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통과 생존, 신념과 야망 속에서 [공연예술]

글 입력 2019.10.1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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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연극 공연을 한다며 보러 오란다. 그는 교내 연극 동아리에서 각본가이자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말이야 들었지만 친한 언니가 정말로 상연을 한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공연장이 작으니까 감안하고 오라고 덧붙였다. 소극장? 내 몇 안 되는 연극 경험 중 하나가 소극장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곧 떠올랐고, 작은 걱정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연극에는 취미가 없지만 우연찮은 기회로 두어 번 정도 감상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번은 상당히 작은 규모의 소극장이었다. 이제는 공연의 제목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작은 헛기침 소리마저도 모든 관객과 배우들에게 들릴 법한 공간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관객의 역할을 실감했다. 이렇게 배우와 가까운 곳에서는 관객들 역시 무대의 퀄리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우의 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해진다는 말이다. 배우들이랑 눈이 마주쳐 어색한 표정이라도 지으면 어쩌지, 내심 긴장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지인의 연극은 SF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까지 내가 접했던 ‘그 소극장 공연’과 비슷했다. 물론 그때 그 작품은 훨씬 난해하고 자극적인 작품이었던 반면에 <뇌란음모>는 보다 정석에 가까웠다. 나도 SF 작품을 나름대로 즐겨 읽는 편이지만, 독자와 창작자는 정말이지 천지차이다. 각본 쓰는 능력 따위 없는 나에게는 이런 시놉시스를 상상하고 구현해낸 지인이 벌써부터 감탄스러웠다.


그 시놉시스란 대강 이랬다. 천재적인 지능을 지닌 한국계 미국인 과학자 ‘신디’에게 대한민국 정부는 두뇌 이식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이 프로젝트에는 대한민국의 유능한 의사 윤중기와 그의 후배 의사인 백서연, 그리고 국정원 팀장 최도영의 추천으로 들어온 미지의 인물 이원희도 함께한다. 그러나 윤중기는 신디를 비롯해 프로젝트 전반이 수상쩍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곧 이원희에게 죽음을 당한다.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 프로젝트에 남아 있던 백서연은 이내 두뇌 이식의 부작용으로 반신불구가 된다. 갈등 끝에 육탄전이 벌어지고, 종국에는 신디의 자폭으로 인해 모두가 위험에 빠진다. 극의 도입부와 마지막은 신디의 두뇌를 이식받은 유일한 천재가 된 이원희의 자기고백과 함께, 윤중기에게서 빼앗았던 기밀이 담긴 USB를 버리면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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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놀라웠다. 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나 각본의 완성도를 꼼꼼히 따져 평가할 정도의 역량이 되는 사람은 아니기에, 평가할 수 있는 요소란 극의 흐름이나 캐릭터성이 나에게 얼마나 인상깊게 다가왔는지를 따지는 수밖엔 없다. 특히나 캐릭터를 신중하게 설정했다는 점에서 창작자들의 정성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인물들 각자의 이해관계와 사연이 조밀하게 얽혀 있고, 적당한 반전도 선사한다. 서사에서 주목받는 캐릭터는 사실 신디, 백서연 그리고 윤중기라고 볼 수 있다. 비운의 천재 신디와 야망으로 가득 찬 백서연, 신념을 좇는 의사 윤중기까지. 반면 이원희는 최도영의 꼭두각시일 뿐 비중있게 다뤄질 만한 인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극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실질적 주인공이자 화자는 이원희가 차지한다. 이렇게 어느 한 인물도 소모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성실함이 좋았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상당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비록 아마추어들인 만큼 중간 중간 발음이나 대사를 저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지만, 몰입을 방해할 만큼은 아니었다. 외려 아쉬웠던 점은 어쩔 수 없는 대학교 학생회관의 부실한 시설이었다. 밴드부의 연습 소리가 너무 가깝게 들리는 탓에 관객도 관객이지만 배우들이 연기에 영향을 받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지만, 무사히 잘 마무리했다는 점에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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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연극의 매력이 무엇인지 깨달았는데, 그건 역시나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영화처럼 언제 감상해도 그 모습 그대로인 예술 장르와는 달리 매 회차마다 변수가 존재하는 연극은, 그런 매력 덕분에 그 비교적 원시적인 상연 방법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엄연한 예술 분야로서 살아남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활용할 수 있는 장치가 한정되어 있고, 비록 옆방의 소리나 관객들의 기침 소리가 그대로 들리는 장소라고 하더라도 서사가 가지고 있는 힘 그 자체를 입증하기에는 가장 강력한 예술이 연극이 아닐까 싶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걸 좋아한다는 나도 바쁜 일상에 치이다 보면 늘 즐기던 것만 즐기게 된다. 독서, 페스티벌, 유튜브의 쳇바퀴. 하지만 색다른 무언가를 접할 기회가 생길 때면 그것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 역시 짙게 다가온다. 간만에 좋은 예술작품을 만나 즐거운 한 주였다.


 

[한민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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