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페라의 첫 맛 [공연예술]

2019 대구 오페라 축제를 보내며
글 입력 2019.10.30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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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jpg

대구 오페라 하우스 전경


 

오페라는 흔히, 쉽게 접근하기 힘든 장르의 예술이라 여겨진다.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다양한 문화 예술 컨텐츠를 접해온 나에게도 오페라는 접근하기 어려운 장르였다. 오페라의 진입 장벽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은 언어의 장벽과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의 부재였는데, 올해 대구 오페라 축제는 그 장벽에 처음으로 커다란 금을 그어주었다. 앞으론 혼자서도 천천히, 오페라에 대한 접근 장벽을 허물어 갈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안겨준 셈이다.

 

특히 나에게 도움을 준 프로그램은 ‘오페라 오디세이’ 프로그램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했던 오디세우스처럼, 사실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오페라 한 작품을 보는 행위는 꽤 험난한 여정이다. 이 오페라 오디세이 프로그램은 그 여정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작품의 공연에 앞서 열리는 일종의 작은 설명회인 셈인데, 작품에 주안점을 두고 감상해야 하는 감상 포인트, 작품에 대한 배경 지식 등을 상세하게 전달해주어 작품들을 감상하기에 앞서 부담감을 낮출 수 있었다.

 

 

 

사랑 앞에 선 두 여인을 바라보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라 론디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jpg


 

이번 축제에서 진행된 4편의 오페라 초연작인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는 여성이 억압당하는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기 하기 위해 ‘광기’에 휩싸여야만 했던 ‘미친 여성(mad woman)’이라는 개념을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전형이라 평가받는 작품이었는데, 여기서 ‘벨칸토’란 이탈리아어로 ‘아름다운 선율’을 의미한다. 즉, 이 장르의 작품들은 서사보다는 노래에 한껏 집중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벨칸토 오페라는 타 오페라 장르에 비해 비교적 단순한 서사를 품고 있기에, 배우들이 전하는 감정에 한껏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장르이다.

 

오페라 오디세이에서 장착한 지식을 품은 채로 처음 무대를 마주 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대 뒤쪽을 메운 성벽의 연출이었다. 각 장마다 성벽의 배치를 달리하여 무대에 쏟아지는 빛의 양과 형태 역시 달라졌는데, 이 빛 연출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등장 인물들의 서사와 감정과 연결되어 강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1막에서 에드가르도와 루치아가 서로 사랑을 속삭일 때, 빛은 숲에 내린 햇빛처럼 무대 전체를 은은하게 비춘다. 서로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비록 빽빽이 놓인 나무로 인해 환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스며드는 빛처럼 약한 희망을 보여준다. 1막에선 오디세이에서 평론가님이 강조하셨던 ‘카바티나, 카발레타의 이중구조’ 역시 확인할 수 있었다. 2막에서는 무대가 조금 더 어두워졌는데, 사랑을 버리고 의무와 속박에 묶인 채 팔려 가야 하는 루치아의 비극적인 상황을 잘 묘사한 연출이었다. 성벽 구멍을 통해 슬며시 비춰 들어오는 빛이 극 자체에 놓인 슬픔과 먹먹함을 가중시켜 주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_무대.jpg


 

가장 연출이 좋았다 여겼던 부분은 3막이었다. 루치아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사람들이 작은 빛을 죽은 루치아의 곁에 살포시 내려두는 장면은, 그녀를 향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3막의 마지막 장면을 마주했을 때는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십자가의 형상을 본 떠 무대에 빛이 스며들고 그 아래 무덤에 엎드려 절절하게 우는 에드가르도의 노래 소리는 머리와 가슴에 오랫동안 박혀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 멜로디가 계속 마음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루치아의 노랫소리보다, 모든 비극을 오롯이 마주 서야 했던 에드가르도의 심정이 더 강렬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치아를 잊을 수 없는 건 그녀가 선택한 저항의 방법 때문이다. 루치아는 사랑을 이룰 수 없는 비극적 구조 속에서 ‘광기’를 택한다.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고 사고파는 가부장적 혼인 문화에 앞서 광기라는 가면을 쓴 채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저항한다. 남편을 죽이고 반쯤 미친 듯 부르는 아리아는 그녀가 겪는 고통을 아름다우면서도 슬프게 관객에게 전달한다. 비록 그 광기로 인해 자신조차 죽음에 이르렀지만, 이는 광기에 이르지 않으면 어떤 자유의지도 가질 수 없는 폐쇄적인 가부장적 구조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장치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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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작품이었던 <라 론디네>는 4편의 메인 오페라 중 가장 기대했던 무대였고, 가장 마음에 깊게 남은 공연이었다. 일전에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를 본 경험 덕에 ‘코티잔’이라는 주인공 마그다의 직업과 이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사랑 앞에서 갈등하는 여자 주인공의 고통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었기에 더 큰 감정적 몰입이 가능했다.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와 마찬가지로 오페라 오디세이에서 진행된 강의 내용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무대 연출에 대한 설명부터, 푸치니의 인생, <라 론디네>의 결말에 대한 해석 등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작품을 감상했기에 무대를 보는 내내 연출의 의미를 해석해나가는 맛이 있었다.<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접했던 웅장하고 비장한 무대와 달리 <라 론디네>의 무대는 멀리서 인형극을 보듯 화려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다. 4편의 메인 오페라 중 무대 미장셴이 단연 최고라 할 정도로 산뜻한 색감과 화려하고 반짝이는 의상이 눈길을 끌었는데, 이 발랄하고도 톡톡 튀는 분위기가 극의 유쾌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비슷한 줄거리인 <라 트라비아타>에서는 여주인공이 비극적 죽음을 택하는 반면, <라 론디네>의 마그다는 무심한 듯 이별을 택하고 돌아서는데, 그런 그녀의 선택 이면에는 자신은 ‘코티잔’이라는 비극적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조적인 비관이 깔려있다. 그녀는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성’과 ‘웃음’을 팔아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에서 저평가되는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자조적인 시선 속에서 마그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루제로를 놓지 않는다면, 그 또한 망가질 거라 생각해 그를 가차없이 버린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을 것이다. ‘나에게 사랑은 결국 허울뿐인 공허한 감정이구나. 결코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구나.’ 이렇게 말이다.

