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멈춰진 시간으로 돌아가자, "9월"

글 입력 2019.12.0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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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보러 다닐 때마다, 소극장의 매력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다양한 연출에 있다고 생각한다. 2, 3층까지 있는 대극장이 아닌 작은 공간에서는 배우들이 일인 다역을 맡거나 생각지도 못한 연출 방식, 노래나 춤 등 관객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들이 개성적이고 재미있다. 적은 제작비 덕에 외관에 의지하기 힘든 이상 배우들의 재치나 역량이 돋보이는데, 그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번  연극 <9월>도 그런 참신함이 즐거운 공연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귤 두 개. 공연 중간에 배우들이 주섬주섬 상자에서 귤을 꺼내 관객들에게 나눠주는데 종일 밥을 굶고 갔던 나는 감격에 겨워 두 손으로 받았다.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줘서 눈물을 훔치며 먹었다.

 

대부분 연극 공연은 음식물 반입이 안 되는데, 과일과 함께 배우들 연기를 보는 건 정말 행복하고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런 예측할 수 없음이 소극장 작품들을 보는 맛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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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열기에 바람이 지나듯,

올해도 9월이 지난다.

풍경도 계절도 거짓말처럼 모두 다.

 

우리의 거시사는 끊임없이 단순하게 정의되고 바뀌지만, 나의 미시사는 여전히 거칠고 답답하다. 역사와 뉴스는 계절처럼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자꾸 변해만 가고, 그 속의 나는 그저 또 매일을 살아낸다.

 

말할 상대가 필요해요.

난 어때요?

비밀, 지켜줄 수 있어요?

그럼요.

어떤 것도?

 

2019년 9월,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려 이곳에 모였습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나요?

 

 

무대는 하얗고 깔끔한 공간이다. 의자가 등을 맞대고 놓여 있는데 지정 좌석이 아니라 편한 곳에 가 앉으면 된다.  의자들이 동그랗게 놓여있어서 과연 배우들의 연기를 제일 잘 볼 수 있는 곳이 어딜까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공연이 시작하면 배우와 관객이 함께 원 모양으로 좌석을 재배치한다.

 

조용필의 '어제 오늘 그리고'가 뚱따단 하는 리듬과 함께 시작하고 여섯 명의 배우가 노래를 부른다. 등을 맞대고 어리둥절하고 있던 관객은 곧 배우와 함께 원 모양으로 둘러앉는다. 관객 사이사이에 배우들이 함께 앉는다. 심리 상담 그룹에서 볼 법한 구조라 긴장되면서도 궁금하다.

 

이야기는 오래된 사진관을 드나들던 인물들의 사연으로 시작한다. 바람을 피우던 남편, 그 내연녀와 친한 본처, 살인사건과 형사, 친딸과 수양딸, 출생의 비밀 등 8~90년대풍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풀어진다.

 

오직 대사만으로 이십여 년 전 상황(살인 사건, 경찰서 취조 현장) 등을 구현해야 하므로 관객 입장에서는 흐름을 빠르게 따라잡기 힘들다. 한 배우가 서너 명의 역할을 해서 헷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서 초반에 더 집중하다 보니 연극의 내용에 몰입하기 좋다.

 

이들의 비밀은 숨겨진 가족사다. 엄마가 떠나고, 내 엄마가 과연 진짜 엄마인가. 내 아버지는 누구일까.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세월의 먼지 더께를 벗겨내듯 천천히 드러난다. 그 소재는 자극적이고 (불륜, 살인, 성희롱 등) 어둡다.

 

이 복잡한 가족사는 양파 껍질 벗기듯 하나씩 하나씩 진실이 밝혀지기 때문에 한 줄의 줄거리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저 흥미롭고 강렬하며 8~90년대의 시대상이 느껴지는 사연이라고만 하고 싶다. 하지만 중간중간 등장하는 통일이라는 소재가 뜬금없다. 늙은 (양) 아버지는 매일같이 통일되면 서울로 뜰 것이라 얘기하는데, 이 인물의 퇴락하고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여주는 도구 중 하나로 통일이 쓰인다. 공연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또 통일을 염원하는 경우를) 접한 적이 많지 않아 생소하기도 했다. 마지막 결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위원장이 종전 협정에 서명했다는 소식과 함께 통일 소식을 배우가 쩌렁쩌렁 알린다. 동시에 출소 후 이십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선희는 옛날 형사 부녀를 만나 하룻밤 묵고 우연히 자신의 딸 혜리와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는다.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한 채 데면데면한 인사를 한다.

 

관객들 모두가 이 두 사람이 (선희와 혜리) 서로를 잃고 보냈던 세월의 고통을 알고 난 뒤라 그 장면은 애틋하다. 분위기는 숙연해지고 둘러앉은 관객들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이쯤에서 조용필 '어제오늘 그리고'를 잇는 두 번째 노래가 나온다. 무반주로 배우들이 한 파트씩 돌아가며 부르는 정경화의 '나에게로의 초대'다. 내가 참 좋아하는 노래라 감미롭게 들었다.

 

90분이라는 짧은 공연 시간 동안 나는 적당히 몰입하고 노래를 감상하며, 귤도 까먹었다. 콧잔등에 배우들의 땀방울이 맺힌 것까지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열연하는 걸 본 것만으로 재밌었다. 하지만 내용적인 면에서 참신함이나 깊이를 발견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나는 아주 가까이에서 그들 이야기를 듣는 데 집중하느라 한 뼘 뒤에서 각본상의 구성이나 흐름을 판단할 만한 거리가 부족했다. <9월> 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비밀이 살금살금 밝혀지는 걸 보는 것처럼 흥미롭지만 이렇게 공연이 코앞에서 벌어질 때 관객은 관람보다는 구경한다는 느낌을 받기 쉽다.

 

이번에도 나는 어김없이 그 함정에 빠졌다. 귤껍질을 손에 쥐고 극장을 나와 입김을 후 뱉었다. 연극을 충분히 관람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배우들이 무대를 활보하는 모습이 너무 커서, 한 서사 속 인물들로 축소하기 어렵다. 한 작품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려면 꼭 필요한 일인데 말이다.

 

내용은 살짝 퇴색한 분위기지만 구식 서사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선희와 영주, 혜리와 리아로 이어지는 연대기는 여성들의 신산한 삶과 욕망, 고통 등을 충실히 조명한다. 내가 아쉬운 건 공연이 너무 짧게 끝났다는 아쉬움이 아닌가 싶다. 더 깊이 들어가고, 더 많은 배우가 등장해 다각도의 작품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

 

오래전 떠나온 마을로 되돌아가는 9월, 연극 <9월>의 여운은 조용필의 노래 가사에 기대고 싶다.

 

*

 

바람처럼 멀리 사라져 갈 인생길

우린 어떤 사랑을 했나?

텅 빈 가슴 속에 채울 것을 찾아

우리는 정처 없이 떠나가고 있구나

그대 방황하는 사람아 우리 모두 같이 떠나가고 있구나

 

끝없이 시작된 방랑 속에서 어제도 오늘도 

나는 울었네

 

우리가 찾은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버린 것은 무엇인가

 남은 것은 무엇인가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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