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독서의 전율,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리뷰 [도서]

글 입력 2019.10.03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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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피라이터다. 직업을 말하면 사람들의 눈썹이 크게 올라갔다 내려온다.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을 본 듯이 말이다. “영감은 어디서 얻으세요?”라는 말도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지하철이나 인터넷에서요.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영감을 얻을 수 있다. 라는 대답을 들으면 질문자의 표정은 금방 ‘재미없음’으로 돌아간다. 그들에게 카피라이터는 커피 마시다 불현듯, 미술관에서 여유롭게 그림을 관람하다 문득 영감이 떠오르면 그걸 붙잡는 전설 속 존재 같다. 모차르트나 슈트라우스 같은 천재적인 사람은 그럴 수 있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은 깊게 파는 과정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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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저서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에 내 마음을 대변하는 구절이 나온다. “영감이라는 단어는 이미 낭만주의 작가들에 의해 엉망이 되었네. 나는 영감을 지적 능력이나 천부적 재능이라고 보지 않네. 그건 작가의 흔들리지 않는 열정, 뛰어난 기교가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로 드러나는 일종의 화해라고 생각하네”(p.337) 산재한 영감을 어떻게 붙일지, 붙였을 때 맞는 말인지, 재미있는지 등을 고려하며 아이디어를 숙성해야 한다.


쉬워 보인다. 직접 겪어보면 달라질 것이다. 단어 하나를 쓸 때도 맞는 단어인지, 꼭 이 단어를 써야 하는지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마음 같아선 오랜 시간 끌고 싶다.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을 쓰기 위해 15년이 걸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 당장 내일 오전 CD님께 아이디어를 보여드려야 하고, 광고주께 보고해야 한다. 한정된 시간과 경험 속에서 안을 꾸려야 한다.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아침에 안을 가져가면, 살아남는 건 극소수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광고주 보고를 하고, 안이 결정된 뒤부터 정신없이 바빠진다. 카피를 정교화하는 과정을 다시 거친다. 고생을 한 뒤 나온 결과물이 마음에 들 때도 들지 않을 때도 있다. 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기에 그런 불만은 그럴 수 있지, 하곤 접어둔다.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속이 빈 기분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 전시에 가고, 독서하고, 인터넷을 찾아본다. 위화의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은 가장 바쁠 때 시간을 억지로 내어 읽은 책이다. 이 책은 음악과 문학에 대한 위화의 방대한 경험을 담은 책이다. 포크너, 보르헤스, 체호프를 포함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부터 차이콥스키, 모차르트, 쇼스타코비치 등 음악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곡가에 이르기까지 세기를 뛰어넘는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자기 성찰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가 생각 엮는 작업을 꾸준히 했다는 점이다. 에세이 하나를 쓰기 위해 읽고 들은 건 물론 그 뒷이야기까지, 얼마큼 많은 시간을 쏟았을지 입이 떡 벌어진다. 정말 대단한건 콘텐츠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소화해 자신만의 관점을 냈다는 거다. 광고도 그렇다. 어떻게든 자신의 관점을 담아 소화해야 한다. 나도 문화 예술 콘텐츠를 접하고 나면 그에 대한 글을 쓴다. 위화처럼 한 주제에 대해 원고지 100장 (정확한 수치는 아니다) 이상의 글을 쓰면 좋겠지만 아직은 어렵다. 작가가 인고의 시간을 거쳐 품어낸 진주 같은 글을 이렇게 쉽게 보는 게 미안해질 정도다.


위화의 글은 볼수록 힘이 있다. ’클라이맥스’ 챕터에서 클라이맥스를 찍었다.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단편 소설을 보는 듯하다. 쇼스타코비치의 우울하고 불안한 유년에서 출발한 에세이는 우울한 작곡가의 성공과 말년을 지나, 고통스러운 유년을 보낸 너새니얼 호손의 이야기로 향한다. 전의 이야기를 되풀이하듯 위화는 너새니얼의 우울한 유년과 그가 《주홍 글씨》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까지를 다룬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이 정점을 찍을 듯 찍지 않았듯, 《주홍 글씨》의 헤스터가 기쁨을 누린 듯 누리지 못했듯, ‘클라이맥스’ 챕터도 정점을 찍는 듯하다 갑자기 발을 빼버린다. 정점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서사에 독자는 힘이 빠지기보단 차분해진다. 몰아치는 감정선이 사라지고 서술 자체에 대한 감상이 남는다. 내 경우는 경외였다. 작가가 두 거장의 작품을 접하고 느낀 감정을 이렇게나 선명하게 그릴 수 있는지. 자신이 느낀 바를 명확하게, 그리고 독자가 그 선을 따라가면서 읽히게 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까.


광고도 똑같다. 설명하는 게 아니라 느끼게 해야 한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자꾸 일방통행을 하지만 말이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읽기 잘한 책이다. 요즘 기준으로 한 챕터의 분량이 길긴 하지만, 양질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깊게 파다가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몇 번 있었는데,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을 읽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깊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인고의 시간은 필수라고 생각하며. 내게 영감과 배움을 준 위화의 신작, 책을 덮은 뒤에도 머릿속을 맴도는 작가의 서문을 인용하며 리뷰를 마치겠다.


“하지만 수직낙하가 아니라 활공하며 떨어지기 때문에 금방 분리된 또 다른 만만을 만나 날개를 나란히 붙이고 날아오를 수 있다.” “매 차례의 하강은 새로운 날개를 찾아 비상하기 위한 과정이다. 하늘은 충분히 높고 상대를 찾는 만만은 하늘 가득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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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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