 

 

라 론디네_무대.jpg


 

절절한 듯 절절하지 않은 마그다와 루제로의 사랑이 변해가는 과정은 1-3막 내내 무대를 지키는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1부에선 비너스가 정면을 바라본 채 또렷하게 관객들과 눈을 마주친다. 비너스가 확실한 사랑을 안전하게 보장하듯,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2부에서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거울로 조각난다. 하나의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여러 형태의 존재하듯, 존재하지 않듯, 가변적인 사랑이 둥둥 떠다닌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루제로와 불안정한 사랑을 하는 마그다의 상태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리고 대망의 3부에선 비너스가 마그리트의 하늘을 연상시키는 형상으로 뒤덮인다. 파이프를 그린 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남긴 마그리트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 존재론적 의심을 던진다. 그의 그림이 비너스를 뒤덮었다는 것은 마그다와 루제로가 믿어왔던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존재하긴 하는 것인지, 의문을 던지게 한다. 관객들은 사랑을 외치면서 매섭게 돌아서는 마그다를 보며,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그녀의 인생을 보며 사랑이란 무엇일까 담담히 되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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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1 The loversⅠ>, 르네 마그리트,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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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2 The lovers Ⅱ>, 르네 마그리트, 1928


 

이외에도 가면을 쓴 채, 미지의 상태로 마그다를 따라다니던 남자들의 허상과 마지막 장면에서 마그다가 루제로에게 가면을 씌우는 연출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수많은 남자들을 거치지만 그들에게서 아무런 사랑의 감정의, 아니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했던 마그다의 심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는 남자들의 형상, ‘몸 파는 여자’라는 꼬리표,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까지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익명의 존재로 만들어버려야만 하는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을 잘 드러내는 연출이었다. 이번에 국내에 초연된 공연인데다, 롤란도 빌라존의 독특한 연출과 함께 화려한 무대 위에서 미처 꽃피지 못하고 져버리는 마그다의 비극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어서 아주 강렬했던 공연이었다.

 

 

 

비극적 운명을 마주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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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두 작품을 관통하는 건 ‘비극을 대하는 태도’와 ‘여성 인물의 비극 서사’였다. 아무래도 오페라에 대해 지식이 깊지는 않으니 자연스레 서사에 많은 집중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대하는 여성 인물들의 행동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두 편의 오페라 모두 근대 시기 유럽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모든 작품에선 억압된 여성 주인공의 처지가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속박에 대응하는 여성들의 태도가 다양한 방향성으로 드러난다.

 

먼저 루치아는 ‘광기’를 선택해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방법으로 사회가 부여한 ‘여성적 굴레’를 벗어나려 한다.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죽이는 폭력적인 행위를 통해 여성을 일종의 소유물처럼 사고파는 당대의 혼인 문화에 반기를 든다. 반면, 마그다는 남성의 권력에 기생해 소규모의 권력을 얻은 코티잔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사랑을 찾아 모험을 떠나지만, 결국 가부장적 사회 구조 속에서 ‘순수함’을 가지지 못한 그녀는 한계를 체감하고 포기해버린다. 겉으로는 마그다가 주체적으로 이별을 택하는 듯 하지만, 이는 사실 여성에게 엄격한 정조가 요구되는 당대의 시대적 배경을 감당하지 못해 사랑을 포기한 그녀의 실패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마그다의 선택은 오히려 죽음을 통해 저항한 루치아의 선택에 비해 더욱 수동적이며 그녀가 가부장적 사회적 가치에 굴복했음을 알 수 있다. 

 

오페라는 역사가 길고 전통성이 강한 예술 장르라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여성 주인공들의 결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씁쓸해졌다. 운명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진부하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20살, 『토지』를 읽을 때만 해도 비극적 운명을 고스란히 감내하는 인물들을 보며 대단하다 여기던 나였지만, 이제는 너무 변해버린 것인지 그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처지가 안타깝기만 했다. 운명이란 단어를 이해하기엔 우린 너무 가변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씁쓸한 뒷맛을 삼켰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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