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노벨문학상 작품 읽기, '태고의 시간들' [도서]

글 입력 2019.12.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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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해 에세이와 논픽션 위주로 책을 읽었더니 문학적 감수성이 떨어졌다. 세계 문학 전집에 손을 안 댄 지 몇 달이나 되었다는 생각에 이번 연말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품들을 읽는 목표를 세웠다. 시작은 2019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인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태고의 시간들'. 여기서부터 역순으로 수상작들을 읽어나가면 의미 있지 않을까 싶다. 독후감을 통해 노벨 문학상만의 깊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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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태고가 마을 이름이란 걸 알았을 때는 너무 낯설었다. '태곳적'에나 쓰일 법한 음절이 한 마을의 이름이라니. 예슈코틀레, 게노베파등 입에 달라붙지 않는 이름이 첫 장부터 나와 초반에 집중하는 데 살짝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이름에 익숙해지면, 순식간에 읽힌다. 토카르추크 특유의 짧게 나뉘는 장과 깔끔한 문체 덕에 상상하고 빠져드는 데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태고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서사를 그린다. 폴란드의 작은 마을, 신이 지켜보고 천사가 아이들의 탄생과 함께하는 곳. 토카르추크는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을 번갈아 보여준다. 모든 인물은, 신도 천사도 성모도 동물도 같은 시공간 속에서 관찰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이 신화적 상상력은 예전에 읽은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떠오르게 한다. 땅에서 인간이 전쟁, 출산, 배신과 사랑 등 삶의 풍파를 겪는 동안 신은, 초현실적인 세계의 힘은 중간중간 삽입되어 그들과 함께 같은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태고 마을은 소박하고, 조금 덜 강렬하다. 대신 안젤리카의 꽃내음과 어머니의 모유에서 날 법한 포근한 젖 냄새가 나는 듯 부드럽다. 이 '태고의 시간들'이 유기적이고 더 안정되었다고 느낀 건 태고와 함께하는 신의 존재 때문이다. 이 신은 과격하지 않으며, 마을의 시간이 차곡차곡 포개어져 강물에 떠내려가는 걸 고요히 굽어본다. 그는 신이지만, 창조할 뿐 쥐고 흔들지 않는다. 신은 시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건 신마저도 손댈 수 없는, 근본적인 세계의 질서다. 그렇기 때문일까? 책 속 모든 장의 제목은 '시간들'이다. 하나의 인물이 지나고 있는 한순간. 행동과 느낌과 공간을 포괄하는 무자비하고 고요한 흐름. 마치 강처럼, 모든 오물과 아름다움을 속에 품고 태고의 강물은 끝없이 흐른다.

 

게노베파의 시간은 미시아의 시간으로, 미시아의 시간은 아델카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여자에서 여자로 이어지는 흐름. 딸은 딸을 낳고, 그들은 남자와 결혼해 수천 년간 이어진 세계에 다시 한 생명을 더한다. 토카르추크의 마을에서 여인들은 딸을 원한다.



'모두가 딸을 낳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텐데 말이지요.' p_13


 

신화적 상상력, 마을에 얽힌 삼대의 역사, 이런 기법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토카르추크의 이야기가 특별한 건 서사가 여성에 의해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을을 바라보는 시선, 인간을 연민하는 시선, 신이 하늘을 덮듯 세상을 덮는 그 시선은 전부 여성의 시선이다.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성은 예지의 힘이 있고 자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하늘과 땅에서 세상의 경계를 마주한다.

 

남성은 조연이다. 남성들은 씨를 뿌린다. 여성이 의지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들은 신을 볼 수 없고 그들의 세계는 태고를 위협한다. 남성들의 전쟁은 외부에서 들이닥쳐 태고의 여인들을 숲으로 쫓아낸다. 같은 마을에 살지언정 파베우와 우클레야에게는 신이 가 닿지 않는다.

