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난 연극 돌아보기, "프라이드"를 떠올리며

글 입력 2019.10.2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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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한 지 꽤 됐지만, 좋은 연극이고 묵혀두기 아쉬워서 리뷰를 적는다. 지난 5.25일부터 8.25일까지 3개월간 대학로 아트원시어터에서 공연했다. 5.31-6.1일 이틀간 진행했던 퀴어 퍼레이드와 겹치기 때문에 같이 곁들어 보기 좋은 공연이었다.


1958년과 2008년 영국을 배경으로 게이들의 삶을 다뤘다. 같은 인물이 두 시대를 살아가면서 변한 모습을 관람하는 자체가 작품의 의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게 잘 만들었다. 결말을 장식하는 건 2008년의 성소수자 퍼레이드다. 등장인물인 실비아와 필립, 올리버의 관계는 시대를 넘나 든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필립과 올리버는 게이고, 실비아는 둘 사이를 이어주는 교각을 맡는다. 1958년에서는 필립의 아내로서, 2008년에는 친구로서.


필립과 올리버의 사랑이 1958년에 상처와 거짓,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면 2008년에는 거짓만 빠진 나머지를 가지고 다툰다. 필립은 올리버를 사랑하지만, 잔인한 사회의 시선을 견딜 수 없어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경멸하고, 부정하고... 1958년에는 디나이얼 게이로 고통뿐인 삶을, 2008년에는 점잖은 게이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는 오십 년간의 투쟁이 구한 한 명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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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는 작가로서 감수성이 풍부하고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필립을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게이인 자신을 인정하지만 그로 인해 자기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실비아 역은 작품에서 가장 위험하다. 그녀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작품의 질과 직결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이 서사에서 여성이 도구적으로만 존재하던 많은 작품들을 떠올리면(대표적으로 브로크백 마운틴!) 게이의 아내인 실비아의 캐릭터가 어떻게 입체적으로 주연의 위치를 차지할지 궁금해진다.


사실 주연이라는 게 딱히 어떤 공식이 있는 건 아니고 얼마나 많은 양의 대사와 조명을 받느냐인데 실비아, 필립, 올리버 이 세 인물은 비중을 훌륭하게 나눠 갖는다. 극에서 실비아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두 주인공을 이어주는 사랑의 큐피드다. 나로서는 작가가 그 한계 안에서 최대한 실비아를 존중하고자 했다고 느꼈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는 것도.


어쨌거나 주인공은 필립과 올리버 아닌가. 주제는 게이들의 삶과 용기에 대한 이야기지 다른 게 아니다. 그러면 이 삼각관계에서 실비아는 호의적인 외부인이다. 1958년에나 2008년에나 실비아는 이성애자이고, 결혼과 아이를 원한다. 사회와 배척되지 않는 일반인으로서, 동시에 성소수자들의 다정한 친구로서, 그녀는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연약한 올리버를 응원하고 지켜주고 대신 화도 내준다.


목소리가 닿기를 원하는 것, 목소리가 닿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신기한 건 여기서 올리버가 그토록 닿기를 원하는 건 다름 아닌 같은 게이인 필립이다. 매일같이 공원에서 만나는 남자마다 빨아주는 올리버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기 목소리가 닿기를 원하지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1958년에도 2008년에도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동류'의 사람들이다. 올리버를 잘 관찰하다 보면 과연 '게이 됨'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게이의 정의가 뭘까? 남성이 남성을 사랑하는 것? 그럼 그 사랑에는 육체적 욕망의 의미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걸까? 그러면 게이냐 아니냐는 동성과의 성적 행위를 기준으로 나뉘는 걸까? 여성을 사랑하면서도 때때로 남성에게 성욕을 느낀다면 그는 디나이얼 게이인 걸까, 잠재적 게이인 걸까 아니면 그저 성적 판타지의 일부일 뿐인 걸까? 이 문제가 중요한 건 1958년 필립이 게이 치료를 받으려 간 상담실에서 묻는 유일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동성에게 성욕을 느끼며, 성행위를(특히나 항문성교)했습니까? 동성애자란 결국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의) 섹스를 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일까?


게이로 정체화하는데 이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면 무슨 가능성이 있을까? 1958년 영국은 청교도적 금욕 윤리가 패배해서 게이의 이상/과잉 성욕을 질병으로 구분했다면 2008년에는 성욕에 자유로울 권리를 준 게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하지만 게이의 인식이 여전히 성욕에 들끓는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욕구를 숨기는 게 미덕이든 추구하는 게 미덕이든 개인에게 정말 필요한 건 그 욕구를 느끼고 느끼지 않을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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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에 올리버는 필립과 섹스를 할 용기를 내야 했다면 2008년에는 조금 다르다. 결말에서 올리버는 필립에게 앞으로는 다른 남자들의 성기를 빨아주지 않고, 더 이상 섹스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연인을 되찾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 인종차별자, 호모포비아를 가리지 않고 빠는 것과, 나치 제복의 매춘을 하는 올리버의 행동이 의미하는 건 뭘까. 게이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게이 섹스에 대한 글을 쓰기로 수락하는 건 전부 올리버가 사회가 생각하는(통념에 맞는) 게이가 되기 위한 노력처럼 보인다. 1958년에서 2008년까지 오십 년의 투쟁이 동성애를 질병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정상/비정상, 일반/특수의 범주가 남아있는 사회라면 확실한 게이가 되기 위해 여전히 자신의 특수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게 정체성을 긍정하는 행위라고 봐야 할까?


