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안한 사물들 - 세상을 낯설게 보기 [시각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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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그것이 너무나도 단순하고 친숙하기 때문에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장 기본적으로 탐구해야 하는 것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법이다.
- 비트겐슈타인
현대사회 속에서 사물은 공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수만 개씩 양산되고, 자본주의적 가치 하에서 그 사용가치가 줄세워지는 대상들이다. 전기효율, 소모성, 가성비 등으로써 평가되며 그 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는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본래 사물이라고 하면 통상적으로 생명력이 없는 대상, 생명력이 없어서 모양이 정해져있는 대상을 말하는 것인데, ‘사물’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물질성, 재질감과 같은 특성들은 전혀 사물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 물질주의가 팽배해 있다고는 하지만 물질 그 자체의 특성은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불안한 사물들 展》은, 우리가 잊고 지내는 사물들 그 자체로서의 특성들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본 전시에는 한국 미술계의 80년대생 젊은 작가들 5명이 참여하여, 현대사회 속에서 사물들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에 대해 고찰하고,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낯설게 보는 방식을 제시한다. 이들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고 친숙하게 생각해왔던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감상하고, 우리가 혼란스러운 세계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오며 놓치고 있었던 사물들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본 글에서는 5명의 작가 중 2명의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여, ‘불완전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불안한’ 사물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1. 최고은
남서울미술관의 2층에 전시되어 있는 최고은의 작품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 모니터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최고은의 작품 ‘수지 S’, ‘수지 A’, ‘수지 D’는 각각 CRT(브라운관), LCD(액정 디스플레이), LED 모니터 모양의 작품이며, 컴퓨터 모델링을 이용해 합성수지를 각각의 모니터 모양으로 재현해 내었다. 각각의 모니터는 각 시대의 기술력의 총체이고, 한 시대의 가장 역사적인 장면들은 당시 가장 좋은 화질로 대중에게 제공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현해내는 화면의 선명도, 색상, 화질 등으로 평가될 뿐, 코드가 뽑혀있는 모니터 그 자체의 물리적 형상 자체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해봤자 모니터의 두께 정도이며 이 역시 경제적 효용성의 일부이다). 최고은은 시대를 풍미했던 각 모니터들을 단일한 재료로 만들어내며, 모니터의 모양만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각각 수지 A, 수지 D, 수지 S
폴리프로필렌의 단일한 재료로 구현된 각 작품에는 나사구멍, 전선 커넥터 삽입구, 전선 핀의 종류, 모니터 발열 배기구까지 모두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여기서 관객들은 처음으로 화면이 표시되지 않은, 모니터 그 자체의 모양과 특징을 마주하게 된다. 매 시기 발전해온 각 모니터들을 차례로 관람하며, 관객들은 비로소 기술의 발전과 그것이 야기한 소비의 욕망, PC 통신세대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인간의 그 욕망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
기술의 발전에 의해 새로운 모니터가 등장할 때마다 그 이전 세대의 모니터는 더 이상 쓸모 없는 사물이 되어 버렸으며, 지금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이 LED 모니터 역시 언젠가는 생산과 소비, 사용과 소멸의 이치에 맞추어 사라질 것이다. 이러헥 생산되는 순간 소멸이 예정되는 현대 사회 사물들의 모습을 최고은 작가가 재치있게 표현해 주었다.
2. 이희준
이희준의 작품은 《불안한 사물들 展》의 주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풍경화이다. 총 7점의 풍경화가 남서울미술관 2층의 왼쪽 방들에 전시되어 있으며, 이들은 작가가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마을 비에이에서 본 풍경들을 기반으로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풍경화들이 모두 추상화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풍경화는 모두 단색의 점, 선, 혹은 세모와 네모로만 표현되어 있으며 이들 작품들 모두 약 5가지 정도의 색깔만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작품에는 작가가 여행지에서 자신의 추억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이 작품들은 이희준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추상화로 옮긴 것들이다. 작가는 자신의 사진들 수백 장을 보며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떠올리며 사진을 엄선하여 간단한 도형들로 이루어진 추상화를 완성했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 제작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추억을 구체적인 하나의 장면으로 남겨놓기보다는 스스로의 내면에 남아있는 여행에서의 감정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우리가 여행지에서 절경을 감상하였을 때 우리가 받은 감동의 일부밖에 담지 못한다. 자연 환경 속에서 우리가 풍경을 감상하면서 감동을 느끼는 것은, 그 시점의 기온과 습도, 풍량, 자연의 소리 속에서 자연 경관을 감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장소에 이르기까지의 역경, 혹은 여행 동반자에 대해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 등도 자신이 한 장소에 다다랐을 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엄청나게 많은 시각적인 정보를 담고 있지만, 한 시점의 감동을 유추하는 데 도움이 될 뿐, 그 감동을 재현해내지는 못한다. 우리가 여행을 통해 얻은 감정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품은 여행지의 추상적인 감동을 구체적인 풍경화로 재현해내지 않고 추상화로 표현함으로써, 그 감동의 본질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한편 이희준의 작품을 통해 현대인이 여행을 대하는 태도를 성찰할 수 있게 된다. 어떻게든 여유를 확보해서 여행을 떠나지만, 시간은 짧고 여행 스케줄은 빡빡해서 여행지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최대한 많은 사진을 남기려고 노력한다. 사진은 실제 모습보다는 예뻐 보이는 모습, 특히 행복해 보이는 여행자들의 피사체를 담기 위해 여행자들은 노력하며, 만족스러운 사진들은 SNS에 업로드되며 타인의 부러움을 사게 되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들과 작위적인 사진들에는 여행의 감동, 다시는 재현되지 못할 그 시점의 공기의 무게나 햇살의 따스함, 그러한 것들이 빚어내는 감동이 담기지 못한다. 이는 어쩌면 여유가 없는 생활을 사는 현대인들이 여행에조차 낭만을 담아내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이희준의 작품들은 현대사회 속에서 여행과 사진이라는 대상을 조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큰 의미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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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본 전시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나의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완성품 자체도 예술이긴 하지만 현대 미술에 있어서는 작가가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과정 역시 예술에 해당하기 때문에 각 작품의 설명을 참고하며 작가가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 역시 재미있다. 예를 들어 이희준의 작품에서 추상화를 이루는 각 색깔은 사실 서로 다른 재료를 이용해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작가가 자신의 감상을 표현하기 위해 색깔뿐만 아니라 질감까지도 깊이 고민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렇게 작가가 작품을 완성해 나가는 모습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안내책자를 충분한 시간을 들여가며 읽으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도 좋고, 도슨트와 함께 할 수 있는 감상 시간대를 미리 파악하여 전시에 참가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두 작가의 작품들은 현대예술에 있어서, 예술을 발생하게 하는 다양한 발상들과 예술을 구현해내는 참신한 기법들을 보여준다. 이는 틀에 박히지 않은 현대 시각예술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며, 동시에 현대예술의 감상이 대중에게 새로운 사고 회로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고 있다. 본 전시에 참여하고 있는 나머지 세 작가 역시 현대사회에서 사물들의 위치에 대해 훌륭하게 사유하고 있어,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대중에게 의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본 전시가 일상에 새로운 활력소가 돼주기를 바란다.
[한승빈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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