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동의 역사, 진동의 풍경 [영화]

<말해의 사계절>이 말하는 것들
글 입력 2019.10.0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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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은 거대서사가 아니면 연결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 난점을 마주한 역사 서술은 개인과 개인의 삶, 혹은 개인의 존재를 거대한 명제와 역사적 흐름으로서 통합하고 서사화하려 한다. 이렇게 통합된 역사는 하나의 서사와 명제를 통하여 설명된다. 그래야만 아카이빙 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된다, 혹은 그렇다고 믿게 된다. 허철녕 감독의 영화, <말해의 사계절>은 명확한 서사와 맥락을 통해서 역사를 기술하고 기록하려 하는 이전의 실천과 조금은 거리를 두려는 영화처럼 보인다. ‘김말해’라는 인물의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 보도연맹 사건과 밀양 송전탑 설치 사건을 일정한 규칙없이 무작위적으로 수집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확실한 하나의 서사를 갖고 있다는 안정감을 주지도 않을 뿐더러, 몇 가지의 역사적 서사가 외부의 해설을 필요로 한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뒤엉켜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떠밀지도 않는다. <말해의 사계절>은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김말해라는 인물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하고 배열하는 방식으로 아카이빙하고 있다.


<말해의 사계절>이 취하는 이러한 태도는 김말해의 현재 삶을 둘러싸고 있는 밀양 송전탑 사건이 이전의 역사와 분절된 하나의 개인적 조각이 아니라, 혹은 다른 사적 사건들과 유리되어 있는 공권력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 개인적 경험과 한국 근현대사 사이를 오가는 진동역사의 형태를 띤다는 것을 드러낸다. 김말해의 얼굴과 말, 그리고 김말해를 둘러싼 밀양의 풍경들은 하나의 선으로 연결되어 목표를 향해 진전하는 모습이 아니라 다양한 색이나 면이 공간 내에 흩뿌려지는 형태를 보여준다. 다만 영화는 다양한 사건을 무한의 공간에 흩뿌려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서술하는 다큐멘터리적 책임은 유보하지 않는다. 보도연맹과 관련한 사건이 나올 때에 삽입된 푸티지들의 배열과, 김말해가 겪은 몇몇 공권력의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가 일관적이고 확실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는 공권력의 역사와 사적 역사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면서 역사서술이 지니는 딜레마, 즉 역사를 하나의 서사로서 통합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열망을 배척하지만 동시에 역사를 말하는 것, 그리고 역사화하는 것이 지니는 책임감에 대해서는 엄중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인다. <말해의 사계절>은 글을 쓰지 못하는 김말해가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자 하는 태도를 직접적으로 투사하면서 그의 삶을 조금은 떨어진 위치에서 담담히 아카이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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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록의 과정에 놓인 것은 다름아닌 밀양의 풍경과 얼굴이다. <말해의 사계절>이 얼굴과 풍경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것은 단순히 밀양과 김말해,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역사가 ‘존재함’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 선택과 배열은 단순히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그를 무정형적으로 기록하려는 움직임보다는 사적 역사와 공적 권력의 역사 사이에 놓여있는, 혹은 놓여있다고 가정되었던 분리를 흐릿하게 하려는 정치, 윤리적 선택이다. 지나쳐가는 역사 한복판의 공간에 놓인 인간은 분절된, 혹은 독립된 사건을 자신의 생 속에 연결하고 경험하며, 혹은 그를 그저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그를 확장시킨다. 이 점에서 <말해의 사계절>이 가지는 역사 서술의 태도는 모두가 삶을 살아가며 사건을 연결하고, 선택하는 과정과도 닮아있다. 인간이 경험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결코 분절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들은 느슨하게 연결되어 진동하면서 한 사람의 역사를, 그리고 한 사회의 역사를 쌓아나간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해의 사계절>이 선택하는 이미지는 공적이라고, 혹은 사적이라고 말하기 꺼려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그저 김말해의 것이기 때문이다. 김말해가 배열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사적 사건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뒤엉켜있다.


그렇기에 <말해의 사계절>이 선택한 역사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도 아니고, 밀양 송전탑에 대한 사실 관계 증명도 아니며 김말해라는 인물의 지극히 ‘개인적인’ 서사도 아니다. 오히려 그 모두를 아우르며 담고 있는 얼굴과 공백에 놓인 수많은 역사의 분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로 수렴되지도, 혹은 완전히 떨어져있지도 않다. 풍경의 미세한 떨림처럼, 김말해와 그의 얼굴, 여러 사건들은 진동하고, 또 그를 통해 서로를 진동하게 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은 특정한 역학관계를 주고받는다기 보다는 그저 진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영화는 현재에 벌어지고 있는 공적 사건(송전탑 사건)이나 김말해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아들과의 관계)에 특권적 힘을 부여하지 않는다. 충돌하거나 지나쳐가면서 우연적 만남을 만들 뿐이다. 사계절은 시시각각 변한다. 또 하루의 부분들은 단 한번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 다중적인 불일치 속에서 더이상 풍경이나 역사를 하나의 서사로 묶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영화는 말한다. 몇몇 다큐멘터리의 풍경들은 그 자체로 서사화되어 부동의 상태를 취하거나,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이 무정형적으로 뛰쳐나가곤 한다. 그 사이에서 관객은 편안함 혹은 당혹감을 느낀다. 편안한 풍경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어쩌면 불가능한 역사를 만들고, 당혹스러운 풍경은 역사와의 관계성을 잃어버린다. <말해의 사계절>은 풍경-얼굴과 역사를 하나의 느슨한 관계로 묶어낸다. 이는 언어를 통한 것도, 혹은 특정한 사건을 통한 것도 아니다. 김말해의 주름, 미세한 카메라의 떨림, 흩뿌려지는 담배연기 등과 같은 역사와 무관해보이는 진동이 역설적이게도 역사와 김말해라는 개인적 인물과 밀양 송전탑 사건이라는 공적인 사건 모두를 연결하는 것이다.


‘역사의 분자’들은 진동하되 서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진동하면서 어떤 분자들은 서로 만나 새로운 분자를 만들기도 하고, 또 다른 분자는 그 자리에 남아 그 분자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말해의 사계절>에 등장하는 김말해가 경험한 수많은 사건들,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사건과 사건이라고 말하기 힘든 상태들은 분자가 진동하듯 역사를 만든다. 역사는 결코 선형적인 힘을 가지지도, 혹은 어떠한 분리를 가정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역사의 본질은 개인이 경험하는 역사 그 자체에 있을 수도 있다. 김말해가 경험하는 개인의 역사,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며 연결하고 배열하는 역사적 사건들을 <말해의 사계절>은 영화 자체에 현현시키고 있다. 그것에서 이 영화의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김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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