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복잡하게 엉켜있는 사회적 영향력에 관하여, '척추를 더듬는 떨림' [시각예술]

글 입력 2019.08.3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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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힘인 '사회적 영향력'의 힘의 근원은 발견 가능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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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리오 갤러리 - 삼청동
 

'더듬는다'라는 동사와 '떨림'이라는 수식어는 육체적 감각을 연상시킨다. 특히, 그 대상이 신체 부위인 '척추'이기에 전시의 제목이 주는 첫인상은 인간이 느끼는 신체적 욕망을 표현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척추를 더듬는 떨림' 전시는 신체적 욕망을 말하는 전시가 아니다. '더듬는다'와 '떨림'이라는 촉각이 아닌 '척추'라는 대상에 중점을 두었다. '척추'는 인간의 신체부위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주요 신경들이 거치는 통로이거나 사람이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둥 역할을 겸한다. '척추'가 손상되면 이러한 활동들이 불가능해 온전한 모습으로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척추'를 왜 더듬으며, 그 행동을 떨린다는 것으로 표현했을까. 전시는 인간이 활동하도록 하는 모든 에너지 공급원인 '척추'를 '사회적 영향력'으로 해석했다. 사회 구성원 속 인간들은 각자 특이한 행동이나 판단을 내린다. '사회화 과정'인 인간의 사고 발달 과정은 한순간 이뤄지지 않는다.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나타난 역사적 사건과 이념들이 '사회화 과정'의 틀을 만들었다. 이는 인간의 가치판단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힘을 갖게 되었다.

문제는 그 힘이 그릇된 방향을 두고 있을 때다. 전시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사회적 영향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개개인에게 힘을 행사하고 있으며, 그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한다. 행동이 일어나는 가치판단의 기저인 '사회적 영향력'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힘이다. 오랜 시간 엉켜 있어 명백히 그 실체를 정의 내릴 수 없는 '사회적 영향력'을 알아가는 과정은 그 힘을 구성하도록 한 인간의 시행착오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당혹감을 수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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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Zora Mann, Cosmophagy, 2015, Plastic beads, string, fabric, 350 x 460 cm


조라 만(b.1979, 암스테르담)은 아프리카에서 유년기를 보낸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 <코스모파기>를 전시한다. 해양보호 활동에도 참여한 적이 있는 작가는 케냐의 해변과 수로에 버려진 플라스틱 슬리퍼들을 재활용해 커튼을 만들었다. 인도양의 가장 큰 오염원이기도 한 슬리퍼들은 인류의 욕망이 되돌릴 수 없는 환경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공동체적 인식을 재고한다.


- 전시 리플렛 중



조라 만의 <Cosmophagy(코스모파기)> 작품 속에는 두 개의 눈동자가 등장한다. 이 눈동자는 어디론가를 응시한다. 커튼의 뒷면으로 돌아가 눈동자가 있는 위치에서 바라보면 다른 작품이 어슴푸레 보인다. <Cosmophagy(코스모파기)> 작품 속 눈동자는 바로 이 작품을 응시하고 있다. 환경파괴를 초래할 정도로 대량의 소비재 생산을 유도한 사회적 영향력은 그 힘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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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Sol Calero, Amazonas(right panel, left panel), 2017, pastel, chalk, black board pain ton canvas, 290 x 20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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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1, Kasia Fudakowski, The revenge(2019, 200 x 172 x 30 cm), Waiting Room(2019, 190 x 120 x 10 cm), Red Tape(2019, 202 x 149 x 2 cm), First Intermission(2019, 236 x 107 x 4 cm), Mouth to Mouth or Either(2018. 220 x 110 cm), The Bride Stipped Bare...(2017, 185 x 121 x 32 cm), The (Liquid) Host/ess(2017, 235 x 123 x 30 cm), The Gender-Bender(2017, 193 x 188.5 x 25 cm), mixed media, steel, brass, fabric, wood, paint


솔 칼레로(b.1982, 카라카스, 베네주엘라)는 건축의 구조적 요소를 회화와 설치에 활용한다. (중략) 건축물은 한 단체가 설립된 것을 물리적으로 상징하며 그것이 형성하는 권력구조의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는 매개체이다. 작가의 출생지인 남미의 시각문화를 기반으로 한 스튜디오 볼테르의 빅토리아 식 건축양식을 재해석한 이 작업은 사회가 특정문화를 차용해 권력의 지배구조를 형성할 수 있다는 과정을 탐구한다.


- 전시 리플렛 중



카시아 푸다코브스키(b.1985, 런던)는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패널들을 연결시키는 <지속성없는없음> 시리즈를 전시한다. 작가는 패널을 이루는 조각들을 통해 의도적으로 연속성이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을 병치시키고, 각 패널들이 임의로 해체되고 매번 새롭게 조합될 수 있게 함으로써, 관객의 일상적 범주화와 정의내림을 의도적으로 부정한다. (중략) 작가는 비어있는 대합실의 의자, 욕실 커튼에 갇힌 새우와 같은 설치물을 제작함으로써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요구 받는 책임과 개인의 자유가 통제, 감시되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에 주목한다.


- 전시 리플렛 중



힘의 방향이 닿는 곳은 솔 칼레로와 카시아 푸다코브스키의 작품들이다. 각 작품들 역시 부조리한 권력이 실제적 힘을 행사하는 것과 개인의 자유로운 가치 활동을 제한하는 기준을 만들어낸 사회적 영향력을 의미한다. 이처럼 전시 초입에 설치된 조라 만의 작품의 시선은 서로 다른 작품을 향해 있다.

