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차별 없는 정치를 위한 투쟁 – 제19회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정당이 필요합니다
글 입력 2019.08.30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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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같은 시국에는 TV든 인터넷이든 틀었다 하면 정치인들이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지겹도록 볼 수 있다. 아니, ‘요즘’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내가 한글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내가 봐온 정치인들은 늘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현실에서 부모님이 서로 말다툼을 해도 한숨을 삼키며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나의 대처였는데 브라운관 안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싸운다고 해서 갑자기 어른들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로 언성을 높이는 장면을 보면 채널을 돌려버렸고, 두꺼운 글씨로 전하는 정치 속보보다는 내 입맛에 맞게 골라주는 유튜브 추천 영상을 클릭했다. 부끄럽지만 정말로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살았다.




페미니스트 창당 도전기



제19회 서울국제뉴미디어 페스티벌이 지난 8월 24일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올해의 슬로건이 ‘젠더X국가’였던 만큼 네마프 2019에서는 젠더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국가와 자본을 바라보는 아트워크들을 다채롭게 만나볼 수 있었다. 인상 깊은 작품들로 가득 찬 영화제였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바로 <페미니스트 창당 도전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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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베이스베리 감독의 <페미니스트 창당 도전기>는 세계 최초의 페미니스트 정당인 ‘F!’의 창당을 위한 험난한 여정을 담은 스웨덴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2005년 봄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기록은 이미 성평등을 이룩한 국가라는 평가를 받는 스웨덴에서도 여전히 차별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이야기와 페미니스트 정당의 필요성을 시사하며 시작된다.



"정부와 정당에 포섭된 여성운동이 스웨덴 사회에 팽배한 가부장적 성 위계질서에 도전하는 데 실패했다. 이제 페미니스트들이 직접 정당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페미니즘 이슈를 풀어나가겠다.”


– 2005, F!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한 F!(Feminist Initiative)는 다양한 분야의 페미니스트들과 함께 정당을 구성하며 새로운 대안정치의 출발을 알렸다. 이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부장적 권력구조 속에서 차별 받는 여성을 위한 정치를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F!가 이렇게 확고한 지향점을 설정한데에는 당시 스웨덴만의 맥락이 존재한다.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나라, 스웨덴. 이미 세계적으로 앞서 있고 상당한 수준의 성평등을 이룬 국가라는 ‘스웨덴 신화’가 거룩한 땅에서, 기존 정당은 여성 관련 의제는 늘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해왔다. 성평등은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제는 다른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차별을 외면하고 개선의 여지를 말살시킨다.

스웨덴 정당 대다수가 스스로 여성주의 정당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여성들의 삶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전히 길거리의 소년이 여성에게 ‘강간해!’라고 소리치며 위협하는 것이 남자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국가가 성평등 문제의 중요성을 쉽게 묵과하고 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F!가 2005년 스웨덴 사회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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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미니스트 정당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빠듯한 재정 상태로 터무니 없이 적은 인력이 모여 살면서 처음 본 종류의 일처리를 쉴 틈 없이 진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외부로는 ‘남성혐오자’, ‘나치페미니스트’라는 낙인과 무차별적인 언론의 공격에 대응해야 하고, 내부에서는 다양한 목소리에서 시작된 갈등이 깊어져 간다. 무지갯빛 이상향만 보고 달려가기에 이들 앞에 펼쳐진 난관은 험난하기만 하다.



“페미니즘을 위해 목숨을 걸 준비는 안 된 것 같아요.”


– F! 대변인 데브림 마비


당내 핵심 인물을 향한 언론의 공격과 쏟아지는 살해 협박은 실제로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쥐고 흔든다. 많은 것을 희생하고 신념을 위해 F!에 입당한 위원들은 계속되는 위협에 위태롭게 흔들린다. 이들에게 씌워지는 숱한 낙인들은 사실관계와 상관 없이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실질적인 세력 약화를 야기한다. 정치라는 펜스 앞에서 좌절하는 그들의 모습은 영화 초반부에서 보여준 강인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대조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실망했다고 말할 수 없죠. 대안정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대중에게 알리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해요.”


– F! 대변인 구드룬 휘만


외면과 조롱, 위협을 헤치고 겨우 버텨낸 첫 선거에서 F!는 지지율 0.68%라는 의석 확보 최저선인 4%에 훨씬 못 미치는 기록으로 참패한다. 그러나 2014년, 창당 10주년이 된 해 이들은 원외 정당 중 최대지지율인 7.8%로 유럽 의회에 당선된다. 존재 자체만으로 공격과 배제의 대상이었던 페미니스트 정당이 세계 최초로 펜스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10년 전 고난과 역경을 고스란히 겪어내며 탈당까지 고려하던 당내 핵심 인물들이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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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당시 너무나 급진적이라며 대중들이 거부감을 표했던 F!의 핵심 의제는 ‘동일임금, 공동육아, 폭력종식’이었다. 그렇게 살기 좋다는 스웨덴에서도 성평등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 세 가지를 세상에 설득시키기까지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우리 당이 꼭 필요하다고 확신했지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며 너스레를 떠는 대변인 구드룬의 미소를 보면서 F!의 쾌거에 감격스러운 한편 눈 앞이 아득해지기도 했다.

여성의 투표권을 위해 투쟁한 ‘서프러제트’에서부터 페미니스트 정당까지 정치라는 펜스를 뚫고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세상의 어느 한 조각만이 인류의 보편으로 관철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정치가 보편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충분히 대표할 수 있어야 한다. 네마프 2019의 ‘젠더X국가’ 슬로건에 걸맞는 <페미니스트 창당 도전기>는 그런 점에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장황하게 감상평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은 나도 그동안 정치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온 문외한이다. 그 말인 즉슨 언론이 F!의 불화와 루머에만 집중할수록 실질적으로 지역 정치에 참여하는 여성이 줄어들고 여성 쉼터의 지원이 감소하게 되었다는 영화 속 대사처럼 나 또한 사실관계를 따져보기보다는 외면하는 방식으로 펜스가 누군가를 밀어내기 쉽도록 동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나의 수동적인 태도가 그동안 내가 원하는 이상향을 무너뜨렸을 수도 있다는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지고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진다. 지금도 여전히 형편없는 독해력으로 이리저리 언론에 휩쓸리고 있을 주관이지만 경각심을 가지고 정치와 같은 펜스 내부의 게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가 되는 영화였다.



[이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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