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자의식의 환상에 갇혀버린 현대인, 연극 킬롤로지

글 입력 2019.09.23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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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전쟁의 시대다. 첨단기술은 타인의 존재를 사회발전이라는 연기 속에서 더욱 흐릿하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은 승리와 명예라는 가죽을 뒤집어 쓰고, 서로를 '너'가 아닌 '적'으로 마주하기 시작했다.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기보다 한명이라도 더 죽여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마음으로, 방식으로 오늘날 여러 매체와 사회 구조에서 수없이 전쟁이 반복되었다.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비교가 가능해진 시대는 포탄 속에서 조준을 하지 않아도 잔혹한 폭력과 경쟁을 부추겨왔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전쟁의 포탄은 결코 사람의 몸에만 향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체만을 죽이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타인의 존재를 죽였다. 전쟁의 시대에서 공감과 동정은 패배를 뜻한다.

연극 <킬롤로지>는 이런 현대사회에 던지는 영리한 메시지다. 폴,알란,데이비 이라는 세 등장인물은 모두 타인의 존재를 잊어버린 현대사회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단절된 가족관계다. 폴은 이상주의자인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고, 알란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족으로부터 도망갔으며, 데이비는 버려진 아들이다.


꼭 가족이 아니더라도 이들 주위에는 의지하고 사랑할 사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다. 후술하겠지만, 이 중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 사람이 있다. 고통을 이해하게 되는 그는 뒤늦게 나마 관계의 따뜻함을 기억해낸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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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측면에서 <킬롤로지>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낸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관점에서 이 연극은 폭력적인 게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연극에서는 '킬롤로지'라는 잔혹한 게임의 형태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 연극이 게임이라는 한 매체에대한 저격을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필자가 읽어낸 이 게임의 메시지는 타인의 존재가 사라져버린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회복해야하는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폴의 말대로, 잔혹한 게임 하나가 세상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폴의 게임은 타인의 얼굴을 더 보지 못한 사회에서 팔렸기 때문에 더 잘 받아들여진 것이다. 물론 그의 게임이 사회의 폭력성에 기여했을지도 모르지만, 폴의 게임 자체가 폭력이라는 충분조건인 것은 아니다. 그 증거로 데이비는 킬롤로지가 개발되기도 전에 한평생 끔찍한 폭력의 희생자로 살아왔다. 그를 진정으로 희생자로 만든 것은 그를 인격적 존재가 아닌 놀잇감으로 만든 현대 사회의 끔찍한 냉혹함에 젖은 현대인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딱 한번, 이 연극에서 타인의 얼굴을 본 사람이 있다. 바로 데이비의 아버지, 알란이다. 그는 결국 폴을 죽이지 못한다. 그가 그러지 못한 것은, 폴의 얼굴에서 그의 아들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자는 알란이 폴을 죽이지 못했던 부분이 이 연극에서 제시하는 한줄기 빛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대 사회의 변화와 사라져가는 동감의 시대에서 폭력을 끊을 수 있는 것은 결국 관계의 회복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것은, 죽이려는 대상이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되는 방법은 애정어린 관계 뿐이다.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알란이 느낀 감정은, 데이비가 죽기 직전까지 너무나 바랬던 것이었다. 미친듯이 페달을 밟아 달려 그가 닿길 바랬던, 의미있는 사람과의 따뜻한 관계말이다. 데이비가 품고 있었던 알란이라는 별은 너무 늦게 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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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알란을 주저없이 내리친 사람이 있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해 분노하고, 슬퍼하던 폴이다. 그가 알란과 보인 차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아버지가 죽은 뒤 아버지가 말했던 대로, 무언가 더 '빛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는 입양을 한다. 서슴없이 아버지라 부르고 사랑을 고백하는 사랑스러운 아이지만, 그는 더이상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파양하고 만다.

폴은 어쩌면 그 아이를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과거 이력을 고려해봤을 때,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받고 싶은 아이'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그의 개인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깊은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도 아버지의 기대를 받지 못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시도때도 없이 걱정하는 것은 관심이 없지 않고서야 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 느끼지 않고, 일종의 귀찮고 힘든일로 받아들인다. 그는 심지어 아이를 '쓸모없는 것'으로 말하고 만다. 그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가장 듣기 힘들어했던 말을, 비슷한 처지의 아이에게 말하게 된 것이다. 결국 폴은 모든 것을 버려버리는 선택을 하고만다. 아버지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폴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울지는 몰라도 가장 불행한 삶을 살게될 것이다.

무대의 구성은 간단하다. 서로 엮이지 않고 그 안에서 맴도는 싸늘한 현대인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듯이, 세트는 단순하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세 이야기는 개인적 독백 형식으로 독립적으로 진행된다. 이런 형식 속에서 관객들은 무엇이 환상이고 현실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왜 폴이 데이비와의 약속을 저버렸는지, 폴이 왜 아버지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이런 이야기의 전개 방식을 이용해 알란의 환상도 관객들에게 현실처럼 보이도록 연출하기도 한다.

중간에 알란이 폴을 죽이러갈 때를 빼고는 그들의 이야기는 결코 교차되지 않는다. 무대의 뒷편에 보통 자아와 성찰을 상징하는 세 개의 거울이 있지만, 화해와 반성의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연극이 결국 하고 싶었던 것이 관계의 회복임을 고려할때, 거울은 통상적인 상징과 다르게 하나의 갇힌 세계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등장인물의 거울들은 결국 그 자신만을 비춘다. 현대인들은 반성의 도구가 아닌, 거울에 비친 나를 왜곡하면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깜깜한 하늘에서 빛나는 별을 바라보지 못하고.




킬롤로지
- Killology -


일자 : 2019.08.31 ~ 2019.11.17

시간
평일 8시
주말 및 공휴일 3시, 6시 30분
월 공연 없음

*
8/31(토), 9/1(일) 6시 30분 공연만 있음
9/12(목) 3시, 6시 30분
9/13(금) 4시

장소 :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

티켓가격
R석 55,000원
S석 40,000원

제작
(주)연극열전

관람연령
만 16세 이상

공연시간
125분 (인터미션 :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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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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