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07. 괜찮아, 여자는 안 그래도 돼

여자들이 책임 없이 권리만 요구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글 입력 2019.10.07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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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괜찮아, 여자는 안 그래도 돼

 

인터넷 댓글 창에는 페미니스트를 향한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그런 말은 대부분 귀 기울여 들을 가치가 없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닌 상대방을 흠집 내기만을 위한 비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런 말에 일일이 분노하는 대신 남에게 상처 주는 거로 즐거움을 찾는 그들을 동정하게 된다. 그럼에도 넘겨듣기 힘든 말이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의무는 수행하려 하지 않고 권리만 요구한다.’
 
저 말로 뷔페 페미니즘 (이득만 취하고 의무는 피한다는 의미)이라는 용어가 탄생되기도 했다. 진지한 고찰을 통해서 나온 말이 아닌 걸 아는데도 문장의 A부터 Z까지 반박하고 싶다는 생각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스파이더맨 2의 이런 명대사가 있다. ‘큰 힘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 이 말은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말이다. 힘을 가진 자는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권리를 행사하려면 그에 따른 의무도 수행해야 한다. 이는 너무나 상식적인 말이다. 하지만 그 견해를 페미니스트에게 적용하는 게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의 세상은 전혀 평화롭지 않다. 세상은 여전히 불평등하고, 무수히 많은 기득권이 권리만 누리고 의무는 수행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이 한국 사회는 그러한 기득권이 아닌 약자가 누리는 권리에 집중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중 한 사례가 바로 여자이다. 나도 한때는 그 비판의 목소리에 반박하지 못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편의를 얻은 적도 분명히 있기 때문에 찝찝한 구석은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의무는 내가 저버린 게 아니라 타인이 앗아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글을 쓰고 있다.
 
고등학교 1학년, 상담 시간이었다. 담임 선생님에게 진로 고민을 털어놓던 중, ‘작가라는 직업이 수입이 안정적이지 않은데 내가 해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런 걸 고민하는 이상 작가를 꿈꿔선 안 된다는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선생님의 입으로부터 어차피 여자는 가장이 아니니까 수입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나왔다. 그 한 마디에 끄덕임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마주한 건 태연한 표정이었다. 선생님의 표정과 달리 내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은 그것이 여자라서 좋은 점이라는 식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농담인 것처럼 웃음을 섞어서 그게 정말 좋은 점이 맞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다는 답변만 내놓았다. 그리고 나의 진로 상담은 금세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다.
 
내가 작가의 꿈과 경제적인 여건 사이에서 고민한 것은 맞지만 그 고민만으로 나를 배우자에게 의존하게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집에서 돈 버는 건 남자의 몫이고, 여자는 남자가 벌어준 돈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이런 가치관이 널리 통용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끝난 지 오래다. 대부분의 부부가 맞벌이하고, 설령 맞벌이 하지 않더라도 여성이 집안일을 담당하는 걸 남자 돈으로 편하게 살아간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가사 노동도 엄연한 노동이며 그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면 엄청난 금액이 나온다. 그러나 일의 장소가 집이라는 이유로 그 노동은 평가절하되며 출퇴근 시간도, 임금도 없다.
 
게다가 가사노동이 여성 스스로 자처한 역할이 맞느냐에 대해서도 의문이 든다.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은 경력 단절 여성이 있다. 그들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곳에 취직해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가정에 귀속되는 결말을 맞이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기혼 여부는 여전히 여성의 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시선이 결혼한 여성이 일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이런 상황에서 집안일을 하는 여성에게 편한 것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그 시선은 나의 친척도 마찬가지였다.
 
언니의 결혼식이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직계 가족의 결혼이었기에 나는 조금 들뜬 상태였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언니, 한복을 차려입은 엄마, 언니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몰려든 친척들과 언니의 친구들 모두 나를 들뜨게 했다. 그러나 나의 들뜸은 “너도 어서 결혼해라, 여자가 공부를 오래 하려는 건 잘못된 생각이다, 여자는 일찍 안정적인 가정을 찾는 게 제일이다.”라는 이모부의 말에 바로 가라앉았다. 이모는 그 옆에서 맞는 말이라며 추임새처럼 여자에겐 가정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던 당시의 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두 분 모두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두 분의 세대엔 그게 절대적인 가치관이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 가치관이 지금 세대의 나에게도 이어지는 현실에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집안일을 정말 즐겨서 하는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실제로 내 지인은 현모양처가 꿈이라고 밝혔고, 다른 지인은 자신은 일보다 가정에서 안정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가 곧 여성에게 특정 역할을 강요하고, 그러면서 여자는 남자 돈으로 편하게 산다고 말하는 이들의 잘못을 정당화해주진 못한다.
 
나는 여성에게 의무와 권리를 동시에 지우는 사회적 맥락이 결혼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 시작한 아르바이트에서도 그 맥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곳엔 나 외에도 다른 신입이 있었다. 우리 둘은 번갈아 가며 허술한 면모를 보였고, 한 직원분은 그런 우리 둘을 가르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다른 신입이 실수를 일으키자 그는 이렇게 일갈했다.
 
“전에 있던 여자 직원이 이거보다 더 잘했어, 너 여자보다 못하면 어떻게 해!”
 
그는 그 자리에 또 다른 여자인 내가 있다는 걸 까먹은 걸까? 일을 잘해야 하는 건 맞지만, 왜 꼭 여자보다 잘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던 일에 다시 열중했다. 하지만 나의 불쾌한 기분은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나는 여자는 편의만 얻는다는 말에 내가 느꼈던 찝찝함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기저에 깔린 여자를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지 않는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여성의 한계를 멋대로 규정짓는 태도는 여성으로부터 책임과 의무를 앗아가고, 그것을 근거로 권리까지 앗아간다.
 
물론 여성은 남성과 비교해서 분명한 신체적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역할에 적절한 차이를 주는 것은 옳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런 차이를 모두 여성이 누리는 혜택이라고 보아선 안 된다.
 
초등학교 시절, 무거운 물건을 나르게 되었을 때 남자만 나오라는 말을 못 듣고 나선 적이 있었다. 나 빼고 모든 여학생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긴가민가했지만, 나도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일이기에 내가 나서도 된다고 판단했다. 그때 나를 향한 것은 여자가 여긴 왜 나왔느냐는 웃음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다시 교실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몸은 편했지만, 기분은 이상했다. 나는 그게 혼자 상황을 착각한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남자애들이 나를 향해 웃지 않았더라면, 선생님이 진지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면 나는 덜 창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제야 나는 그때의 내 기분에 제대로 된 이유를 붙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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