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나간 봄의 단상 [여행]

다시 찾아올 봄을 기다리며
글 입력 2019.11.1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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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진 날씨 속에서

지난 봄을 기억하며,

따듯한 봄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오늘의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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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하늘에 미세먼지가 낀 날이 수없이 많았다. 올봄의 시작을 맞이해 준 것은 맑은 햇살이 아니라 희뿌연 하늘이었다. 봄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없게 하는 색깔이 하늘을 꽤 오래 뒤덮었다. 무채색 하늘의 하루하루가 지나고 간만에 푸른색이 하늘에서 보였다. 하늘의 가장자리는 잿빛이었지만, 꽤 푸르른 하늘이 내 머리 위에 놓였다. 삼월의 마지막 주 수요일이다.

 

연립 주택 단지에는 나무가 상당히 많다. 소나무, 감나무, 단풍나무 같은 나무들이 주차장과 찻길을 둘러싸고 있다. 그 중에서도 목련나무가 가장 눈에 띈다. 우리 동(棟) 건물의 벽면에 목련 네 그루가 옹기종기 붙어 나란히 서 있다. 나무들은 키가 건물 이층 높이 정도 되는데, 이층짜리 주공연립 건물 바로 옆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래쪽에 있는 꽃들은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해 아직 꽃봉오리가 덜 자랐다. 그래서 아직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나무들의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꽃봉오리가 더 큰 편이다.

 

물론 대체적으로 위쪽에 있는 꽃봉오리가 많이 자라기는 했지만 가지마다 나무마다 꽃이 성장한 정도는 차이가 많이 난다. 꽃봉오리가 많이 성장해 새하얀 것도 있고 푸른빛이 채 가시지 않은 꽃망울만 맺혀있는 경우도 있다. 비슷한 양의 햇살을 받고 같은 토양에서 양분을 얻었는데도 제각기의 속도로 봄을 지내고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꽃이 덜 자란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동네는 꽃이 늦게 피는 편이다. 며칠 전 남현동에서 본 목련 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그게 나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었다. 그 동네에서는 목련이 이미 꽃의 생애에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가장 활짝 핀 꽃은 조금이라도 있으면 바로 꽃잎을 떨굴 것처럼 보였다.

 

잎보다 꽃이 먼저 나는 식물들의 꽃은 ‘꽃망울, 꽃봉오리, 개화, 낙화’의 과정을 거친다. 이것이 일반적인 봄꽃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의 종류에 따라 아름다움은 서로 다른 과정에서 극대화된다. 예를 들어 벚꽃 같은 경우는 ‘낙화’의 과정을 거칠 때 가장 아름답다. 꽃망울이 맺히고 꽃봉오리가 자라는 과정에서 벚꽃은 눈에 띄는 특징이 없다.

 

꽃이 피기 전까지 천천히 성숙해 가다가 때가 되면 개화하는 동시에 떨어진다. 긴 인내 끝에 성숙한 사랑을 산들바람에 날려 보내며 벚꽃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한다. 이와 같은 ‘벚꽃류’의 꽃에는 복사꽃과 배꽃이 있다. 한편 ‘개화’한 순간을 유지할 때 가장 아름다운 꽃도 있다. 동백꽃은 꽃망울과 꽃봉오리일 때 오므리고 있던 꽃잎을 활짝 펴서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오래 뽐낸다. 긴 결혼 준비 끝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되는 신부처럼 주어진 시간 동안 꽃잎이며 수술, 암술을 전면에 내보인다. 곧 결혼식의 시간은 끝나고, 순식간에 꽃잎을 떨구며 일생을 마무리한다. 이러한 ‘동백꽃류’에는 개나리와 진달래가 속한다.

 

가장 전형적인 봄꽃인 ‘벚꽃류’와 ‘동백꽃류’의 꽃들과 달리, 목련은 ‘꽃봉오리’ 상태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거의 유일한 꽃이다. 꽃이 아직 피지 않았을 때가 활짝 피었을 때보다 더 아름답다는 점에서 다른 봄꽃과는 완전히 다르다. 목련의 작은 초록색 꽃망울은 푸른빛을 벗고 꽃봉오리로 성장한다. 유선형의 하얀 꽃봉오리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있는 모습은 우아하고 고귀하다.

 

하지만 ‘개화’의 시기에 돌입하면 꽃잎이 서서히 꽃봉오리의 중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서 꽃의 윤곽은 지저분해진다. 한때 하늘을 찌르던 우아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꽃잎은 말라비틀어져 바깥쪽으로 꺾이기 시작하고 모양은 철저히 망가진다. 꽃은 아파하며 벌어지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꽃잎 하나하나가 힘을 잃으면 우아함에 감싸여 있던 치부를 드러내듯 축 처진 수술과 암술이 드러난다. 곡선미를 자랑하는 커다랗고 하얀 꽃잎에 비해, 수술과 암술은 제 머리도 가누지 못하여 흔들리며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결국 치부를 드러낸 목련꽃은 이제는 사랑받을 수 있는 모습이 아니고, 자신의 속을 감추어준 커다란 꽃잎들을 힘겹게 툭툭 떨구게 된다. 그래서 목련은 여느 꽃들과는 다르다. 목련은 고귀함을 타고나지만, 그 안의 고통과 한을 내보이며 비장하게 생애를 마치는 비운의 꽃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 한 명이 목련 꽃이 싫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하얗던 꽃잎이 땅에 떨어져 갈변하고, 그런 꽃잎들이 쌓여서 길이 지저분해진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마지막이 아름다운 꽃들은 알록달록한 색깔 때문에 바람에 날려 땅에 떨어져도 인간이 다니는 길을 찬란하게 수놓는다. 그런 꽃들과 비교하면 목련꽃의 ‘낙화’는 누추하기 짝이 없다. 색깔도 더럽고 꽃잎도 사람들 발길에 걸리적거리는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꽃봉오리’ 단계가 지난 목련에게는 추한 모습을 보이는 일만이 남아 있다.

