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7월의 메모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글 입력 2019.10.31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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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메모.jpg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로 활동하며 문화예술 개인 오피니언을 넉 달 간 기고해오면서도 나는 ‘개인 오피니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글에 드러내는 데에는 인색했다. 예술 작품에 대한 나의 견해를 드러낼 때조차 “이런 부분은 관람객의 흥미를 유발한다”라고 말하지, “나는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라고는 잘 말하지 않았다. 필자인 나 자신을 글의 전면에 잘 등장시키지 않은 이유는 우선 내가 나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하는 데 익숙지 않은 탓도 있고,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는 호소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의 모든 글에는 필자 자신을 지칭하는 ‘나’라는 표현이 없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 활동을 하면서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다른 에디터들의 글을 참고하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개인적인 이야기로 글을 전개해도 독자가 충분히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대화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말을 하는 글들은 필자 특유의 문체로 인해 글 자체에 모종의 분위기가 나타나 문화예술에 대한 오피니언인 동시에 하나의 문학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의 글에 대해 나와는 아예 영역이 다른 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매력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분들이 부럽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제6회 ART insight를 기회로, 필자로서의 ‘나’를 전면적으로 등장시켜 보려고 한다. 아트인사이트가 나에게 가져다 준 의미들을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에서부터 풀어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상의 나,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상처받은 이들에게 위로의 글을 선물하고자 한다.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활동을 하는 동안 내 모습을 생각해보기 위해 해당 기간 나의 메모들을 읽어본다. 이 메모는 일기라고 하기에는 허구적이고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끄적인 기록이다. 심지어는 타인의 것을 인용하거나 모방한 글들도 혼재하는 기록물이다. 기록하고 싶은 단상이나 고찰, 그리고 우연히 만난 인상깊은 글귀를 기록하는 용도인 것이다.

 

7월의 메모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길을 잃어버린 내용의 꿈이었다.

 

호기롭게 아트인사이트 에디터에 지원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자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화예술 분야 중 하나는 문학이다. 처음 지원서를 작성할 때도 프랑스 문학작품에 대한 오피니언으로 지원했었고,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 뽑히면 문학의 매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는 다른 에디터들의 글을 보며 생각이 많이 흔들렸다. 다양한 주제로 재미있게 완성된 다른 오피니언들을 보자, 문학에 대한 나의 글이 너무 딱딱하게 느껴졌고 타인의 관심을 유도하는 매력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조금 더 대중적이고 덜 부담스러운 글을 쓰려 노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아이돌문화, 그리고 타로점(占)을 글감으로 삼아 글을 써보았다. 물론 글을 쓰기 위해 관련 내용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도 많이 발견하였다. 하지만 글이 잘 써지질 않았다. 글을 쓰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고, 그 와중에 시간은 쫓기고, 그렇게 억지로 쓴 글은 썩 마음에 안 들고... 하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나도 저렇게 통통 튀는 매력이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내가 쓰는 글은 너무 딱딱하고...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시간들이었다.

 

*

 

메모를 계속 읽다 보면 달이 바뀌어 이런 문장도 마주하게 된다.

 

짧은 빛이 더 기억에 남는 때도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 줌파 라히리의 『내가 있는 곳』에 대한 오피니언을 쓰게 되었다. 에디터 활동을 시작하고 꼬박 한 달 만이었다. 글을 완성하기 위해 책장에 인덱스를 붙여가며 소설 앞뒤를 번갈아가며 읽고 있었는데, 문득 이 과정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작가가 의도한 순서로 책을 음미하며 읽는 것은 아닐지라도, 작가의 문장들 중 내가 매력을 느끼는 부분들을 파고들어 새로운 의미로 도출해내고 그것을 나의 글에 담아내었다. 그렇게 완성된 오피니언은 타인의 흥미보다는 나 자신의 관심에 집착하여 만들어졌다. 이 글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딱딱하고 재미없는 글로 비쳐졌을진 모르겠지만, 이는 나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내가 기고한 글 중에서 처음으로 오로지 내 자신의 취향에 집중하여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저 메모도 내가 재미있게 글을 쓰던 과정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기변환]내가 있는 곳.JPG

당시 기고했던 오피니언

 

 

세상에는 자신의 취향이 뚜렷한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이 원하는 바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나처럼 명확한 색깔 없이 방황하면서 스스로의 취향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나는 내 스타일을 찾지 못하고 다른 오피니언들을 보면서 그들의 글의 매력을 따라하려고 노력하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 달 넘게 오피니언을 기고하고 다른 에디터들의 글을 찾아보다가 비로소 ‘나만의 글’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걸 완성했다.

