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의 정의, 외로운 "수수께끼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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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아모리(Polyamory)라는 말이 있다. 다자간의 사랑, 비독점 연애를 뜻하는 단어로, 한 사람이 상대들의 합의로 두 명 이상과 연애, 혹은 결혼 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상대방에게 정당한 동의를 얻었다는 점에서 불륜이나 바람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결혼의 제도 내로 한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와도 다른, 새로운 사랑의 형식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두 명의 연인을 사귀기 전에 자신이 두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한다는 것과 다자 연애를 하고 싶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어떤 압박이나 강요도 없이, 두 연인에게 이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합리화한 바람, 불륜일 뿐이다. 영화 <미성년>에서 영주가 바람피우는 남편 대원에게 했던 말이 있다. 넌 두 사람을, 아니, 네 사람을 기만한 거야. 상대의 자의적인 동의가 없는 폴리아모리는 정확하게 이 문장과 맞아떨어진다. 단순히, 상대를 기만하는 것뿐이다.
<수수께끼 변주곡>의 모든 단편에는 비독점 연애라고 말하기 힘든, 그러니까 ‘상대를 기만하는’ 바람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첫사랑’에서는 폴의 첫사랑인 난니가 적어도 20년은 차이가 나는 폴의 아버지와 연애를 한다. 이를 위해 아버지는 해마다 문단속을 한다는 핑계로 가족들을 먼저 본섬으로 보내고 일주일에서 열흘 동안 난니와 비밀리에 만났다. 폴의 어머니는 이 사실을 알았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항상 난니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행동이나 책의 묘사에 어딘지 불안해 보이고 히스테리적인 행동을 한다고 적힌 부분이 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 사실은 두 번째 단편인 ‘봄날의 열병’에서 더욱 확실히 보인다.
‘봄날의 열병’에서 어른이 된 폴은 모드라는 애인을 만난다. 테니스장에서 우연히 만나 뜨겁게 사랑하게 된 둘 사이에 위기가 발생한다. 점심을 먹으러 간 레스토랑에서 모드가 다른 남자와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폴은 온종일 모드가 그 남자와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을지, 언제부터 친해졌을지, 언제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경멸을 드러낼지 등등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는 틈틈이 자신이 테니스장에서 만난 만프레드라는 친구가 얼마나 황홀한 몸을 가졌는지 떠올리고, 친한 지인끼리 모인 식사 시간에 클레어라는 여인에게 키스하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고민과 생각 속에 연인의 바람에 대해 충격을 받은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폴은 오히려 담담하고, 차분하다. 슬픔을 느끼고 분노하지만, 그 분노가 절실히 사랑하는 연인이 으레 그렇듯 추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단편이 진행되는 내내 폴은 모드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무슨 행동을 했고 어떤 생각일 것으로 추측하지만, 관계가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정작 마음이 떠난 쪽은 폴이었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상대가 마음이 떠난 게 보여 분노하고 슬퍼하고 언제쯤 경멸의 눈초리로 대할지 생각하는 건 모드 쪽이었다. 택시를 타고 가며 둘은 이런 얘기를 한다. "모드는 이제 당신을 잃게 되는 거냐고 불안해한다. 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봄날의 열병’을 다 읽고 나면 처음에 폴이 분노했던 부분은 사실 모드가 분노한 부분이고 폴이 걱정하고 상상한 것은 모드가 오랫동안 상상하고 걱정했던 부분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하면 폴은 모드가 그동안 불안해하고 걱정한다는 걸 무심코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첫사랑’에서 어머니가 왜 그렇게 불안한 듯 행동하고 반면 아버지는 담담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성인이 된 폴과 모드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폴은 아버지를 닮았다.
‘만프레드’는 모드와 연애 중인 폴이 모드와 연애를 시작한 방식과 똑같은 형태로, 테니스장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만프레드를 얼마나 스토킹하고 숭배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만프레드도 파트너가 있는 상태였기에, 사랑에 진전이 느리다. 그러나 둘은 2년 만에 겨우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얼마나 상대를 생각하고 사랑하는지 열렬히 늘어놓는다.
“다시 생각해보니 안 되겠어요. 오늘 전화 안 할 거예요.”
“왜죠?”
“복잡하잖아요. 누군가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
침묵의 순간이 방금 우리 사이에 일어난 모든 일을 지워 버리려 위협하고 지난주, 지난달, 지난해의 우리로 돌려보내는 듯합니다. 난 무슨 말이든 해야만 했죠.
