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벌레 생산과 제거의 시대 [문화 전반]

영화 <기생충>, 소설 <변신>과 <벌레>
글 입력 2019.11.25 13:5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벌레의 탄생


 

인간이 벌레를 보았을 때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죽이거나, 잡아서 다른 곳으로 치우거나, 그것이 없는 다른 공간으로 피한다. 이 세 가지를 행하는 인간의 심리는 제각기 다르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벌레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벌레 제거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왜 벌레를 죽이는가’에 대한 고찰 없이 ‘벌레는 죽여야 한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이를 위한 약품, 기계와 같은 상품이 생산될 뿐만 아니라 전문 회사가 설립되고 유지되는 것을 보면 이제 너무나 당연한 명제로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벌레를 죽이며 산다.

 

그리고 벌레를 탄생시키고 싶어 하는 것도 인간이다. 진지충, 선비충, 맘충 등 사람의 특성 뒤에 ‘-충’을 붙이는 현상이 이를 말해준다. 단어 자체는 인터넷을 타고 새롭게 등장하였지만, 그 이면의 관념은 익숙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공존하지 않았으면,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바라는 것. 낯설지 않은 혐오가 역사와 실생활에서 이루어져 왔고 이루어지고 있다.

 

 

KakaoTalk_20191125_134844356.jpg

 

 

 

기생충, 변신, 벌레


 

이를 가장 최근에 다룬 화제의 영화가 바로 <기생충>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반전 있는 서사로도 주목을 받았지만, 인간과 벌레의 유사점을 시각적으로 드러내 관객에게 충격을 주었다.

 

기택이 박사장 집 거실의 테이블에서 기어 나올 때. 기정, 기우, 기택이 박사장 집을 빠져나와 하수구 같은 터널을 걸어갈 때. 홍수 피해로 체육관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틈에 끼여서 잘 때. 영화는 많은 순간에서 인간과 벌레의 경계를 무너트렸고, 벌레를 탄생시키는 동시에 죽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기생충>이 처음은 아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1916)과 오수연의 <벌레>(1997)는 두 생명체의 경계에 직접적이고 초현실주의적으로 다가간다.

 

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은 직물회사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로, 소설은 그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어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적성과 흥미도 없고 존중받지 못했지만, 열심히 일했던 회사로부터는 자연스럽게 해고 통보를 받았고 가족들은 그를 점점 짐으로 여긴다. 결국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입힌 상처와 창고로 변해버린 자신의 방에서 얻은 병으로 인해 죽고 만다. <변신>이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여 벌레가 된 이후가 주요 내용이라면 <벌레>는 여성 주인공이 벌레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나’는 온갖 종류의 벌레가 몰려드는 아파트 1층에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집값이 떨어질까 항의하지 못하고 손으로, 약으로 죽이며 참아낼 뿐이다. 남편은 ‘사람답게 살자’며 아이를 낳고 싶어 하며, 주인공은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대립하다가 싸움(가위바위보)에서 졌다. ‘나’는 피부병으로 인해 병원에 가지만 의사는 그의 전공인 피부 박피 수술을 할 필요 없이 연고만 바르면 되는 ‘나’의 병에 관심이 없다.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 주인공은 ‘다른 성인들은 모조리 아는 사랑의 비밀’을 깨우친 후 남편을 위해 변하기로 결심하고 피부 박피 수술을 예약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벌레를 치우다가 나방으로 변해 알을 낳고, 이를 본 남편이 ‘우리 이제야말로 사람답게 살게 되었다’며 주인공을 껴안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KakaoTalk_20191125_135125948.jpg

 

 

 

벌레의 굴레


 

그레고르와 ‘나’는 다른 동물이나 식물도 아닌, 벌레라는 존재로 변화하였다. 인간이 아무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 그 외형은 혐오감을 일으키며, 비위생적인 곳에서 태어난다는 특성 외에도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피해만 끼치는 존재.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지 않는 가족들을 혼자 책임지던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자 외면당했던 것은 징그러운 외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는 돈을 벌어올 수 없다는 요인이 컸다. 이처럼 그레고르는 가장(남성)으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하게 되었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반면 <벌레>의 주인공은 여성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벌레가 되었다. 남편의 친구 아내도 알고, 다른 아내들도 다 아는데 ‘나’만 몰랐던 사랑의 비밀을 피부 박피술을 받는 여성들을 보고 깨닫는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소외시키던 <변신>의 가족들과 달리 나방이 되어 알을 낳는 주인공을 보고 남편은 기뻐한다.

 

가족에게 의무를 다할 수 없는 벌레가 되자 소외된 그레고르와 벌레가 되어야 의무를 다하고 남편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나’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레고르는 회사를 다니며 가족을 부양할 때도 집에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 소외되었었다. ‘나’는 벌레가 되기 이전에 의무를 받아들이지 못해 소외당하였다면 벌레가 되고 나서는 자기소외의 문제에 빠진다.

 

그래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배제되어야 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살해당해야 하는 벌레의 굴레는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나아가 우리는 누구를 벌레로 만들고 죽이고 있는가, 누가 우리를 벌레로 만드는가?

 

 

 

에디터명함.jpg

 

 

[안루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