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똑같이 생겼는데 전혀 다른 뜻이라고? [시각예술]

겉모습만으로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미술들
글 입력 2019.09.27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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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예술작품의 외양만으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표절 여부의 기준은 분야마다 다르고 장르마다 다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각예술 영역에서 그 기준으로 외양의 유사성을 따지는 건 당연하게 느껴진다. 말 그대로 '시각'예술이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기 다른 작가에 의해 그려진 두 작품의 양식이나 주제가 겹치면 둘 중 한 명이 상대방을 따라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시작점에서 뒤샹이 주창한 ‘작가의 아이디어’는 작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뒤샹은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작품의 유일성이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작가가 대상에 부여한 의미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시대부터는 더 이상 작품의 외양만으로 작가의 목적을 한 눈에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아무리 작품의 외양이 서로 비슷하다고 해도 작가의 의도가 다르다면 전혀 다른 작품으로 받아들여지며 수많은 작품들은 개개의 독창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똑같아 보이는데 의미는 전혀 다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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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브라크의 <포르투갈인>(1911-1912, 캔버스에 유채, 117cm x 81cm),

피카소의 <기타 치는 여인>(1911-1912, 캔버스에 유채, 100cm x 64cm)



가장 먼저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을 보자. 브라크와 피카소는 입체파 그룹 안에서 긴밀히 교류했고 이는 그들의 그림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좌측은 브라크, 우측은 피카소의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누가 그렸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흡사하다. 그러나 이 두 그림은 각각 포르투갈인과 기타를 든 여인을 묘사한 것으로 엄연히 다른 대상을 주제로 선택한 작품들이다.


그들은 서로의 작품을 사람들이 누가 그린 건지 헷갈려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하지만 씁쓸하게도 당시 사람들은 피카소의 그림을 원했다.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은 크게 다를 바 없는 브라크의 그림보다 무려 4배가량이 더 비쌌다. 그래서 피카소는 자기 그림에 서명을 하기 시작했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활동했던 두 화가는 이로 인해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목적은 결국 흡사했다. 입체파의 거대한 두 축으로 불리는 피카소와 브라크는 '분석적 입체주의'라는 사조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으로 살펴볼 몬드리안과 브랑쿠시의 작품은 유사한 외형을 지님에도 그 안의 목적의식은 유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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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1930, 캔버스에 유채, 46cm x 46cm),

브랑쿠시의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1923-1929, 캔버스에 유채, 106.2cm x 106.5cm)



몬드리안과 브랑쿠시, 이들의 작품을 보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몬드리안은 삼원색과 흰색, 검은 테두리를 사용했고 브랑쿠시는 시커먼 사각형 하나만을 흰 배경 한가운데 그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두 작품 다 색깔을 채운 사각형일 뿐이다. 그러나 역시 두 화가의 의도는 전혀 달랐다.


먼저 몬드리안의 대표작 <빨강, 노랑, 파랑의 구성>은 ‘최적의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거듭 노력한 과정의 결과물이다. 그는 삼원색과 선, 그리고 사각형의 반듯한 직각의 선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다가가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모두를 위한 대중적인 미술을 목적으로 두었던 셈이다.


반면 브랑쿠시는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본인의 개인적 가치에 집중했다. 그는 흰색을 ‘공백’, 이와 대조되는 검은색의 완벽한 정사각형은 ‘자연에서 볼 수 없는 순수한 형태’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 작품을 자신의 내면을 비우는 과정을 밟아가면서 얻은 깨달음이라고 생각했다. 즉 몬드리안과 브랑쿠시는 둘 다 사각형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자 했지만 몬드리안의 방향성은 보편적인 감상자를 향했고 브랑쿠시의 방향성은 작가 개인의 내면을 향했다는 점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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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부터 에릭 사마크의 <소리 나는 돌>(2017)과 이우환의 <관계항-지각과 현상>(1969)



이제 현대로 넘어와 살펴볼 작품은 에릭 사마크의 <소리 나는 돌>과 이우환의 <관계항-지각과 현상>이다. 두 작품 모두 자연물 그대로의 바위를 이용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 바로 에릭 사마크의 작품은 숲속에, 이우환의 작품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에릭 사마크의 바위는 자연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바위와 함께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자연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 소리는 설치 장소의 실제 소리와 어우러진다. 이로 인해 그 작품은 그 자체로 자연 경관의 일부로 녹아들고 감상자들은 자연과 소통할 수 있다.


반면 이우환의 바위는 유리판 위에 놓인다. 자연물 그 자체인 바위와 인공적으로 생산된 유리판은 서로 대응하고 유리판은 바위에 부딪혀 깨진 양 금이 가 있다. 이는 곧 산업사회와 자연과의 대응을 의미하며 감상자로 하여금 어떤 대상이 타자와 이루는 관계에 주목하게 한다.


이렇듯 두 작가 모두 같은 소재를 사용했지만 작품이 향한 방향은 전혀 다르다. 에릭 사마크는 주변 환경과의 조화, 그리고 그 풍경과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 집중한다. 반면 이우환의 작품 속 바위를 두고 과연 깨진 유리판과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는 듯 하면서도 동시에 팽팽히 대립하며 부조화를 이룬다.


바위는 또한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깔끔히 정돈된 전시 공간에 맞닥뜨리며 사물과 그것이 놓인 환경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재고하게 한다. 이우환의 작품 속 바위와 마찬가지로 본래 위치에서 분리되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자리에 완전히 적응한 듯 보이는 에릭 사마크의 바위와는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셈이다.


*


이렇듯 어떤 작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작가를 빼놓을 수 없다. 뵐플린과 같은 미술사학자는 미술사 연구에서 작가의 일생에 지나치게 주목하는 것을 적대시했지만, 오늘날 다양성이 존중되는 시대의 미술을 작가의 이야기 없이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의 작품세계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에 앞서 필수적인 것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뒷받침할 수 있는 뭔가를 다져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작 활동의 목적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나의 작업은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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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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