밀맥주의 부드러움이 땡길 때는 자주 찾는다. 나를 애맥가(?)로 만든 장본인임에 약간의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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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맥주보다 도수가 센 술도 종종 찾는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생기면서 질색하던 소주에도 맛을 들이고, 혼자 편의점에서 위스키를 사서 스트레이트로 혹은 잭코크로 만들어 마시기도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여전히 와인이나 막걸리와는 친해지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종류의 발효주와는 잘 맞지 않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렇게 다른 주류로 관심의 범위를 넓혀가는 와중에도 내 음주의 중심축에는 맥주가 건재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맥주가 내가 좋아하는 다른 세 가지 중 두 가지, 책이나 공연과도 훌륭한 궁합을 이루기 때문일 것이다. 공연을 보러 갈 계획이 없는(흔한 경우는 아니다) 느긋한 주말이나 평일 저녁에는 책맥(책+맥주)을 즐긴다. 지나치게 머리를 싸맬 필요 없는 가벼운 소설이나 에세이를 뒤적거리면서 맥주 한 잔을 즐길 때면 아직 치우지 못해 난장판인 내 방의 몰골이나 다음 날 출근의 괴로움 같은 건 잠시 잊을 수 있어 좋다.


스탠딩 공연을 불태우고 나서 지인들과 혹은 귀가한 방 안에서 라거 맥주를 들이킬 때의 시원함과 짜릿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렇듯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이 자기들끼리 화학 작용을 일으킬 때는 어떤 안주보다 훌륭한 페어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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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아무튼, 술> 중에서

 


뿐만 아니라, 맥주가 어른의 술임을 증명하는 순간들이 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빠가 누구보다 싫던 아이가 아빠와 대등하게 맥주잔을 부딪히고, 적당한 타이밍에 정지를 외칠 줄 아는 자식이 됐다는 점에서는 아주 약간 어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씁쓸한 술 맛 뒤에 숨겨진 어른들의 나약함을 실감했다고 할까.


술은 이렇게 많은 걸 가르쳐 주곤 한다. 맥주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맥주는 술이 아니라 물이다’라고 격하하는 주당들에게 소심하게 반대한다. 맥주는 멋진 어른의 술이다.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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