 

‘나만의 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세상을 대하는 긍정적인 자세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정보와 가치로 범람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나는 이걸 좋아해”라고 선언하는 것은 용기있는 행동이다. 세상은 강하고 준엄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는 우리를 위축시키는 경향이 있다. 가령 “한국문학은 전망이 어두워”라든가 “그런 옷은 요즘 잘 안 입어”라는 말들 말이다. 그런데 이 안에서 일단 나의 취향이 생기면,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로 세상의 평가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내가 좋다는데 뭐 어때”라고 말하는 순간 내 취향 앞에서 세상의 기준은 무가치해진다. 개인의 취향으로써 세상에 맞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서는 이를 “짧은 빛”이라는 단어로 포착한다. 상처 많은 주인공은 지겨운 생활 속에서 순간순간의 에피소드를 기억해내며 자신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어쩌면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짧은 빛”을 만들어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의 스타일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시간을 지나 나만의 딱딱한 글을 완성한 과정이, 나에게는 앞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짧은 빛”을 찾아가는 여정의 발단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

 

몇 장을 더 넘기자 이런 문장 역시 등장한다.

 

내면이란 그렇게 주시함으로써 존재하게 된 것이다.

 

위 메모는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에서 발췌한 문장이다. 작가는, 서양 기독교문화를 예로 들며 사람들이 죄가 있어서 고해성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해성사라는 제도로 인해 자기 내면을 주시하길 강제 당함으로써 죄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나는 이러한 인식 과정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느꼈는데, 취향에 있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취향이 먼저 있어서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해야하는 상황이 생기면서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게 되는 게 아닐까. 스스로의 기호를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나는, 아트인사이트라는 좋은 기회를 통해 스스로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있어서 아트인사이트는 나의 취향을 탐색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회였다. 아트인사이트 에디터로 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내가 기호나 취향이 뚜렷하게 없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애초에 스스로가 무얼 좋아하는지 생각해볼 이유가 없었다. 세상의 흐름에 맞추어, 내 나이와 신분에 맞추어 행동을 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글을 쓰고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비로소 나의 취향을 조금씩 발견해나가고 있다. 이젠 이를 조금 더 구체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목표다. 문학 내에서도 어떤 문학을 내가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 여러 작품들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다. 그리고 문학 외에도 예술전시나 영화들 중에서도 나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는지 적극적으로 찾아보고 싶다. 그리고 그 외에도 일상 중에 좋아할 수 있는 것들, 하다못해 화분이나 차(茶)라든가 하는 것들, 이불의 촉감이나 운치 있는 장소를 내가 좋아할 수 있는지 찾아보고 싶다.

 

*

 

마지막으로 내가 문화초대에 참여하면서 깨달은 생각을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에디터로 활동하는 동안 나는 『미소 홍, 그림으로 자기를 찾아가다』의 도서 리뷰에 참여한 적이 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등장한다.

 

 

p.67 좋은 것이면 좋아하면 되고, 싫은 것이면 싫어하면 되잖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면 사실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그런데 좋다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 같고, 싫다고 하면 내가 나쁜 사람 같은 상황일 때 감정이 복잡해지지. (중략) 그럴 때 쉽게 하는 방법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버리는 거야. 엄마는 나를 사랑하니까 좋은 사람이야. 아니면 나에게 못되게 굴었으니 나쁜 사람이야. 이렇게 단정 지을 때 문제가 돼. 마음속에서 인정받지 못한 미묘한 정서는 무의식중에 억압되거든. (중략) 무의식으로 억압되거나 돌봐지지 않은 정서는 내 마음 어딘가에 남아서 작용을 일으켜. 쉽게 말하면 우울증이라든가 분노 장애라든가. (중략) 그런데 이건 방법이 아니라 그냥 진실일 뿐이야. 좋은 것도 나고, 나쁜 것도 나잖아. 좋은지, 나쁜지 모르는 것도 나 아닌가? 이것을 받아들여 주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해 주는 것’이지.

 

 

나 역시 그런 편이지만, 스스로를 잘 들여다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기보다는 자꾸 외부의 상황에 시선을 맞춘다. 힘들 때 “남들도 다 이 정도는 하는 건데, 뭐,”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면 이게 문제고 저렇게 하면 저게 문젠데 어떡하지?”하고 걱정을 하게 되기도 한다. 초점을 내가 아닌 세상에 맞출 때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걱정이 끝없이 길어진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생각이라는 것은 표면적이 있어서 일단 생겨나면 거기서 출발해 다른 생각들이 달라붙고 그럴수록 표면적은 점점 커져서 끝없이 다른 생각과 걱정거리들을 덧붙이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계속 파생되는 생각들은 글을 쓸 때나 도움이 되지, 힘든 나의 감정은 전혀 해결해주지 못한다. 생각과 걱정이 이어질수록 힘겨움은 축적되고 마음은 그 무게에 점점 눌릴 뿐이다.

