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선택은 개인의 몫 [도서]

글 입력 2019.10.13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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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개인에겐 미래를 예상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최악을 가정하는 비관적 전망은 낙관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가치관의 일종이라 치부되어 경시한다. 최악을 가정할 수 있음에도 이를 배격하는 우리는 어리석고, 예지력이 없음에도 잘 될거야-란 낙관에 사로잡히는 당신은 무지하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지함에도 어쩔 수 없다. 기로에 서는 상황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우리는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선택의 결과를 내다 볼 수 없으니 필사적으로 낙관을 지향하는 건지도 모른다.

 

선택하고 나면 다른 방도가 없다. 선택이 좋지 않은 결과를 수반함에도 어쨌거나 선택은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이뤄졌다. 책임은 온전히 스스로에게 있다. 선택의 순간들이 사위에 가득한 당신과 나의 삶에서, 그러니 낙관은 필수적으로 장착해야할 태도일테다. 비관은 객관적이지만, 희망이 결여돼 있다. 그것은 색깔이 없고 온기가 없다. 내 선택이 올바른 선택임을, 이 선택이 따뜻한 온기와 밝은 색깔의 결과를 수반하기를 바라는 마음. 예지할 수 없는 개인은 낙관적 태도를 장착함으로써 자위한다. 낙관은 삶을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성분이다.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언제나 삶이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고, 선택의 결과에 책임을 지는 것 역시 개인이지만 선택할 상황과 빌미를 끊임없이 제작하는 건 항상 삶이다. 내부고발자가 돼 스스로의 윤리의식에 당당한 이가 될지, 죄책감을 무시하고 지금 속한 집단에서의 안락한 삶을 영위해나갈지. 그 중 하나를 택하는 건 개인이지만, 그 선택의 순간을 제작하는 건 언제나 삶이다. 삶은 인위적으로 가공된 서사가 아니다. 서사가 말도 안되는 것들, 이어지는 흐름과 개연성을 단절시키는 절차의 삽입을 지양한다면, 삶은 우연의 다른 말이다.

 

거기선 도무지 개연성이란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당신의 삶, 나의 삶은 매번 우연이었다. 우연에 의해 삶의 인과가 만들어진다. 삶을 예상할 수 없는 것도 그것이 우연이어서다. 그저 평소처럼 지나가는 거리였는데 식물인간이 됐고, 잠깐 지나치는 스침의 순간이었는데 평생의 배우자를 대면했다. 실존과 사망, 사랑 같은 굵직한 순간들 역시 우연에게서 촉발되지만, 좀 더 협소한 규모의 사소한 우연은 매 시간 작동한다. 우연이 있어 선택의 순간이 있고, 당신과 나는 어쩌다가, 어쩌다보니, 란 말을 달고 산다. 삶은 우연이지만 금방 휘발될 우연이 '어쩌다가', '어쩌다보니'로 변모한 것은 당신이 우연을 그렇게 소비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인 탓도 있다. 스쳐지나가는 우연들의 범람.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 그게 삶이다.

 

<새의 선물>의 진희는, 타인을 마주할 때의 '보여지는 나'와 그걸 응시하는 '바라보는 나'로 스스로를 이분하면서 처세를 익히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한다. 동시에 삶이 우연으로 가득찬 속성의 것임을 간파한다. 그녀가 생각하는 객관성이란 결국 냉소와 비관의 다른 이름이다. 냉소는 냉정함을 유지하는 최선의 태도이며 비관은 최악의 가능성에도 골몰하는 정서인 셈이다. 적어도 그녀에겐 그렇다.

 

비관하고 냉소함으로써 그녀는 진심과 위선, 가식을 구분지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12살이후로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어떤 선택을 하든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어떤 굴곡을 거쳐왔기에 겨우 12살에 삶이 우연임을 통찰했을까. 진희는 할머니와 외숙모와 같이 동거한다. 엄마는 부재하고 아빠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정신병에 걸려 죽은 엄마, 양육과 보호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 아빠, 수군거림이 주변에서 명멸하고, 측은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 동정의 눈자위들은 갈고리가 돼 눅진하게 살갗에 박힌다.

 

<새의 선물>은 성장서사지만, 진희가 겪었을 고통의 순간을 묘사하는데 주력하지 않는다. 성장서사는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서사를 일컬을 거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성장서사가 성장을 그려내는 방식이란 인물이 겪는 고통의 과정을 소개하고 결말에 이르러 이겨냈다는 식이다. 고통이 성장을 완료시킨다고 말한다.

 

거의 대부분의 성장서사가 설파하는 고통이 성장을 완료시킨다는 잠언이 의뭉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당신과 나, 내 사위에 흩어져 있는 어른들은 분명 성장한 존재들이지만 삶은 서사가 아니고 우리가 일궈낸 성장은 서사속 주인공이 치른 성장의식처럼 고통으로 얼룩져 있지 않다. 우리는 그저 시간을 통과함으로써 성장했다. 삶에서 매번 작동하는 우연을 거쳐내면서, 그 우연이 부여하는 사사로운 선택과 굵직한 선택을 흘려보냄으로써. 우연과 선택이 퇴적되고 그것이 일상을 만든다. 당신과 나는 그저 일상을 지내면서 성장했다.<새의 선물>이 특별한 건, 그래서다. 우연과 선택의 흐름 속에서 이뤄지는 가장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성장을 보여주기에. 진희는 이미 고통의 순간을 겪었고, 삶이 지닌 속성을 미리 간파하여 12살 이후로 성장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하지만, 그건 냉소와 비관으로 점철된 사춘기 소녀의 자기방어이자 자기기만일테다. 진희에겐 퇴적된 시간이 없다. 흘려보낸 일상의 숫자가 적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어기제의 일종으로, 원래 삶은 그렇다는 냉소적, 비관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새의 선물>에 등장하는 모든 사소한 사건과 빠른 속도로 유유히 흘러가는 일상은, 진희가 더욱 성장하는 계기로 기능한다.

 

그리하여 <새의 선물>이 진희가 감당했던, 혹은 감당하는 중인 고통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는 의도는 자명해진다. 책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진희와 마찬가지라는 외침. 누구나 동일한 양상으로 대면하는 시간의 흐름에서, 누적되는 우연과 쌓이는 시간속에서 진희와 마찬가지로 당신 또한 고통의 순간을 응당 겪었을 거라는 외침 말이다. 시간은 흐르고 당연하게도 고통은 누구에게나 부여된다. 고통을 겪은 이후부터 갑작스레 성장하는 개인은 없다. 고통 역시 산적하게 쌓여가는 일상의 한 순간. 이 일상들을 겪은 당신은 분명 성장한 사람이다.

 

<새의 선물>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특별한 성장서사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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