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어른들을 위한 산타클로스 - 지금 여기, 마임 [공연]

다정한 하얀색 거짓말
글 입력 2019.08.3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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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가지 거짓말이 있다. 일반적인 까만 거짓말과 하얀 거짓말. 이 둘 모두 어쨌든 의도와는 무관하게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꾸며 대어 말을 하는 것이지만 가져오는 결과는 아주 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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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의 거짓말이라고도 불리는 ‘하얀 거짓말’은 상대를 이롭게 해 주기 위한 의도를 지닌 거짓말을 말한다. 친구가 열심히 구워서 선물해준 쿠키가 맛이 없을 때, 상사가 이상한 옷을 입고서는 새 옷을 샀다고 자랑할 때 등등 일상에서는 이러한 하얀 거짓말을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그리고 효과는 꽤 좋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실의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아교를 붙인 것처럼 상대와 나 사이의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얀 거짓말의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에게 마임 공연은 하얀색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무대 위에는 거대한 산도 없고 거센 바람도 없다. 신비한 우주 공간도 아니다. 그 사실을 나도 머릿속으로는 알고 마임이스트들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관객에게 환상적인 경험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해 공연하는 배우들을 보고 있자니 그 다정한 거짓말에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


<지금 여기, 마임>은 <여정>, <마당을 쓸다가>, <지구별 여행>, <사진>, <2019 꿈에~>라는 다섯 파트로 구성되어 있는데 , 모든 공연이 다채롭고 훌륭했지만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진>이었다.


한 남자의 일생이 담긴 앨범을 살펴보고 그 사람의 앨범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은 아주 묘하고 신비로웠다. 또한 유튜브 브이로그가 성행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관심이 많은 요즘 사람들에게 알맞은 컨텐츠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이 공연을 즐기기 위해서는 오늘 처음 보는, 그리고 가상의 인물인 저 남자의 삶이 궁금하다고 여겨야하기 때문이다.


‘앨범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흔히 타임 슬립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다. 또는 그만큼 앨범에 집중하였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관용어이다. 그렇지만 이 공연에서만큼은 단어 하나하나 그대로의 뜻처럼 정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사진 속으로 두 발을 집어넣는 순간 한순간에 조명 하나로, 그리고 그의 표정 하나로 무대의 시간은 몇 십 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그의 삶은 아주 평범했다. 아내를 만났고, 사랑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아주 평범한 남자의 삶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그 상황에 공감하고 빠져들 수 있었다. 아, 나도 저렇게 아빠랑 두 발 자전거를 타는 연습을 했는데, 나도 저런 데이트를 했는데. 그리고 그에게 만큼은 특별한 이 과거 속에서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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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짧은 나의 지난 삶을 떠올렸다. 그리고 집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앨범 생각도 났다.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역시 내게도 행복하고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빛이 잔뜩 바래 있는 사진처럼 따뜻한 노란색에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행복한 추억 속에서 빠져나온 그의 표정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는데,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모든 순간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니까. 아무리 힘든 시간이었어도 아름답게 그때를 추억하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날의 아픔을 극복해냈기 때문이겠지.


 

우리는 잔뜩 일그러지고 삐죽빼죽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넘쳐나고 모순되는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지는 이상한 나날들. 이 시간들을 위로해 주는 건 하얀 거짓말들이 아닐까 싶다. 머릿속으로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냥 눈앞에 펼쳐지는 마법을 믿어버리고 싶은 마음.


그리고 우리에게 이 환상의 세계를 심어주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마임이스트들이 있어서 우리의 삶이 조금 더 반짝반짝하게 빛날 수 있지 않을까. 대사 한 마디 없이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초대하고 설득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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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1살이 되던 어느 여름날, 나는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알아버렸다. 더 이상 그에게 선물을 달라고 편지를 쓰지도 않았고 크리스마스 이브 밤도 여느 날과 똑같을 뿐 설레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음 날 아침 알록달록 꾸며 놓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는 동생의 선물뿐만 아니라 언니와 나의 선물까지 놓여 있었다.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의 동심을 지켜주기 위한 엄마의 작은 배려였다.


그렇게 나는 그의 존재를 알고 나서도 5년 동안은 비밀인 듯 비밀이 아닌 그에게 선물을 받았다. 그의 존재를 알아버렸어도 선물을 받는 일은 사실 설렜다. 동생을 위해 엄마가 정성들여 준비해 놓은 그 세계가 참 좋았고, 그 시간만큼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임이스트들은 어른들을 위한 산타 같다. 훌쩍 커 버렸다고 생각한 그때의 나는, 적어도 크리스마스 날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트리 아래로 달려가 선물을 열어보는 어린아이가 될 수 있었으니까. 적어도 마임 공연을 보는 그 시간만큼은 그들을 믿고, 그들이 정성껏 꾸며놓은 세계 속으로 풍덩 넘어가 버리는 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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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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