폴이 머뭇거리는 만프레드를 멈춰 세운다. 결국 둘은, 적어도 폴은 연인과 완전히 헤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만프레드를 만나게 되고, 모드가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운다고 의심하던 저녁 모임에서 온종일 만프레드를 떠올린다고 서술하는 편지를 쓴다.
‘별의 사랑’에선 클로이라는 여인이 나온다. 대학 때 사랑에 빠졌으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둘은 동창회에서 드디어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 이후 4년에 한 번씩 약 이틀 정도 만나며 성교를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메일을 보내며 지낸다. 폴은 이메일에 담긴 모든 문장을 발기할 때까지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흥분을 돋운다. 한때는 싸우다가 한때는 화해하고, 연락이 끊기기도 한다. 폴에게 만프레드라는 애인이, 클로이에겐 남편이 생긴 뒤 폴과 클로이, 만프레드와 남편은 같이 저녁식사를 가진다. 이를 계기로 연락을 계속하다 어느 주말, 그때로 돌아가는 기분으로 둘이 처음 사랑에 빠진 대학교에 찾아간다. 둘은 불안이 가시지 않은 채로 서로서로 반쪽임을 확인하며, 같이 잠에 빠진다.
“잘 자.”
나는 등을 돌리며 말하는 그녀를 껴안았다.
“하지만 이건 알아.” 그녀가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뭐?”
“우린 절대 끝나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절대 끝나지 않아.” 그녀를 더욱 세게 안았다. “별의 사랑, 내 사랑, 별의 사랑, 살지는 않을지라도 절대로 죽지 않아. 세상을 떠날 때 내가 가져갈 유일한 것. 너도 그렇겠지.”
마지막 단편인 ‘에빙던광장’에서 폴은 하이디라는 젊은 자유기고가의 오페라 관련 기사를 두 페이지 꽉꽉 채운 거절 통지서에 그녀의 장점과 약점을 요약해준다. 거절 통지서가 계기가 되어 둘은 애빙던광장에서 자주 만난다. 폴은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이제는 좋은 친구로 남은 만프레드는 그에게 조언해준다. 넌 항상 그 자리에 없는 걸 찾으려고 해. 폴은 만프레드의 조언을 따르기 위해 애쓰지만, 하이디에게 지나치게 모호하게 행동한다. 저녁 식사 외 기타 등등을 하기 위해 만난 자리에서, 하이디는 다소 냉담해져 집으로 돌아간다. 폴이 몇 번이고 하이디에게 메일을 주지만 답변은 이전처럼 제대로 오지 않는다. 폴은 지나간 하이디와의 연애를 그리워하다, 어느새 아내가 된 클레어에게 돌아간다.
‘첫사랑’을 제외한 모든 단편에서 폴은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며 사랑을 갈구한다. ‘봄날의 열병’과 ‘만프레드’에서는 모드와 연애하며 만프레드를 사랑하고, 때론 클레어나 가비에게 시선을 주기도 한다. ‘별의 사랑’에선 만프레드와 연애를 하면서 클로이를 사랑한다. 늘 육체는 다른 사람에게 있으면서 마음은 그에게 있다고 고백한다. ‘에빙던 광장’에서는 모드도, 만프레드도, 클로이도 아닌 클레어와 부부가 된다. ‘첫사랑’에선 폴 대신 그의 아버지가 난니와 바람을 피운다.
책은 약 5쪽에 한 번씩 성관계하는 상상이나 남의 육체를 살펴보는 묘사, 혹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떠올리는 묘사가 쉴 새 없이 나온다. 대부분 탁월한 문체로 적혀있긴 하지만, 쉬지 않고 그런 상상을 해대는 폴이 당혹스럽다. 사람을 볼 때 그의 알몸을 훑어보거나, 그 사람이 키스하거나 섹스를 할 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채취일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기 때문이다.
특히 ‘첫사랑’에서는 난니가 그를 철저하게 어린아이로 대하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그의 표현을 따라가면 성적인 상을 주고, 매혹적인 눈빛을 보내다가 어느 때엔 바로 거두어가는, 폴을 괴롭히는 악랄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나오는 것이 다소 거북했다. 난니에 대해 아는 것이 드물면서도 그를 숭배하다가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철저하게 악마로 만드는 모습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을뿐더러 상대에게 예의도 아니며 어린 날의 치기라고 추억하고 넘어갈 만큼 사소한 일도 아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선 드물게, 폴은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는, 답답하고 짜증이 나며 쉽게 사랑에 빠지는 성격이다. 하지만 단편을 읽다 보면 차츰 폴을 이해할 수 있다. 폴을 사랑하지는 않을지언정, 다섯 가지 사랑의 공통점이 보인다. 바로 외로움이다.
