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폭력의 경계, 그 사이에 선 사람들. 연극 "킬롤로지"

글 입력 2019.09.23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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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공연사진


뛰는 음악 소리와 아래에서 치닫는 시린 불빛. 그리고 세 남자의 때로는 담담한, 적어도 담담하려고 하는 듯한 독백. 연극 킬롤로지는 그렇게 시작된다.

사람을 끔찍하고, 잔인하게 죽일수록, 그리고 그 끔찍한 광경을 직면할수록 더 높은 점수를 얻는 게임 ‘킬롤로지’가 대 성공을 거둔 세상. 그 게임의 개발자인 ‘폴’과 게임과 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한 ‘데이비’ 그리고 아들의 복수를 바라는 데이비의 아버지 ‘알란’의 독백은 번갈아 가며 진행되며 서로와 마주치거나 스쳐 지난다. 그들은 서로와 무대 밖의 또 다른 인물들 사이를 살며 그 안에서 경험하는 일상과 폭력 그리고 결핍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극열전] 킬롤로지 티저 포스터.jpg
 


별 : 결코 닿을 수 없는 그곳.


굳이 킬롤로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큰 줄기를 몇 가지로 나누어야 한다면 결핍과 폭력 그리고 예술로 나누어지지 않을까 싶다. 종종 별과 손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등장하는 세 인물의 결핍은 특히 가족 관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 마지막까지 온전히 채워지지 못하며 극 전체에 드리워진다.
 
알란은 아들을 떠나고, 떠나보내고, 되돌릴 수 없이 망가진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상상 속의 아들을 만들어 내고, 데이비는 무책임한 아버지와 무관심한 어머니 아래에서 결국 유일하게 그를 잡아 주었던 가족 메이시를 지키지 못하고 탈선하며 폴은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증오하며 자신을 잡아줄 누군가를 스스로 포기한다.

*

폴은 너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며 별에조차 갈 수 있을 것이라 말하는 아버지의 말씀을 평생 기억하지만, 데이비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달리다 죽음을 마주한다. 알란의 상상 속 10배는 나은 사람이 된 데이비는 아버지를 편안하고 안락하게 떠나보내 주지만 자신을 잡아주었던 아버지의 손을 기억하는 폴은 마지막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제는 마르고 주름진, 어릴 적 자신을 잡아주었던 손을 있는 힘껏 잡아 쥐면서, 그 망가진 육체 속에 아버지가 갇혀 있음을 알면서도 폴은 아버지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을 꽉 잡아줄 존재, 폴은 그것을 위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아이를 입양하지만 아이가 자신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일이 몇 차례 발생하자 얼마 가지 않아 파양한다. 아이를 향한 극도의 걱정, 자신의 불안은 웃음과 허세로 가려진다. 폴은 자신의 결핍을 감추려는 듯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폴이 아닌 다른 사람이 조명을 받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어둠 속에 폴이 가려져 있을 때는 조금은 더 진솔하게 존재하고 있지 않았을까?

단지 폴뿐만 아니라, 빛을 받지 않는 인물들이 무대 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그 순간들이 가장 꾸밈없이 다가왔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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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공연사진


생각하자면 정말 불공평한 일이다. 누군가는 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했던 것들, 애정과 관심을 포함한 몇가지 것들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괜찮을 거라고 웃으면서 이야기해 주는 아버지가 데이비에게는 없었다. 그는 그런 웃음을 알지 못했고, 그가 괜찮을 것이라 말하며 달래 주었던 메이시를 지키지 못했다.

그에게는 별이 허락되지 않는데 어떻게 공평할 수가 있을까? 폴의 아버지는 세상의 정의와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말하지만 한번 잡아 주었던 아들을 다시는 잡아주지 않았는데 그것이 폴에게 공평했을까? 결핍과 불공평, 그리고 그다음으로 폭력이 다가온다.



폭력의 경계 : 그 사이에 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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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공연사진


극 중 가장 직관적으로 폭력의 피해자인 데이비는 거리는 온통 사이코로 가득하고, 매일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순전한 기적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세상은 온통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폴의 양아들인 에단이 거리를 안전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퍽 대조적인 말이다. 그런 데이비는 결국 폭력 속에서 메이시를 잃고 그런 데이비를 안부를 걱정하는 학교 선생님의 얼굴에 의자를 집어 던진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선생님은 무섭지도, 강하지도 않으니까. 데이비는 그렇게 폭력의 가해와 피해의 경계에 서서 굴러떨어진다.

경계에 선 것은 폴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실과 게임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고, 그건 그 사람이 바보천치인 것이라고 킬롤로지를 변호하던 폴은 자신의 집에 침입한 알란과의 다툼 과정에서 그 경계에 선다. 게임에서만 폭력을 휘둘러 보았지 현실에서는 그런 적이 없다던 폴은 스패너를 쥐고 통쾌하게, 여러번 알란을 가격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그는 예술과 현실의 폭력에 경계에 선다.



폭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극 중의 알란은 폭력은 학습되는 것이라고, 군인들이 훈련을 통해 살인에 익숙해 지듯이, 우리 역시 게임, 영화와 같은 것들을 통해 폭력을 학습한다고 주장한다. 극 중에서 알란을 대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지만 제법 일리가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예술 뿐은 아닐 것이다. 데이비가 거리에서 강자에서 약자로 흐르는 폭력을 학습했듯이, 그리하여 스스로 폭력의 피해자이면서도 친절한 선생님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나를 ‘저 분’이라고 부르는 아저씨와 그의 8살 짜리 여자애의 자전거를 빼앗는 것처럼. 일상 어디서든 우리는 폭력을 학습할 수 있다.

여전히 질문들이 남는다. 예술은 정말, 공익을 위해 윤리적이어야 할까? 결핍에서, 폭력에서, 불공평에서 비롯되는 폭력들, 학습되는 폭력들, 우리는 거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가 되었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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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공연사진


슬픈 가정이 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는 불가능한 가정은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한번 망가진 것은 되돌릴 수가 없다고 말하는 알란의 말처럼, 죽은 데이비는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알란의 상상 속에 살아있는 데이비의 모습은 끔찍하게 슬프다.

알란의 상상 속의 데이비는 알란 보다도 10배는 더 나은 사람이고, 알란이 그를 10배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처럼 알란의 마지막 순간을 평온하고 안락하게 돌봐준다. 알란은 데이비를 책임지지 않았고, 그 죽음도 함께해 주지 못했지만 데이비는 알란을 책임진다. 비록 그것이 데이비를 잘 모르는 알란의 상상이 만들어낸 환영일지라도, 그곳에는 폭력도 결핍도 없다.


[김민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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