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럼프] 0. 다시 빈 화면 앞에 앉기 위해

글 입력 2019.11.15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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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이미지 2차 가공 

 

 


 

글;럼프

(글 + slump)


0. 다시 빈 화면 앞에 앉기 위해

 


 

 

이곳은 빈 화면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글의 첫 문장이다.


지금껏 읽었던 작법서와 인터넷 토막글에선 대개 이런 비법을 전수해주었다. “첫 문장이 중요하다. 첫 문장이 모든 걸 결정한다." 네 글의 인상은 첫 문장이 좌우할 것이고, 첫 문장은 마저 읽을 독자와 '뒤로 가기'를 누를 독자를 가려줄 것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내게도 첫 문장에 반해버린 글이 있고, 내 글만 봐도 첫 문장을 잘 쓴 글이 뒤마저 좋았으므로.

 

그런데 문제는 그걸 의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모를 땐 정말 모르고 썼는데, 이젠 그게 안 된다. 비법이라더니 페르세포네가 먹은 석류알이라도 되는 걸까.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던 나는 그 이후로 오랫동안 빈 화면을 견뎌야 했다. 늦잠 잔 취준생을 건너다보는 엄마의 눈길처럼, 빈 화면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으로 나를 괴롭혔다. 정확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나를 괴롭혔다. 커서만 깜빡, 깜빡. 시간은 째깍, 째깍. 아무 이야깃거리 없이 펼쳐진 빈 화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한숨, 하아아. 마감 약속이 있는 글이라면, (그리고 그 마감이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왔다면) 이 하얀 화면은 여느 심령사진보다 무섭게 느껴졌다. 아이디어가 있는 글이면 문장이 안 떠올라 답답하고, 그마저도 없는 글이라면 막막 그 자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 할지, 그래서 결국 무얼 써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아직도.


정확히 언제부터 글을 쓴진 모르겠지만, 공개적인 글을 쓴지는 10년 정도 되었다. 포트폴리오에 넣을 만한 글을 쓴 건 햇수로 4~5년 정도 된 것 같다(이 외의 글은 기업 인사팀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작정이다. 평생 나만 꺼내 봐야지). 지금은 사라지고 없을 어느 인터넷 공간에서 시작해, 블로그도 짧게 운영했었고, 결국은 여차저차 하다가 매체에 발을 들여 “기자님”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다시 회사에 들어간다면 경력 0년부터 시작하겠지만, 비공식적 추산으로 따지면 나는 10년간 빈 화면을 마주해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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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림잡아 10년이 된 올해, 나는 처음으로 글쓰기를 그만두겠다고 다짐했다. 잦은 마감과 글 완성도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였다. 빈 화면이 싫고, 첫 문장에 머리 싸매는 것도 싫고, 그렇게 만들어진 글도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서류 탈락의 고배를 마시면서 글을 써온 게 현실적으론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1MB도 안 되는 결과물에 쩔쩔매는 게 덧없이 느껴지곤 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생각보다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세상은 넓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정말이지 너무 많았다. 그렇다. 올해 6월에 시작해, 지금도 겪고 있는 이건 ‘글구려병’, 다시 말해 ‘글 슬럼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자신감의 하단이자, “다 관둔다”는 ‘그래서’와 “다시 써본다”는 ‘그럼에도’, 두 선택지 사이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내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짐작했을 것이다. 긴 글을 시작하는 사람이 "그래서 다 관둔다"를 선택했을리는 만무하니 말이다. 이 글은 ‘그럼에도’ 글을 다시 쓰기 위한 글이다. ‘글 슬럼프’를 기록하기 위한 에세이다. 글을 쓴지 10년,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 사이에 있는 누구의 ‘슬럼프 극복기’ 정도라고 정리할까? 개인적으론 패배주의와 지나친 자기연민까지 가지 않기 위한 하나의 처방이기도 하다. 다시 글을 쓰는 게 좋아지는 날을 위해, 글 쓰고 있는 지금의 나를 기록하기. 혹여 이런 독자들이 있다면 조금은 공감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흰 화면 앞에서 막막해지는 사람, 첫 문장을 쓰기 두려운 사람, 그렇게 쓴 글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 그들에게 처방전이나 해결책이 되어주진 못하겠지만, "나도 그래요" 정도의 메시지는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걸어본다.


그래서 시작한다. 이 글의 첫 문장을 기억하시는지? “이곳은 빈 화면이었다.” 빈 화면을 깨고 겨우 쓴 문장이지만, 빈 화면을 깼다는 사실밖에 전하지 못하는 문장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결국, 빈 화면은 9음절로 채워졌다. 지독한 '글럼프'를 겪고 있는 나는 그럼에도 글을 쓴다는 쪽으로 한 발을 떼었고, 그렇게 첫 문장을 쓰고, 첫 글을 썼다. 글을 읽고 싶게 하는 첫 문장이었을까? 괜찮은 첫 글이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글쎄다. 나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이러나저러나 분명한 건 다시 또 처음에 섰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빈 화면 앞에 앉는다. 약간의 설렘과 함께 두려움과 공포와 막막함의 온상을 마주하기. 이제 다시, 시작이다.

 

 

[김온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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