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곳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다원예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다원예술 프로그램: 카럴 판 라러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글 입력 2019.10.2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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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1일부터 13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19’ 프로그램 중 하나인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가 서울관 멀티프로젝트 홀에서 진행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19 프로그램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전인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와 주제를 함께 한다. 이 프로그램은 ‘동시대 광장’을 사유하고 질문할 다원예술 세 편을 소개하는데, 그 중 두 번째가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이다. 이 프로그램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공연과 토크가 각각 30분씩 이루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퍼포머 퍼포먼스 스틸컷.jpg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홈페이지

 
 
네덜란드 아티스트 카럴 판 라러는 최면이라는 생소한 방법으로 무대 위에서 퍼포머의 존재성을 지운다. 그 ‘퍼포머’는 카럴 자신이며 무대 위에는 카럴 본인, 무용수 세 명과 안무가, 그리고 최면술사가 등장한다. 최면술사는 카럴에게 최면을 걸어 의식과 감각은 깨어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무용수 세 명과 안무가는 이렇게 ‘물건 같아 보이는’ 축 늘어진 카럴의 신체를 조심스럽게 이리저리 옮기고, 들어올리고, 움직인다. 이는 몸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퍼포먼스라고 부를 수 있겠으나, 보편적인 퍼포먼스 공연과는 확연히 다르다. 음악도, 서사도, 드라마도 없다. 이러한 신체의 특이한 움직임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카럴의 몸을 옮기던 사람들은 몸을 다시 바닥에 눕혀두고 다시 무대 밖으로 사라지며 최면술사가 다시 등장하여 카럴을 최면에서 깨어나도록 한다. 그의 몸에 다시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공연 이후에 진행된 토크는 공연을 준비했던 모든 사람들이 무대로 올라와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카럴의 몸을 옮겼던 무용수 세 명은 그의 의지 없던 몸이 가졌던 물질성이 인상 깊었다고 언급했다. 대부분의 대화는 진행자와 카럴, 최면술사, 안무가 간의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졌다. 그 응답 속에서 카럴은 자신이 무대 위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이러한 공연을 구상하게 되었다며 이 공연의 시발점을 설명했다.
 
퍼포머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의식이 없는 상태로 신체만 덩그러니 남겨진다면(그는 의식이 없는 상태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정의한 것이다.)긴장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다. 또, ‘존재하지 않도록’하는 방법으로 최면의 방식을 선택한 이유로는, 원래 수면마취 등 약물의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잠시 지우려 했으나 전문가와의 상담 끝에 너무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그래서 찾게 된 것이 최면의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최면이라는 방법이 한국에서는 생소할 수 있으나, 네덜란드 같은 유럽 국가에서는 치료의 요법으로도 쓰인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행위를 제 3자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떠올려볼 수 있었다. 카럴이 전제한 대로 의식이 없다면 이 상황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신체를 기준으로 본다면 그는 이 상황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심지어 의식만 없을 뿐 청각이나 촉각 미각의 감각은 일부 살아있어서, 카럴은 퍼포먼스 도중 무용수들이 그를 들어올릴 때 흘린 땀의 맛까지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실재적인 기억은 없으며, 자신이 어떠한 모양으로 움직였는지에 대한 인지도 없었던 것이다. 존재성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질문이 될 것이라 느꼈다.
 
이렇듯 수단이나 주제가 결정된 준비의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공연 자체의 내용과 더불어 이 공연의 형식이 ‘다원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는 점도 곱씹어 볼 만 했다. 이 작품은 분명 퍼포먼스의 이름으로 공연되고 따라서 퍼포머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음을 표방한다. 기존의 틀을 깨는 이러한 새로운 공연에의 접근은 다원예술의 의미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 이후로 우후죽순 솟아나는 새롭고 다양한 형식의, 혹은 무형식의 예술작품들은 다원예술이라는 분류 속에서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게 된다.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2019’에 관심이 생겼다면, 2020년 2월 진행되는 <개인주의자의 극장>을 주목해보는 것도 좋다. 공연연출가 정세영, VR아티스트 룸톤, 로보틱스 아티스트 이장원의 신작으로, 디지털 매체를 기반으로 ‘가상성’과 ‘극장’을 다룬다. 미술관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문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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