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 연희,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 "딴소리 판"을 보고

현장성과 비판 정신으로 살아남을, 우리의 것
글 입력 2019.12.0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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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러가기 전, 동행자와 공연에 기대하는 정도에 관해 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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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연극같은 게 더 익숙한 것 같아요"

    

"저도 그래요"

 

 

필자는 사실 국문학 전공자다. 그래서 판소리나 탈놀이에 관해 일반 독자들보다 조금 더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 신재효라는 사람이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여 지금까지 남았다는 것은 아직도 필자의 머리께에 은은히 남아있는 대학교 등록금의 흔적이다.

 

하지만 그런 필자에게도 연희극이나 판소리와 탈놀이는 그다지 익숙치 않은 문화생활이라는 것이다.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의 한국인들에게 우리 연희가 큰 비중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남산 국악당을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판소리나 탈놀이에 흥미를 갖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죽어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본래 우리의 연희에 관심이 없는 한국인들에게 그곳으로의 발걸음이 무거울 것을 알기에, 판소리와 탈놀이의 전반적인 매력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또 <딴소리 판>으로 제시받은 앞으로 우리 연희의 긍정적인 미래에 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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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출판사, 겨레 전통 도감 <탈춤> 중

 

 

앞서 짧게 말한 죽어있는 텍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아야 할 것 같다. 판소리와 탈놀이의 죽음은 교과서와 언어의 한계점에서 기인한다.

 

 

1.

먼저 시험지 위의 판소리와 탈놀이는 죽어있다. 두 양식의 당대를 반영하는 시의적 감정, 유쾌한 은유를 무기로 든 레지스탕스와 같은 돌진적 면모가 교과서에는 '당대 서민들의 신분 상승 욕구나 사회 비판 의식이 잘 드러나있다'는 무미건조한 말로 정리되어 있다.

 

정격을 추구하는 교육자들에 의해 대한 민국 의무교육을 지난 사람들은 탈놀이와 판소리를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 현장감이라던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보던 우리의 연희는 말뚝이의 역할과 의미, 의의 등으로 재단되어 우리 전통 특유의 예술양식이긴 한데, 관심은 가지 않는 것으로 전락해버렸다.

 

 

2.

언어의 한계점은, 말은 활자로 적히는 순간 죽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자의 세계'에서 발화하는 순간의 발화자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빠르기와 성량에 의해 좌우되는 말의 의미는 사라지기가 쉽다. 연희극에서도 그렇다. 탈놀이 공연장을 누비며 이리저리 재기발랄하게 나다니는 말뚝이와 그의 말은, 종이에 적히는 순간 그 가치를 반 좀 더 넘게 잃어버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들로 우리는 판소리와 탈놀이가 죽어가는 우리의 연희인줄 알았던 것이다. 죽은 텍스트를 통해서만, 그들을 접했기에! 하지만 보고 접하고 느끼고 온 우리의 연희는 아직 팔딱 팔딱 살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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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거지 그런거지. 인생사 다 그런 거지!'

 

 


현장성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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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의 목소리는 공기를 뚫고 달려온다. 탈놀이 거지패가 몸을 흔들며 리듬을 타면, 을지로 어딘가의 힙이 둥실둥실 무대를 채운다. 웃긴 대목에서 관객들은 와작각각 웃어제끼고 젊은 세대들과 기성 세대들은 함께 된다. 박수가 나와야 하는 대목에서 소리꾼은 '아 이쯤되면 박수가 한 번 나와줘야 하는디!'하고 넉살을 떨고, 관객들은 아차차 박수를 친다.

 

판소리와 탈놀이는 분명 지금의 주류인 연극이나 뮤지컬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즘에 이 연희들이 설 곳이 없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분명 설 자리를 만들 수 있고, 한 번 자리를 얻는다면 판소리와 탈놀이는 자신들의 저력을 뽐낼 수 있을만큼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 주류의 연극이 갖지 못하는 '관객의 생명력'이, 한국의 연희에는 있다. 즉, 제 4의 벽(연극에서 객석을 향한 가상의 벽)은 한국의 연희에는 없는 것이고, 없을 것이다. 박수와 웃음소리, 그리고 가끔 연희자의 손에 이끌려 무대로 올라가기도 하며 자신들이 더해 나가는 연희의 재미와 완성도에서, 관객들은 분명 자신의 생명력과 온전한 자리를 느낄 것이다.

 

 

 

비판 정신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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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할 수도 있다. 판소리와 탈놀이는 정말 '교과서'에나 어울리는 옛날 고릿적의 스토리는 아닌가? 인당수에 빠져죽는 효녀나, 잔인한 벌을 받으면서 절개를 지키는 열녀의 모습이 정말 요즘의 시대에 어울린다는 말인가? 현시점에서옛날의 사상들에는 문제점이 있고, 지금에는 적용되지 않는 교훈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딴소리 판>은 탈놀이와 판소리를 섞으며 현대에서 판소리가 낼 수 있는 목소리의 판을 확장시킨듯 보인다.

 

<딴소리 판>에서 거지패들은 자유분방함으로, '심청가'로 들어가 심청황후와 심봉사가 만나야하는 연희장으로 들어가 '효도'의 부질없음을 노래한다. '적벽가'에서, 대의와 명분을 말하는 상대방에게는 택도 없는 엉망진법을 가르친다. '수궁가'에서는 거지패 자신들을 하대하는 별주부를 골탕먹이기 위해, 고추를 잘라 약에 넣어야 한다고 용왕에게 가짜 약을 판다. '흥보가'에서는 박을 타는 것만으로 대박을 바라는 흥보에게 소원을 들어주기만 하며 좌절을 선물한다. 마지막으로 '춘향가'에서 춘향이는 이런 거지패들의 이야기를 듣고 몽룡과 헤어지고 자신의 길을 가기로 다짐한다.

 

많은 것이 변했으며, 그때는 맞았던 것이 지금은 틀릴 수도 있음을 그러니까 지금은 새로운 길을 받아들일 때임을 소리꾼과 거지패들, <딴소리 판>은 전한다. 지금도 우리의 옛날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현대에 자신의 몸을 알맞게 맞추어 넣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새로운 저항 정신과 비판 정신을 발전시키고 판소리와 탈놀이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 고민의 흔적은 소용 없지 않았고, 오히려 전통의 목소리가 들려주는 요즈음의 '가치관'은 새롭고 감동적이다.

 

 

 

그래서...



판소리와 탈놀이가 앞으로 재미있는 볼거리, 공연예술이 될 수 있을 가능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현장성과 비판 정신. 세상에는 아직 바꿀 점과 그래서 비판할만한 것이 많고 또 해학적인 은유의 레지스탕스는 아직 설 곳이 있다. 또 고전텍스트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춘향이, 심청이, 흥보, 토끼, 별주부 등은 활용할 가능성과 가치가 있다. 친근함은 그만큼의 힘을 가지니까. 요즈음의 많은 이들이 우리의 전통 연희를 주저없이 즐기게 될 날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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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쑤, 그럼 안녕히!"

 

 



[손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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