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가장 ‘보통의’ 명절 [사람]

글 입력 2019.09.28 0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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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나의 몇 안되는 낙 중 하나는, 일주일에 세 번 꼬박꼬박 요가 수업을 받는 것이다. 좀처럼 운동에 흥미가 없었던 내가 점점 요가에 흥미를 붙여가는 이유는, 몸과 마음이 개운하고 편안해지기 때문도 있지만 같이 운동하는 분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꽤 재밌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다니는 클래스에는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강생과 선생님이 모두 주부 분들인데, 그렇다 보니 운동 직전 잠깐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가정과 남편에 관한 것이 주를 이룬다. 나는 마치 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흥미롭게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


추석 연휴 직전의 요가 수업 날이었다.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한 후 말려 있던 요가 매트를 펼치고 있었을 때, 먼저 와 계셨던 수강생 분과 선생님 두 분이 명절에 관한 얘기를 시작하셨다. 제사며 시댁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내게도 집에서 아직 차례를 지내는지 물으셨다. 나는 아니라고 답했다.


작년 초 ‘이제 차례도 지낼 만큼 지냈고, 그동안 차례 준비하느라 애들 엄마도 고생했으니 그만 지내자’는 아빠의 강력한 건의를 할머니께서 받아들이셨기 때문이었다. 부럽다는 말들이 이어졌다. 다들 차례를 안 지내는 추세인데 왜 우리 시댁은 안 그러는지 모르겠다, 시어머니가 올해는 친정에 가지 말라고 은근히 압박을 줬다, 우리 남편은 심지어 차례 지내는 걸 좋아한다… 푸념같은 말들이 한데 뒤섞여 공간을 가득 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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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난 다음날, 본격적인 연휴가 시작되었다. 매스컴에서는 매년 명절마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대신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비율이 엄청나게 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심지어 전국의 몇몇 종갓집에서도 차례를 간소화한다는데. 어쩐지 내가 피부로 느끼는 명절의 풍경은 그닥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대부분의 친한 친구들은 여전히 친척집에 가 잔소리를 들을 예정이라고 말했고, 우리집 또한 차례를 폐지했으니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엄마는 그래도 친척 몇 분이 오실 테니 음식은 좀 해야 한다며 부지런히 장을 봐오셨다.


사실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매년 명절마다 펼쳐지는 풍경에 딱히 의문점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큰집인 우리집에 사촌들이 북적북적 모여서 밥을 먹고, 밥을 다 먹으면 어른들의 술자리가 계속 이어졌다. 늦은 밤이 되도록 부동산, 정치, 교육, 지인을 소재로 한 토론 또한 계속되는 것이 우리집의 연례행사였다.


고모들과 할머니, 엄마, 새언니가 명절때만 쓰는 대문짝 만한 상에 한가득 음식을 차리면 고모부들과 아빠, 사촌오빠들이 먼저 앉아 식사와 반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식사 순서가 나와 사촌언니들, 엄마, 고모들, 새언니였다. 큰 상 옆에 작은 상 두 개를 더 놓고, 여유롭게 양반다리를 하고 밥을 먹는 큰 상 앞의 식구들과 다르게 옹기종기 붙어 앉아 밥을 먹었다. 그 마저도 엄마와 고모들은 편하게 식사를 하지 못하셨다. 큰 상에 있는 반찬이 혹여라도 부족하면 얼른 그것을 채워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 나는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상 치우는 것을 도왔다. 남자 어른들과 오빠들은 거실에서 후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나에게 그건 매우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약 20년 동안 보고,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배운.


문득 명절 즈음만 되면 평소보다도 더 음식 준비 걱정에 시달리는 엄마가 안쓰럽기 시작한 건, 대학에 입학하고 난 후였다. 그 때부터 사촌 언니, 오빠들이 하나 둘씩 가정을 꾸리면서 명절날 우리집에 모이는 인원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일은 줄어들지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엄마의 체구만 점점 말라갈 뿐이었다. 명절날 어김없이 거실에 둘러앉아 점점 거나하게 취해가던 남자 어른들을 보며, 그때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아, 이건 뭔가 이상하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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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렇게 몇 년 동안 품어온 의문이 처음으로 분노가 되어 터진 것이, 바로 이번 추석이었다. 차례를 없앤 것은 물론 맞이해야 하는 친척의 수가 고작 세 명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명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걸. 엄마와 고모들과 새언니의 명절이 세대가 지나 내게도, 그리고 내 다음 대에도 결코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불안감이 엄습한 건 한순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당연하다는 듯 남자 어른들이 여자 어른들에게 ‘물을 떠오라’ 시켰을 때, 그리고 남자 어른들과 같은 상에 앉아 맥주를 한 잔 마셨다는 이유로 나와 여동생이 ‘여자가 아무 데서나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다가온 것만 같았고, 그 날 저녁 나는 결국 분노하고 말았다. ‘아,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가 수업 시간에 공간 안을 가득 채웠던 푸념들, 매년 명절마다 우리집 거실에서 벌어지던 그 ‘일상적인’ 풍경들을 수없이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그 날은 새벽까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명절이 끝났다.


여기까지가 바로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던, 아주 ‘일상적’이었던 나의 이번 명절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일상적인 풍경에서 오는 익숙함은 아마 이번 명절로 끝이 날 듯하다. 알이라는 하나의 작은 세계를 깨고 나온 새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듯, 나도 늘상 보아왔던 명절의 풍경을 보며 처음으로 불편함의 눈을 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명절마다 나의 마음은 전과 같아질 수 없을 것이다. 해가 갈수록 나의 불편함은 점점 더 배가 되어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 내려왔을지도 모르는 당신의 명절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당신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그건 상관없다. 당신의 추석은, 혹은 당신 주변 사람들의 추석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당신은 그 풍경 속에서 어디에 있었고, 어떤 사람이었는가?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걸 묻고 싶다. 지금까지 들려준 나의 이야기, 당신도 어딘가 한 구석 쯤은 공감할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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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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