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흐릿하고도 선명한 자국, 비행운 [책]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는 신의 손길처럼
글 입력 2019.08.1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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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살면서 나만을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잦아진다.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잘 먹고 잘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취미 생활을 하고 원하는 옷을 입고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빠져 타인의 외침은 모두 소음이 되고, 어느새 내 생각조차 감당하기 버거워진다. 불행이 나를, 나만은 피해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하루가 늘어간다. 오늘도 부모님의 그늘 아래서 평온하고 안전한 밤을 맞이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과욕이다. 그걸 알면서도 욕심은 끝없이 늘어진다.

 

김애란의 소설 <비행운>은 마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는 신의 보드라운 손길과도 같다. 작가는 세상과 개인의 아픈 구석을 한 자 한 자 소중히 옮겨 적어 기억하고 추모하며 위로한다. 소설 속 어절들이 행인들을 어루만진다. 곧바로 눈물짓게 하기보다는 차분히 스며든다. 작고 가녀린 한 번의 울림으로 마음에 수십 개의 동심원이 퍼져나간다.

 

책을 지배하고 있는 감정은 우울이 아니다. 실은 불편함이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개개인의 속사정, 어딘가에서 일하고 숨 쉬고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에 대한 거북스러울 만큼 자세한 묘사 때문에 재빨리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단편마다 예의를 차리고 싶고,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에게 작은 눈인사라도 건네고 싶어진다.

 


곧이어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악의 없는 무심함도 때로는 타인을 못살게 군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지라 자신의 허물을 곧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다만 시간이 지나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면 괜스레 멋쩍고 미안하고 그런 것이다.


<비행운> 의 주인공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그저 잘 살고자,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날을 기대했을 뿐인데- 번거롭고 거추장스러운 일들이 들러붙어 스스로를 작아지게 하고, 옆 사람을 한 번 괜히 흘겨보는 모습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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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스물,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무엇보다 '물속 골리앗'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한 남자가 살던 아파트는 폭우로 인해 외딴 섬이 되어버리고, 그곳에 고립된 인간의 사투는 소름 끼치도록 두렵고 막막하게 그려진다.


사는 곳이 망망대해처럼 변한다는 것이 어디로도 향할 수 없는 누군가의 아득하고도 갑갑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감히 짐작해본다. 탈출하고자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곳, 가난이라는 굴레.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지만 긴 여운이 남았다.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다시 읽게 된 책에서는 '하루의 축'과 '서른'을 곱씹게 되었다.


‘하루의 축’에서 주인공 기옥이 감옥에 간 아들의 편지를 펼쳐,  "엄마 사식 좀"이라는 단 한 문장을 마주했을 때 기옥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저 하나만을 바라보고 그 모질고 긴 세월을 견뎌온 여자에게는 너무 형편없는, 한없이 이기적이고 무정한 아들이다.


그러나 기옥은 아마 계속 아들을 위해 살겠지, 머리가 몽땅 다 빠질 때까지 사식을 챙겨주고, 벅찬 청소 노동을 하면서도 아들을 안타까워하며 살겠지.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한 편으로 나는 엄마에게 어떤 자식인가 떠올려보았다. 나도 가끔 엄마에게 힘이 쭉 빠지는 철없는 소리를 내뱉지 않는지.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좀 씀씀이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언니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니까 제가 겪은 모든 일을 거쳐갔겠죠? 어떤 건 극복도 했을까요? 때로는 추억이 되는 것도 있을까요?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것은 없는데.


다른 친구들은 무언가 됐거나 되고 있는 중인 것 같은데. 저 혼자만 이도 저도 아닌 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해져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고요.


- '서른' 중


 

‘서른’은 충격적이었으나 담담했고, 모질었으나 따뜻했다. 주인공은 지울 수 없는 잘못을 했지만 그것은 온전히 개인의 잘못은 아니었다. 서른 축제는 끝났다고 누군가 선언하기 전에 번듯하게 무언가 이루고 싶었던 죄였다. 사람을 믿고 따른 죄였다.


문제를 도저히 홀로 해결할 수 없어 타인에게도 족쇄를 채우고 만 주인공은, 편지를 통해 자신에게 다정했던 과거의 인연, ‘언니’에게 스스로의 잘못을 낱낱이 고한다. 언니는 뜻밖의 편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조금 울고 주인공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3.

 

비행기가 날아가고 하늘에 남은 자국, 비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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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지나가고 내 마음에도 한 줄 선명하고도 흐릿한 구름이 끼었다.


<비행운>의 모든 주인공은 계속 나름대로 살아갈 것이다. 크고 작은 잘못과 상처는 뒤로하고, 시간은 흐르고 비행운은 곧 사라진다. 사라진 비행운과 달리 마음의 자국은 선명하더라도, 꿋꿋하게 나름대로 살아갈 것이다.





정선은 태그.jpg
 

[정선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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