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A to X] episode 5.

글 입력 2019.09.08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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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 to X

episode 5.



석류나무.jpg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영국식 뒷마당」



*

 

내 생각에, 그래서 나는 마침내 영국식 뒷마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낸 거야, 하고 그날 경희는 나에게 말했다.

내 생각에, 나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뭐라구요? 나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물었다.

거긴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있었단다…… 담장 안쪽과 담장 바깥쪽에…… 그네와 앵두나무와 꽃들이…… 그래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걸 깜빡 잊었지.

뭐라구요?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뭐라구요?

내 생각에, 너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경희는 내 생애 최초의 금지된 여자였다.

   

*

   


그곳에는 석류나무가 있었어. 네덜란드 아저씨와 한국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소박한 게스트 하우스는 입소문이 잘 난 덕에 외진 위치인데도 손님이 꽤 들던 곳이었어. 그곳에 짐을 풀고 사흘 동안의 생활을 준비하며, 나는 조금 막막했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 지내는 걸 유난히 겁내는 성격에 누군가를 만나고 인사를 건네고 함께 밥을 먹는 일은 내게 몹시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야.


모든 일에 큰 결심이 필요했어. 게다가 나는 완전히 타지 사람도, 관광객도 아닌, 애매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에 좀 더 난처한 기분이었어. 나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면 거짓말을 했어. 내가 이곳에서 살았었고 가족을 만나러 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고, 여행도 휴양도 뭣도 아닌 짧은 사흘간의 여정에 대해서는 얼버무리는 식으로. 비단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거짓과 비밀을 공모하며 자기를 이야기할 테지만 말이야.

 

나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하나의 꾸밈도 없이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에게 하소연을 하며 내 사정을 이해시키려 해. 대체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기 나름인데, 그 사정이라는 것은 딱하고 가엽지. 나는 그렇게 위로하며 울고 잠들고 김밥을 사 먹으로 동네를 걸었어. 맛있는 김밥집을 추천해 준 엄마는 나를 소개하지 않은 집에서 동생과 그의 남편이자, 동생의 아빠인 사람과 살고 있었어. 나는 추천받은 김밥집을 찾아 어둡고 가느다란 골목길을 헤매야 했어.

 

동네를 하염없이 걷다가 그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을 했어. 내가 이곳에 와있다는 걸 모르는 그. 억지를 부려서 그 사람에게 찾아가 내 존재를 뚜렷이 새기고 큰소리를 치고 싶기도 했어. 그 모든 상상의 불가능성을 따질수록 내 상상 속에서 나는 더 대범하고 거침없었지. 나는 숨겨진 사람이었고, 너에게 내가 ‘있음’은 불편한 것이었어.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화했어. 너는 내게 어떤 사정이 있다고만 했고, 나는 다 괜찮다고만 했어. 너는 서둘러 돌아갔고, 나는 오래 기다렸어.

 

바닷가를 따라 쭉 둘러진 담벼락에는 서로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노력처럼 띄엄띄엄 간격을 두고 한 사람, 두 사람씩 서 있거나 앉아 있었어. 그 어디쯤 나도 드문드문 앉아서 바다를 봤어. 환상에 대해 생각했어. 현실을 박살 내려는 듯 불쑥 찾아오는 환상에 대해, 그리고 파도와 그것의 공통점에 대해. 파도가 유난히 부서지는 곳을 찾아내서 그 지점을 뚫어져라, 보는 일은 정말 즐거웠어. 결국, 모든 건 바람의 일이라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

 

우리 모두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

 

경희의 말을 떠올렸어. 우리 모두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나는 경희가 말하는 앵두나무와 꽃, 그리고 그네가 있는 영국식 뒷마당이 몹시 그리웠어. 나는 그곳에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지만, 어쩌면 그곳은 내게, 우리 모두에게 익숙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곳을 정말 찾아내야겠다는 희미한 결심이 섰어. 내게는 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수시로 드나들던 영국식 뒷마당이 있다. 그리고 네게도 오직 너에게만 관대한 영국식 뒷마당이 있다. 우리는 그곳에 서로를 영영 초대하지 않을 것만 같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어.

 

우리 모두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

 

이건 일종의 주문이자, 희망 사항이자, 덧없는 중얼거림이야.

 

나는 네가 비밀을 간직하고 대처하는 일에 대해 아주 오래 곱씹었어.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비밀이 되어버리는 일은 어째서 이렇게 잔인할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만큼 우리가 잘하는 일, 동시에 신물이 난 일이 또 있을까. 비밀스러운 이야기에는 종종 환상이 개입하고 우리는 환상을 어떤 태도로 처리할지 선택해야 해.


나는 너의 난처한 얼굴을 떠올리며 우리는 아직 서로를 대하는 데에 많이 서툴다는 걸 알았어. 나는 아마 영원히 바다와 파도를 보며 마음을 달랬던 시간에 대해 너에게 털어놓지 않을 거야. 나는 괜한 환상들을 모든 움직임에 열심히 투영해가며 너에게 괜찮다는 말을 얼버무릴 거고, 너는 내게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을 둘러댈 거야. 나는 내 뒷마당으로 깊숙이, 헤어나올 수 없이, 끈적하게 들어서고 있었어.

 

너의 뒷마당은 어떤 모습이니. 그곳에는 어떤 나무와 꽃이 펼쳐져 있니. 앞뒤로 흔들거리는 그네가 있니? 편안히 몸을 누이는 넓은 의자가 있니? 선선한 바람이 부니, 비가 오니? 나의 뒷마당에는 우연히 자라난 석류나무가 있어. 빨강과 주황 노랑 초록 보랏빛이 휩싸인 열매만 주렁주렁 익어가고 있어.

 

내 생각에, 너도 그렇게 될 거야. 내 생각에, 너는 영국식 뒷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어. 내 생각에 말이야.





[양나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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