하지만 이곳은 내 삶이 시작되고 멈춘 곳이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 집에서 오래전 여름,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린 10년 전에 모든 걸 바꿔 놓았지만 아무 데도 가지 못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내 삶을 시작하고 멈추었다. 당신이 지금의 나를 만든 거예요, 난니. 어디를 가든, 누구를 보고 갈망하든, 결국은 당신의 반짝이는 빛을 잣대로 재게 되죠.
‘첫사랑’에서 폴의 독백이다. 그의 사랑은 이때 말했듯 항상 난니의 빛을 잣대로 재게 된다. 폴이 평생에 걸쳐 하는 사랑은 그때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여정이다. ‘별의 사랑’에서 클로이가 이런 말을 한다.
난 너에게 그가 있으니 행복해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소용없을 거야. 우리에게 이틀의 시간이 있으니 행복해하라는 말도 할 수 있겠지만 역시 소용없겠지. 넌 외롭고 나도 외로워. 서로를 만나 함께 외롭자, 말하지만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것처럼 잔인한 일은 없어.
‘에빙던광장’에서 만프레드는 이런 조언을 준다. 그만해.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 봐. 넌 항상 그 자리에 없는 걸 찾으려고 해. 또, 하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싫어하지 마세요.
결국, 문제는 언제나 외로움이다. 외로워서 자신을 사랑해줄 만한 상대를 사랑하고, 그보다 더 사랑할만한 상대를 만나면 그에게 넘어간다. 폴은 자신이 사랑했던 상대를 생각하는 법이 없다. 견뎌낼 거야. 한 마디로 자신이 사랑했던 상대이자 자신을 사랑하는 상대는 헤어진다. 혹은 그의 또 다른 사랑을 묵인한다. 그와 있어도 외로우므로, 폴로써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모든 단편에서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과 연인이 따로 있는 폴을 보면서 그가 폴리아모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모든 단편에서 그의 새로운 사랑을 묵인하는 불안한 연인은 있어도 툭 터놓고 대화를 끝내 그의 성 정체성을 인정해주는 연인은 없었다. 그는 그저 외로움을 달래줄 가벼운 만남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다. 남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사회적 시선을 두려워한다. 진지한 만남이나 감정을 겁낸다. 여전히 아버지와 그의 연인 난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이며 제대로 된 마음을 전하는 건 걱정돼 피하는 늙은 어른이다. 오래된 연인은 더는 설레지도 들뜨게 하지도 않지만 새로운 사랑은 마냥 두려워서 그 두 개를 다 잡고 어떻게든 합리화를 한다.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처럼 외롭고, 자기 연민에 가득 찬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다섯 가지 색 사랑 변주곡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하게, 외로움이라는 한 단어로 몰린다.
고개를 돌려 오른쪽의 파멜라를 보고 왼쪽의 나자도 봅니다. 모드는 오른쪽에 앉은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모두 다른 곳으로 데려가 자신을 구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걸까요? 늙어 가는 던컨도 있고 디에고도 있습니다. 내 말에 절대로 웃는 법이 없고 사실은 나를 얼간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숨기려 애쓰는 듯한 클레어도 있죠. 그녀도 자신의 삶으로 들어와 따라와, 클레어, 날 따라와, 라고 말해 줄 사람을 기다릴까요?
그러나 폴의 모든 말을 거리끼던 나라도, 편지 형태를 취한 ‘만프레드’의 이 문장에서는 폴과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사랑이, 실은 외로움을 피하고자 진행되는 게 아닐까. 일상에 지치고 피곤에 쩐 자신을 새로운 곳으로 데려가 설레고 풋풋한 감정을 마음껏 느끼고 싶어서.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외로움에서 비롯된 거란 생각이 든다. 모든 연인을 비참하고 초라하게 만든 그의 행동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12살 때부터, 어쩌면 그 전부터 깊게 자리 잡고 있던 그의 외로운 감정에 대해선 입을 열기가 어렵다.
어느새 첫 단편을 다 읽었을 때의 불쾌함은 다소 사라지고, 어쩌면 폴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결코 연인은 안 되겠지만. 누구나 폴과 같은 외로움을 느껴보았으므로. 다만, 이를 어떻게 방출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나는 다양한 이야기 속에 푹 빠지는 것으로, 폴은 첫사랑처럼 풋풋한 새 연애를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뿐 결국 우리는 외롭다. 폴 덕분에 더더욱 외로워졌을 그의 연인들이 잠시 떠오르자 다시 폴이 미워진다. 그들은 어떻게 외로움을 해소할까. 새로운 사랑으로, 아니면 일로. 책을 덮는 순간 이 안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가 조금은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편다.
[김혜원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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