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여성들이 만들어가는 즐거운 레슬링 한 판 - 글로우 [TV/드라마]

글 입력 2019.09.19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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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레슬링 프로를 처음 봤다. 친구의 동생이 보던 중이었는지 TV에 틀어져 있던 그 레슬링 프로에서는 우락부락한 레슬링 선수들이 화려한 분장을 하고 서로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었다.


친구는 그게 모두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귀띔해 주었다. 사실은 승자와 패자가 전부 정해져 있는 경기이며, 서로를 향해서 하는 기술도 이미 충분한 연습 후 나오는 거라고. 그때는 그런 레슬링을 사람들이 왜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매우 폭력적인 싸움인데, 만일 그 격렬함을 보기 위해서 레슬링을 보는 거라면, 승자도 패자도 이미 정해져 있는 경기가 관중들의 성에 찰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기억 때문인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레슬링 여인 천하 : GLOW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에도 과연 재미있을까? 하는 의문이 앞섰다. 글로우는 앞서 흥행에 성공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제작팀이 만든 드라마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워낙 재미있게 봤었기 때문에 별다른 고민 없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으나, 레슬링에 대한 드라마인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지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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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즌 하나하나를 거칠수록 그런 걱정과 의심은 저 뒤편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레슬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덜 폭력적이었고, 더 흥미로웠다. 적어도 글로우에서 하는 레슬링은 폭력적인 싸움보다는 서로 합을 맞춰 액션을 하는 연극에 가까웠다. 캐릭터가 있었고, 각각의 캐릭터가 다른 캐릭터가 레슬링을 통해 만들어가는 서사가 있었다.


글로우도 이런 레슬링의 매력을 드라마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986년에 결성되었다가 2002년도에 사라진 레슬링팀 글로우를 모티브로 드라마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레슬링과 그에 관련한 에피소드가 더욱 생생하고 자세할 뿐만 아니라 시즌 2, 8회에서는 드라마 한 회차를 몽땅 레슬링 글로우 쇼처럼 제작, 시청자들에게 ‘드라마’글로우 보다는 ‘레슬링 쇼’ 글로우를 보여주며 드라마의 정체성을 견고히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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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레슬링’ 글로우를 보다 더 즐겁고 편안하게 볼 수 있었던 까닭에는 드라마 글로우의 완성도 높은 서사도 한몫했다. 글로우에는 오랜 기간 배우로서의 성공을 꿈꿨지만 계속해서 실패를 맛본 무명 배우 ‘루스’와, 배우로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었으나 임신으로 커리어가 끊기고 결혼생활의 위기를 겪고있는 글로우의 스타 ‘데비’, 글로우의 연출을 맡았으나 열정 없는 B급 공포 영화 감독 ‘샘’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이 세 명을 주축으로 펼쳐지는, 글로우 팀에 속한 여성 레슬러들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그중에서도 ‘데비’와 ‘루스’가 레슬링을 통해 파트너십을 다져나가는 이야기는 흥미를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서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일하는 여성들에 관해서 이야기해온 고정관념들을 속 시원하게 깨뜨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아이를 가진 여성은 일보다 육아를, 가정을 더 중시하기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데비’는 수많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의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또 누군가는 여성들이 매우 ‘감정적’이며 서로를 싫어하기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글로우의 루스와 데비는 과거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가지게 된 서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일, 즉 레슬링에서는 완벽하게 협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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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글로우가 극의 배경인 1980년대를 재현하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그 당시 미국에는 편견과 혐오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뚜렷하지 않았다. 시대 배경이 이렇기 때문에 극의 초반에선 다수의 시청자가 불편할 수 있는 설정들이 필터 없이 쏟아진다.


예를 들어, 흑인에게 사회 수당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게으른 ‘복지 여왕’ 이라는 레슬링 캐릭터를 맡기고, 아랍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테러리스트 캐릭터를,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베트남 밀짚모자를 씌우고 일본도를 쓰는 캐릭터를 맡긴다. 그러나 글로우는 극을 진행하면서 이러한 캐릭터들의 설정이 왜 잘못됐는지 분명히 짚고 넘어간다.


이때 드라마는 시대 배경을 바탕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했을 때 얻게 되는 효과를 매우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과거보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분명히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인종차별, 성차별 같은 차별이나 편견들을 현재의 이야기로 진행할 경우, 분명히 ‘이제 그런 이야기는 질렸다’거나 ‘이제 그런 편견은 사회에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글로우의 시대 배경이 과거이기 때문에 이런 편견들이 ‘있었다’, ‘잘못됐다’고 명백하게, 동시에 이런 편견과 차별을 지금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은유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아시안 캐릭터의 서사가 매우 흥미로웠다. 나는 앞서 아트인사이트에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을 소개하면서 드라마의 한계점으로 아시아 캐릭터에 대한 서사 부족을 꼽은 적 있다. 그러나 글로우에서는 아시안 캐릭터가 끊임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에 대해서 불평하는 모습, 그런데도 주변인들이 이에 무관심하게 대응하는 모습, 그로 인한 갈등과 해결, 그 과정에서 언급된 캄보디아 ‘킬링필드’사건까지 묵직하게 끌고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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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글로우에는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노력, 여성 중심 서사 등 좋은 점이 많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글로우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인종과 신체를 지닌 여성들이 1980년대의 무드를 담은 레슬링복을 입고 서로를 향해 신나게 몸을 던지며 하나의 쇼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옆방에 있는 언니에게 암바라도 걸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시즌 3을 막 끝낸 글로우는 이제 막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로우가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낼지 기대된다.

 

 



[권묘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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