그러나 전체 전시 구성은 세 작가들의 작품을 삼각형 형태로 구성했다. 즉, 조라 만, 솔 칼레로, 카시아 푸다코브스키 작품은 서로를 향해 바라본다. 한 집단에서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이 그 범위를 한정해 놓고 있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릇된 방향을 가진 전혀 다른 성격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 힘을 끊임없이 주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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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아 푸다코브스키가 여러 패널을 지그재그 방향으로 이어 붙여 만든 작품 앞에 서면 조라 만과 솔 칼레로의 작품이 패널 너머로 보인다. 의자 형태의 패널에서는 조라 만의 작품인 두 개의 눈동자와 마주친다. 창문 틀을 연상시키는 패널 앞에서 보이는 솔 칼레로의 작품은 마치 갇혀 있거나 멀리 있는 사물을 마주한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본래 형태의 작품이 다른 작품의 구조와 덧입혀서 볼 때 예상치 못한 장면을 발견한다.

한 개인의 일상을 연상하는 연결된 패널은 저 멀리 환경파괴의 현장과 연관된다. 사회로부터 받는 통제가 무엇이든 간에 그 개인은 또 다른 환경파괴를 만드는 존재로서는 통제받지 않는다. 일상적 소재와 커튼의 눈동자가 한 장면으로 담기는 이유다.

집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창문 틀과 같은 형태의 패널은 저 멀리 권력을 상징하는 작품과 마주하고 있다. 창문 틀은 권력을 향해 피해있는 것 같은 느낌과 권력을 향해 가지 못하도록 막는 느낌을 준다. 수동적 자세를 만들기도 하며, 행동 통제와 같은 억압하는 힘을 나타낸다. 그 권력이 부조리함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어떠한 행동이든지 권력 앞에 무기력하게 있도록 만드는 사회적 영향력을 생각할 수 있다. 철로 만든 구조물의 패널이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그린 회화 작품과 같이 볼 때 주는 이질적 느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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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F, Petrit Halilaj, Abetare(My best Friends Left Me(Elvis, Driton, Messei)), 2019, Steel, wood, 440 x 250 x 180 cm


페트릿 할릴라리(b.1986, 스케렌데라이-코소보)는 2015년부터 작업해 온 <철자법 책> 시리즈를 소개한다. 작가는 그의 고향이자 비극적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코소보의 한 학교 책상에 그려진 낙서들을 대형 설치물로 만들어낸다. 사소하게 잊혀지는 학생들의 낙서를 통해 우리 개인의 기억이 상실되거나 희미해지는 것을, 나아가 한 사회의 역사가 왜곡되어 기록되는 것을 보존하는 행위라고도 읽을 수 있는 그의 작업은 어떻게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공동의 역사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 전시 리플렛 중



책상 위에 평면의 형태로 그려진 낙서는 페트릿 할릴라리 작품에서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의 움직임을 순간 포착하여 표현했다. 낙서를 그린 이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힘을 가지지 못한 존재로서, 사회화 단계를 학습하는 '학생'이다. 작품에 보이는 얼굴 형태는 'My best Friends Left Me(Elvis, Driton, Messei)' 제목에서 보듯이 거대한 힘에 의해 무고한 피해를 입은 힘없는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낙서가 소용돌이치며 뻗어나가는 형상은 사회적 영향력이 개인에게 미친 혼란스러운 감정과 사건들이다. 그리고 어디론가로 계속 향해 가는 형태에서 그 이야기가 중단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개인에게 미친 사회적 영향력은 때론 잊지 못할 사건과 그로 인한 경험을 하도록 만든다. 특히 학생이라는 신분은 그 사회적 영향력이 그릇될수록, 부정적 영향을 습득하기가 매우 쉽다. 잘못된 가치관이 자리 잡힐 위험과 비극적 사건은 사회적 영향력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도록 한다. 한순간의 영향력이라 할지라도 그 대상이 인간이기에, 그 사건은 계속해서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낙서의 형태가 전시장 전체를 휘감을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에서 사회적 영향력이 개개인에 의해 그 의미가 퇴색, 심화될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전시의 전체 구성은 예상치 못한 마주함과 시선을 읽도록 만든다. 각각의 작품 모두 고정된 형태가 아닌 다각도에서 다양한 해석을 하도록 여지를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그 해석의 기저는 '사회적 영향력'이다. '공동체, 사회적 구조, 다양한 사회의 정체성, 위계의 정치학'으로 풀어낼 수 있는 영향력은 전시에서 '봐서는 안 될 것을 본, 보고 싶은 않은 것을 목격한, 보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상황' 등으로 정의했다. '두려움'으로 묶어지는 이 정의는 사회적 영향력이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계속해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뜻한다. 막을 수 없는 힘이 된 데에는 이 힘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은 끊임없는 사고와 행동을 하는 존재다. 그 방향이 잘못된 것을 향할 때 영향력의 크기와 결과는 시공간을 더욱 가리지 않는다.

서로의 작품을 마주 보게 구성한 것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장면들과 미완성의 형태로 남은 듯한 작품들은 모두 '사회적 영향력'이 깊게 침투해 있음을 뜻한다. 다각도로 보이는 새로운 장면은 '사회적 영향력'의 근원과 시행착오의 이야기들을 섞여 보여준다. 한 개의 작품에서도 그 답을 생각해 볼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작품들을 엮어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원인에서 결과로 발생하지 않았기에 정답이란 없다. 따라서 그 근원과 이야기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관람객에게 질문과 여지를 남긴다. '척추'로 표현한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인 '사회적 영향력'의 근원의 예상치 못한 발견은 '떨림'을 주며 계속해서 '더듬으면서' 찾아가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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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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