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에 대한 담론, 알랭 드 보통과 황경신 [도서]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는 것
글 입력 2019.09.2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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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 필자가 들었던 경제학 수업 시간에 교수님은 빅데이터를 활용해 특정한 단어들이 웹에, 책에 얼마나 자주 쓰였는지 연도별로 비교해서 보여주셨다. 사랑, 우정, 희망, 꿈, 용기, 가족 중 제일은 사랑이었다. 연도별로 빈도수의 차이는 나지만 언제나 모든 단어들보다도 사랑은 우위에 있었다.


많이 말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나 일생을 거치면서 사랑을 경험할 것이다. 그렇다면 많이 말해진다는 것은 쉬운 것일까 어려운 것일까, 내 경우에는 어려워서 사랑에 관한 책을 읽는다. 그중 나의 사랑 철학에 영향을 미친 책 두 권을 소개한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 일상



중학교 무렵부터 로맨틱 코미디 영화라는 영화는 쌓아 놓고 본 것 같다. 유치하고 찬란한 로맨틱 코미디 속 여자 주인공에게는 항상 위기마다 멋진 남자 주인공이 나타났다. 그런 영화들을 보며 '첫 키스는 꼭 놀이터 그네에 앉아 있다가 해야지' 하는 맹랑한 다짐을 하기도 했다.


언제나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연애를 해보니 사실상 설레고 두근두근 짜릿한 순간은 짧고, 지지고 볶고 마음 상하는 순간은 길었다. 영화와 달리 내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실질적인 해결은 모두 나 혼자 해야 했고, 첫 키스는 이게 뭘까 싶었다. 이제껏 봐왔던 사랑과 직접 겪은 사랑의 격차는 컸다. 나와 다른 모습에 끌렸다가 나와 달라 안 맞는다고 이별을 고하는 내 입과 마음이 우스웠다. 결국 끝을 보면서 이토록 가벼운 사랑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했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 일상’에서 알랭 드 보통은 러브스토리는 누군가 우리를 다시 보지 않으려 할까 봐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항상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때 시작된다고 했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에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 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고 말했다.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라는 유명한 노래 가사와 달리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은 단순한 열정을 넘어선 기술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속 은밀한 구석에서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예측하고, 우리의 심정을 읽어내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면에서 더 나아지게 해줄 연인을 그린다. 이건 '낭만적'인 것 같지만, 재난의 예고이다.





황경신, 밤 열한시 '어쩌면 너는'


모든 것들을 언제나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나는 사랑에서도 그렇다. 쉽게 누군가를 곁에 두기 두렵다. 가벼운 마음으로 곁에 두었다가 속수무책으로 무거워지는 마음이 무섭고 두렵다. 아직 내 마음속에는 지나간 사람이 있는데, 새로운 사람으로 곧장 덮어버려도 되나. 아니 나만 이렇게 끙끙 연애를 어렵게 생각하나 친구들의 애인이 바뀔 때마다 외로웠다. 이따금 내 무거운 마음을 덜어 가볍게 외로운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다. 그러다 황경신 작가의 밤 열한시를 읽었다.



어쩌면 너는

너무 많은 것들이 너무 자주 변한다는 생각과

또 어떤 것들은 생이 끝날 때까지

결코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절망이라는 벼랑에 서서

무구하고 잔인한 바다를 내려다보았을지도 몰라

그러나 단 하나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어

조금만 더 걸어보자고

조금만 더 움직여보자고 스스로를 부추기며

한숨 같은 심호흡을 몇 번이나 반복했을 거야

 

 

어쩌면 너는

너무 오랫동안 사랑을 기다려왔다고 중얼거리는 밤을

수없이 보냈을 테지

가까이 끌어다 곁에 두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꽃이 피고 또 지는 것처럼

바람이 불어오고 또 불어가는 것처럼

네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가 스르르 시들어가는 그 감정을

미처 사랑이라 부를 수는 없었겠지

 

 

어쩌면 너는

성급하고 체할 것 같은 복잡한 관계로부터 달아나

홀로 겨울의 심장에 이르는 것도

썩 나쁘진 않을 거라 생각하지

응시할수록 점점 희미해지는 사랑을 향해

나쁜 말을 퍼부으면서 말이야

하지만 그건

사랑이 그만큼 너에게 무겁기 때문이지

네가 하필이면 그런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지

 

 

그러니 어쩌면 너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남몰래 사랑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걸지도 몰라

불면의 밤들을 고스란히 통과하고

유혹의 눈웃음을 외면하고

섣불리 심장을 꺼내 보이지 않았으며

 

 

모든 옳은 것들에 대한 존경과

모든 영원한 것들에 대한 경외를

한시도 멈추지 않았으니까

 

 

네가 원하는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을 알지 못하여

너는 온 세상의 모퉁이를 서성이지

그러나 정말로 이상하게도

네가 보았다고 생각하는 사랑의 얼굴은

두서없이 흔적없이 서둘러 사라져버리고 말지

그때 너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생각할 거야

 

 

그저 이 자리에 가만히 서서

사랑을 기다라는 것이

어쩌면 가장 현명한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모두가 연애가 끝나면 부질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겪는다. 잠깐 피고 질지라도, 그 끝이 안 좋을지라도,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른 너와 내가 서로의 기억과 마음과 시간을 나누며 함께 있음에, 또 함께 있기 위해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배려하고 애씀에 그렇게 마지막까지 아등바등 사랑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사랑을 겪는다.


앞으로도 결코 사랑을 쉽게 생각하지 않기를, 유혹의 눈웃음을 외면하고 섣불리 심장을 꺼내 보이지 않기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나를 속이지 않기를, 사랑을 시작하는 것보다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 알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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