 

남성들의 세계에 받아들여지기에는 살짝 모자란 이지도르만이 신에 대해 깊이 고뇌한다. 크워스카의 딸 루타가 그를 인도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의심하고, 잘 믿지 못하며,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태고에서 유일하게 신의 중력을 깨달은 남성이다. 신이 없다면 이 모든 게 공허하고 의미 없다는 것을.

 

반면에 여성들은, 의문을 품지 않는다. 어머니인 신이 존재함을 선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성 인물들의 시간은 충만하고 주술적이며 강렬하게 빛난다. 토카르추크의 세계가 여성성이 중심이라고 느끼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성들의 선택이다. 여자들은 몸을 팔고(크워스카), 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고(루타), 아버지에서 벗어나길 원하며(스타시아), 사랑에 빠지고(게노베파), 결혼을 원한다(미시아), 그들의 삶은 194-50년대 여느 폴란드 시골 마을에서 만날 수 있지만, 이 모두가 자기 자신의 무지와 열망에 기초해서 선택한 것이다. 남자들은 나타나지만, 힘없이 세계의 흐름에 휩쓸린다. 엘리는 죽고 스타시아의 남편은 떠나며 우클레야, 파베우도 선택이란 과정 없이 남성이라는 자아에 기대어 삶을 살아갈 뿐이다. 흠결 있는 이지도르만이 무언갈 갈망하면서도 얻지 못하고 끝없이 탐구하는 다락방 속 관찰자이다.

 

이지도르는 남성이지만, 여성의 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의문 없이 신의 존재에 젖어들 수 없다. 이 미완성인 영혼을 남자들의 자기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고, 여성들은 연민으로 보살핀다.

 

*

 

토카르추크의 신은 새롭다. 그녀의 세계관은 새롭다. 그건 무엇보다 변화야말로 세계의 질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신과, 신에게 연결된 생명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은 순간의 풍경이고 매 순간은 영원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번민하는 수많은 목숨이 있다. 성모는 이 무지하고 고통받는 인간을 축복한다. 그 축복을 얻느냐 마느냐는 인간 자신에게 달렸다. 신은 그저 축복을 건네고 그늘 속으로 사라진다. 그저 지켜보고, 변화가 일어나는 세상을 굽어살핀다. 세상은 당연히 변화한다고. 그것이 수순이기에 막지 않는다. 신은 그럴 힘도 없다. 시간을 막을 수 없다면 어떻게 변화를 막겠는가?

 

그건 방앗간이 없어지고 펜션이 생기며 루타가 엄마 품을 벗어나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사진기 앞에 서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은 왜 필요한 걸까? 신은 그곳에 서서 무엇을 하는 걸까? 에슈코틀레 성모상은 이 고통스러운 질문에 가만히 미소짓는다. 그녀는 축복을 원하는 자에게 축복을 준다. 거짓 없이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구원하지는 못할 순수한 축복. 창조한 자의 의무는 사랑하는 것뿐이다.


태고에는 성서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만,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천사들만이 있다. 신의 사자들. 전쟁에 망가지고 죽은 수많은 영혼이 흑강을 따라 행진할 때, 살아있는 영혼은 바라볼 뿐 따라갈 수 없다. 시간은 유유히 흐르니까. 사랑도 이름도 모두 죽는다. 살아남은 여자들은, 태고를 떠난다. 더 넓은 세상으로. 신과 '태곳적' 전설과 신화를 뒤에 남기고 배기가스와 함께 사라진다.

 

버섯의 소리를 듣는 크워스카가 숲을 걸어 다니고 털이 수북한 나쁜 사람이 종종 나타나는 오래된 마을이 폴란드 어느 구석에 있다. 그곳의 신은 인간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저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낮고 깊은 연민으로 지켜볼 뿐이다. 한 늙은 남자가 게임의 주사위를 돌리는 것을, 고통받고 시들어 가는 삶을, 무지하기에 용기 있는 선택을, 그 모든 간절함이 강물에 스며들어 그녀가 모르는 다른 세상으로 스며들어 뻗어 나가는 풍경을.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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