 

우리 동네의 목련은 전성기를 앞두고 있고, 남현동의 목련은 이제 전성기가 지났다. 남현동에서는 하얀 꽃잎들이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고, 추잡한 모습을 보이는 일만을 남겨두고 있다. 우리 동네의 목련들도 곧 같은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다만 나는 매 순간 목련의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전성기를 앞두고 하늘을 찌르는 최고의 우아함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목련꽃의 모습은 매 순간 유일하다. 오늘의 꽃은 내일보다 미성숙하고, 며칠 후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하게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각각의 꽃망울과 꽃봉오리는 봄꽃의 일생을 마치기 위해 성실히 스스로의 속도로 움직인다. 그 과정에서 하루하루 네 그루 나무에 분포된 꽃들은 달라질 것이고, 하루하루의 분포는 다시는 재현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보이는 목련은 다시 볼 수 없는 소중한 모습이다.

 

 

 

나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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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단지를 빠져 나오면 넓은 인도가 있다. 이 넓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아직 낙엽을 떨구지 못한 참나무 십수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특이하게도 가을에 채 떨어뜨리지 못한 마른 잎이 아직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회갈색의 창백한 나뭇잎들은 나무에 매달려 있지만 축 처져 있다. 이런 나무들은 신록(新綠)의 푸른 기운을 안겨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바짝 마른 잎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그러면서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나무들이 낙엽을 떨구는 가을에도 채 떨어지지 못하고, 그 추운 겨울에도 용케 나무에 붙어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봄바람이 분다고 해서 쉽게 떨어질 잎은 아니다. 이 잎들이 부딪히는 소리는 마음을 안정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아침의 참새 소리와 밝은 햇살과 어울려 각박한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짤막한 평화를 선사한다. 특히 오늘처럼 오랜만에 먼지가 걷힌 날에는 이들의 조화가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참나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햇살은 살아있는 모든 것에 생기를 가져다준다. 햇살은 시들한 참나무 잎도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風磬)처럼 보이게 하고,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훨씬 명랑하게 들리게 한다. 햇빛을 맞으면 절로 고개를 들어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게 되고, 햇빛을 쬐어 얼굴에 온기가 느껴지면 이내 편안한 기분이 든다. 이럴 때면 나는 내 자신이 나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무와 나 모두 햇살을 받으면 생기가 돈다. 나뭇잎 하나하나에 햇빛이 반사된 각도가 서로 달라 비로소 생기는 나무의 특별한 빛깔, 투명해진 개개의 나뭇잎은 나무가 생기를 얻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햇빛을 받으면 나무는 싱그러워진다. 그런 나무들을 바라보고 있는 나 역시 햇빛을 받으며 힘을 얻는다. 물론 나는 햇빛을 쬘 때 인체에서 생성되는 물질이나 인체에 분비되는 호르몬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태양의 에너지를 피부로 느끼고, 햇빛을 받아 푸르러지는 이 나무들과 내가 같은 햇살을 맞고 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도 푸르러지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을 수 있다. 햇빛은 그런 존재이고, 햇빛을 맞으면 나 역시 나무가 되는 것이다.

 

생각이 더 나아가면, 나나 나무나 같은 존재라는 상념에 빠진다. 사람의 몸은 우주에 있는 별의 개수보다 몇천 배 더 많은 개수의 물 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 몸을 이루던 수분은 토양에 흡수되어 강이나 바다로 흘러가서 공기로 증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바로 증발할 수도 있다. 증발된 물 분자는 기류(氣流)를 따라 하늘로 올라가 구름을 이루고, 그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다가 눈이나 비가 되어 육지로 내려 올 것이다. 우리가 호흡을 하거나 음식을 섭취하면서 물 분자는 우리의 몸으로 들어오고, 나무도 잎으로 수분을 흡수하거나 뿌리로 빨아들인다.

 

결국 만약 한 생명체를 이루던 물 분자들이 전 지구에 균등하게 퍼진다면, 저 나무와 나는 같은 출신인 셈이다. 예컨대 나와 그 나무에는 모두 한때 괴테의 몸을 이루던 물 분자가 적어도 한 분자씩은 있을 것이다. 괴테가 죽은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몸을 이루던 물 분자가 전 세계에 균등하게 퍼졌다고 생각하면 분명 나와 저 나무들도 적어도 한 분자 정도는 괴테와 공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을 차근차근 펼쳐나가면 나는 비로소 나무에게 동질감과 애정을 느끼게 된다. 저 나무와 내가 같은 물질로 구성돼 있으면 저 친구나 나나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나무이고 나무가 나인 것이다.


그렇게 길가에 서있는 참나무들은 나에게 각별한 존재가 되고, 그래서 햇살 좋은 날 나무를 바라다보는 일은 행복하다. 참나무의 가지와 잎은 불규칙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린다. 참나무의 잎에 햇빛은 반사되어 나의 눈에 들어오는데, 마른 잎들이 매순간 불규칙하게 흔들리니, 나의 눈에 들어오는 햇빛은 매번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햇빛이 잎에 반사되는 각도가 달라지니 이는 당연하다.

 

그렇게 매 순간 잎들의 위치는 다르니까 매순간 보이는 나무의 찬란한 모습도 다르다. 빛나는 나무의 모습은 햇빛의 반사에 따라 결정되니 내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다. 결국 내 눈에 보이는 나무는 내가 서있는 위치와 시간에 따라 매순간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내가 참나무를 바라볼 때, 나무는 나의 나무가 된다.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유일한 모습을 나만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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