연극 중간에 등장하는 잡지 편집자의 대사는 목소리가 닿는 것과, 그 목소리가 힘을 얻는 건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25년간 한 연인과 살다 에이즈로 죽은 삼촌 얘기를 하며 자신이 게이들과 이어져 있음을, 그때 막내 삼촌 눈에서 본 넘치는 사랑이 가슴에 닿아 지금도 잊지 못한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그는 게이 인식 향상을 위해 할 일이 게이들의 야외 섹스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라고 생각한다.


동성애자는 도덕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또는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고 여기는 건 어느 순간 짐이 되어 성소수자들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일부일처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게만 충실할 것, 전자가 제도라면 후자는 제도의 변명이 되는 애틋한 인간 감정의 일부다.


때로 목소리는 정확한 사람에게, 정확하게 닿아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진실로 바라보고, 아껴줄 사람에게 가 닿는다면 오십 년의 법석은 용기의 원천이자 역사가 된다. 그게 누군가. 실비아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녀는 답이 아니다. 내가 한 생각은 결국 제일 필요하고 시급한 건 건강한 게이/성소수자 커뮤니티의 형성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외부의 시선만 존재할 때 동성애자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식되지만 내부에서 각자의 다양성과 환원될 수 없음을 부각하면 할수록 열리는 가능성이 얼마나 넓은가. 필립과 올리버가 게이라는 것보다 필립과 올리버가 얼마나 다른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든지 원하는 방향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연극의 다정함에 나는 생소한 감동을 느꼈다.


변하고자 하는 의지와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 좋은 서사의 기준이 연극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주인공이 갈등을 맞으면서 성장하는 것, 처음보다 나은 사람으로 극을 끝맺는 건 심심할지언정 반박할 수 없는 감명을 가슴에 남기고 끝난다. 실비아가 아쉬운 건 이 지점에서 그녀만이 처음과 딱히 다르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1958년의 실비아는 필립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도 아니고 단지 결말을 깔끔하게 맺기 위한 결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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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게 건강한 게이 커뮤니티라면, 갈 길은 멀다. 건강한 인생을 누리고, 건강한 개인으로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것. 나는 이성애가 성애의 일부로 끌어내려지는 날을 고대하고 있다. 2008년 실비아가 '지금 런던에서 잘생기고 상냥하고 요리도 잘하면서 이성애자인 남자를 찾기가 얼마나 드문지 알아?'라고 말할 때 우리나라에도 머지않아 그런 다양성으로 가득한 날이 오기를, 그때는 인간 신체의 1% 정도를 차지한다는 성기의 의미가 누구에게도 그 이상을 뜻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모두가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사회, 그때 퀴어 퍼레이드는 어떤 행사가 될까. 2008년 런던의 퀴어 퍼레이드는 너무 머나먼 얘기 같고, 나는 일주일 전에 열린 한국의 퀴어 퍼레이드를 생각하고 있다.


지병인 광장 공포증 덕에 올해도 나는 몇몇 뉴스를 접하고 몇몇 소소한 액션을 하는 걸로 나만의 퍼레이드를 마무리 지었지만, 퀴어 퍼레이드의 의미는 한해 한해 갈수록 변한다. 퍼레이드가 축제의 뜻이라면 왜 퀴어 퍼레이드는 성소수자들의 대목으로 여겨질까. 참아왔던 말을 모조리 쏟아붓겠다는 듯이, 단 일주일 만에 그 복잡 다난 삶의 방식을 어떻게 설명할까? 결국 우리나라에서 퀴어 담론이 얼마나 활성화되어있나, 동시에 동성 결혼 추진은커녕 퀴어 퍼레이드마저도 반대 세력과 경합해야 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성소수자가 사회에 정열적으로 나서는 건 퀴어퍼레이드뿐일까? 그 퍼레이드가 아니면 어디서 성소수자들이 가시화될까? 퀴어 담론은 어디서 이야기되고 '소수자'로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곳은 어디에 있나?


영국은 2013년에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나는 해외 연극을 보면서 갖는 간극을 지금처럼 확연하게 느낀 적이 없다. 뜨끈한 난로 앞에 앉아 불을 쬐다 순식간에 찬바람 부는 바깥에 던져진 사람처럼, 갈 길이 멀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오십 년의 투쟁 안에 살고 있는 걸까?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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