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끄럽고, 찌질하고, 슬픈 대도시의 사랑법 [도서]

글 입력 2019.12.04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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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주는 일이 쉬워졌다. 하지만 그만큼 보이기 싫은 모습을 감추는 일도 쉬워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타인에게 보여지고 싶은 만큼의 나만 드러내는 게 익숙해졌다.

 

멋지고 예쁘고 반짝거리는 순간들만 SNS에 기록하고, 부끄럽고, 찌질하고, 슬픈 순간들은 기억의 저 편으로 밀어 놓는다.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못난 나를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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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내가 기억의 저 편으로 밀어 놓았던 부끄럽고, 찌질하고, 슬픈 순간들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하는 책이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연작소설로, 총 4개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이 4개의 이야기들은 모두 솔직하다.

 

허구를 다루는 소설에서 솔직하다는 표현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책에서는 조금은 불편하고 조심스러울 수 있는 이야기들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첫번째 소설인 「재희」에서는 여성의 임신중단 이야기, 두 번째 소설인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는 디나이얼 게이와 호모포비아인 어머니의 이야기가, 세번째 네번째 소설인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는 에이즈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소재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게이라는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화자가 이야기를 서술함에 따라 그들의 문화부터 성적인 묘사까지 책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런 소재를 다루며 펼쳐나가는 이야기 또한 솔직하다. 자존심도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림 받은 이야기, 아픈 엄마에게 서운했던 이야기, 헤어진 연인에 대한 미련 등. 이 책은 평소의 내가 기억 저 편으로 밀어 놓곤 하는, ‘찌질하고, 부끄럽고, 슬픈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때문에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의 경험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도 종종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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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책은 마냥 찌질하고, 부끄럽고, 슬픈 순간들에만 머물지 않는다. 첫번째 소설인 「재희」에서 화자는 재희를 임신중단을 겪은 여성보다 자신과 마음이 정말 잘 통했던 친구로 그려낸다.

 

두 번째 소설인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에서도 화자는 자신의 연인과 어머니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수용받지 못하지만, 수용 받지 못한 상태와 그 상처에 머물지 않고 그 상황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세번째와 네 번째 소설인 에서도 화자는 자신의 에이즈를 ‘카일리’라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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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나의 못난 모습들에 솔직하지 못했던 건 그 기억들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난 나를 나조차도 인정하지 못하며 기억의 저 편에 밀어두는 동안, 나의 일부는 냉장고 한 구석에서 썩어가는 미처 못 먹은 양배추 덩어리처럼 쿰쿰하게 썩어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이 책의 화자처럼 솔직하지는 못하더라도 가끔씩은 내 마음의 문을 열어봐야겠다. 가끔은 푸릇함이 남아 있는 마음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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