 

『미소 홍, 그림으로 자기를 찾아가다』에서 언급하고 있듯, 받아들이기 버거운 감정이 찾아왔을 때, 그걸 생각으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나는 나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길 원하고 행복하길 바라고 별 탈 없이 지내길 바라지만, 하루하루를 마냥 잘 지내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힘든 순간들도 오는 것이다. 그러니 생각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그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여 보자. 힘들 때는 힘들어하면 되고, 슬플 때는 울면 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정하지 않고.

 

세상이 빚어낸 상황은 거대하고 생각은 하면 할수록 불어나지만, 감정은 받아들이다 보면 해소되는 것이다. 힘들 땐 생각으로 해결하려하지 말고 그냥 하나의 감정으로서, “아, 이런 상황은 받아들이기 버겁구나. 나는 지금 힘든 상태구나...”하고 받아들이자. 힘들 때는 충분히 힘들어 할 필요가 있다. 

 

10월에 들어서서는 내 메모에 이러한 문장이 등장했다.

 

힘들 때는 울어야 하는 양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착실하게 울어라.

 

이 메모는 문보영 시인의 글을 읽다가 떠오른 감상을 메모한 것이다. 문보영 시인은 힘든 일이 있을 때, 자신에게 ‘눈물항아리’를 채우는 퀘스트가 부여됐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눈물로 그 항아리를 다 채워야 슬픔이 사라지기 때문에 항아리를 채운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눈물 흘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가상의 나에게 말하고 싶다. 힘들 때는 착실하게 울어라. 울어도 울어도 여전히 슬프고 힘들면 계속 울어도 돼. 착실하게 울다보면 언젠가는 감정이 해소되는 때가 올 테니까. 가상의 나, 그리고 힘든 하루를 보낸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에디터 활동을 하며 더 좋아하게 된) 문보영 시인은 우는 사람에겐 돼지엉덩이가 제격이라고 했다. 돼지 엉덩이는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돼지 엉덩이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뿐이다. 슬픈 일이 생겼다면,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길 바란다. 글을 마치며 가상의 나, 그리고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르는 세상 모든 지친 영혼들에게 돼지 엉덩이를 선물한다.

 

 

슬플 때는 돼지 엉덩이를 가져와요

 

문보영

 

돼지엉덩이를 봐요. 그것은 연분홍입니다. 그것은 두루뭉술하고 풍부합니다. 돼지의 엉덩이는 진열장 속 각진 상자에 또르르 대열 맞춰 앉은, 알록달록한 마카롱들과는 다른 세계에 속합니다. 돼지 엉덩이는 꿈꾸지 않습니다. 돼지 엉덩이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아 우는 엄마가 자꾸 나타나나요? 돼지 엉덩이를 소환하세요. 땀이 잘 나는 반들반들한 연분홍 엉덩이는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으며 잘 참는 사람을 칭찬하지도 않습니다. 새벽 두 시. 만화방. 철없는 반바지를 입은, 집 나간 뚱보 아빠는 몸에 비해 비좁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후루루 쩝쩝 사발면을 먹어요. 만화책 속 주인공은 눈이 크고 바다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날마다 해가 뜹니다. 주인공은 정처 없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고 어깨에는 앵무새가 앉아 전체적으로 멍청해 보입니다. 바람이 불어도 땀을 자주 흘리는 주인공은 친구가 없는데 친구가 많은 척하며 이것은 만화의 영원한 주제입니다. 돼지 엉덩이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성장 배경을 묻지도 않습니다. 돼지 엉덩이는 엉 엉 엉 울어지지가 않고 자존심이 없어서 비를 맞지 않습니다.

 

 그렇담 돼지 꼬리는?

 뭔가를 친절하게 사양하는 듯한

 망가진 마음을 숨기는 듯한

 변기통 물이 미세하게 술렁이는 듯한

 헤매는

 돼지 꼬리는

 몸집 큰 돼지가 땀을 흘리며 푹푹 잘 때조차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온몸을

 돌

 돌

 돌

 말고 있습니다

 

 

[크기변환]말씹러.jpg

문보영 시인의 반려돈(?)이다.

비록 엉덩이는 보이지 않지만...

 

 


 

 

한승빈.jpg

 

 

[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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